姜相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호는 백촌(栢村)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7년 6월 3일 경상남도 진주목 정촌면 가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주목 대안면장을 지낸 대지주 강재순의 아들로, 1907년 3월 강주식, 안현과 함께 국채보상회 경남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공립진주실업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10년 7월에는 김재용, 서상돈 등과 함께 학생 수백 명 앞에서 항일 연설을 했다.
1912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진주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강우(李康雨), 김재화(金在華), 권채근, 강달영(姜達永), 박진환, 박용근 등과 함께 비밀 회합을 거듭한 끝에 진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 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먼저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배포하는 한편 인근 각 면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윽고 3월 18일 진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강상호는 진주를 3개구를 나누어 11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봉기하기로 했다. 그는 이날 정준교 등과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개시했다. 그는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상호는 출옥 후 백정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1923년 4월 24일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 등과 함께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했다. 그는 형평사 초대 사장을 맡고 백정 차별은 부당하고 불의하며 조선 전체의 해악이라며 백정들의 인권을 보호할 것을 호소했다.
“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다. “
심지어 백정의 아이 둘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학교에 입학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수백년에 걸친 차별대우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고, 그는 형평사 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을 겪어야 했다. 1923년 5월 25일 탁윤환이란 사람이 형평사 근처의 술집에 가서 술을 달라 했는데 술이 떨어졌다고 하자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한테는 술이 왜 없다고 하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형평사 사람들이 분노해 그를 폭행했고, 탁윤환은 이에 복수하고자 패거리를 몰고 형평사로 몰려갔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탁윤환 일행은 형평사에 찾아가 강상호를 불러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고 의복을 찢는 등 모욕을 줬다고 한다.
이후 많은 이들이 그를 "신백정(新白丁)"이라고 욕하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재산을 형평사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24년 4월 25일에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8월 11일에 개최된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회계를 맡았다. 한편 신간회 진주지회에서는 간사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설립된 형평사가 진주 형평사와 거듭된 마찰을 빛다가 나중엔 서울파와 진주파가 연합하여 대동사(大同社)를 결성하자, 강상호는 형평사 운동이 친일로 변절되었다며 이들과 교류를 단절하고 형평운동에서 발을 뺐다. 실제로 대동사는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국방성금을 모금해 일본 정부에 전달하는 등 친일 행각을 벌였다.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던 강상호는 8.15 광복을 맞이하자 1946년 초 진주 3.1 동지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을 맡았고 회갑연을 열어 수십 명의 채무자들을 초대하고는 자신의 부친 강재순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채권을 포기하겠다며 그들 앞에서 채권 계약서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형평운동을 이끈 전적 때문에 좌익 인사로 간주되어 특무대나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그의 활동은 제약되었다.
6.25 전쟁 직전, 강상호는 대한민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1] 이후 전쟁이 벌어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려진 좌익 계열 인사들을 모조리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상호는 다행히 한 경찰관이 귀띔해준 덕분에 제때에 진주시를 탈출할 수 있었지만, 동생 강영호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진주로 귀환한 강상호는 진주시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진주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당국의 조사를 여러차례 받기도 했다. 그렇게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던 그는 1957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 날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 인사들이 9일장을 치렀다.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쳤다고 한다. 옛 형평사원들은 그를 기리는 조사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 인권 평등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 오던 50만의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
사후[편집 | 원본 편집]
강상호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5년에 비로소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향토 사학자이자 충효실천운동본부 추경화 대표는 “백촌 강상호 선생이 대통령 표창을 받는 것은 백촌 선생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상호 선생은 진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형에 8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가장 낮은 등급의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노동공제회, 신간회 간사 등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형평운동의 선구자이자 주도자였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이 있는 강상호 선생이 2번이나 정부 포상 청원이 거절되는 등 업적에 비해 낮게 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주보훈지청 관계자는 “강상호 선생은 공적심사서에 대구형무소에 6개월간 수형한 기록과 재판기록이 있는 것으로 돼 있어, 추씨의 주장처럼 옥고 1년을 치렀다는 것은 언론보도를 기준한 것으로 신빙성이 약해 번복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라며 “강상호 선생의 공적을 더 입증할 자료가 있으면 재심사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2]
한편 현재 강상호의 유해가 묻힌 진주 새벼리 언덕은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통행이 어렵고 독립운동가 예우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국가보훈처는 2006년 하반기에 그를 독립유공자 이장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강상호의 묘지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것은 진주의 자랑스런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며 결사 반대했고, 진주의 여러 인사들 역시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 결국 그의 유해는 이장되지 않았고, 대신 묘지 위치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졌다.
각주
- ↑ 강상호의 아들 강인수씨는 부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도연맹 명단에 기재되었다고 주장했다.
- ↑ "백촌 강상호 선생 대통령 표창 치욕” - 경남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