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갑오개혁 혹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은 넓게는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선 왕조 내에서 추진된 일련의 근대화 개혁 시도들, 좁게는 그 중에서 1차에 해당하는 1894년 7월~12월 군국기무처의 개혁 활동을 의미한다.[1] 여기서 1894년 7월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시기이며, 1896년 2월은 아관파천을 말한다.

개혁 추진의 배경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1894년 4월 고부민란을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여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자, 서울의 조정에서는 5월 8일부터 이에 대한 대책 수립에 몰입했다. 사태 초기에 조정 내 논의의 초점은 봉기에 대한 진압이나 강경 대응보다는 봉기의 원인이 된 민씨 척족의 실정과 부패한 지방관들에 대한 개혁, 개편에 모아졌다. 이같은 개혁 논의는 비록 당시 사회의 모순을 발본하는 근원적 개혁의 차원에 미치지 못하는 미온한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고종의 의지가 강력하지 못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1894년 당시의 조선 조정이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강제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막연하게나마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정 내부에서의 개혁 논의는 민씨 척족에 대한 정치적 공세의 양상을 띠었다. 궁지에 몰린 민씨 일파는 청에 파병을 요청하여 농민군을 진압하자는 카드를 제시한다. 5월 31일 전주성 함락 이후에도 조정 대신들 다수는 청군을 개입시키는 것에 반대했지만, 6월 3일 민영준은 고종의 윤허를 얻어 원세개에게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다.

1885년 청-일간에 체결된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해, 청-일 중 한 쪽이 한반도에 군을 진주시킬 경우에는 상대방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었고, 또한 통보를 받은 상대방 역시 상응하는 규모의 군을 진주시킬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민영준이 원세개에게 파병을 요청하자마자 거의 즉시 청, 일 양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게 된다.

청일 양국 군대의 진주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과 농민군 간에는 전주 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되어 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였으므로, 조선 조정은 양국에 대해 철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 아래 두려는 야욕 하에 이미 촉발된 청일 양국 간의 군사적 긴장과 충돌은 조선의 외교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6월 10일 인천에 상륙한 420명의 일본 해병이 서울로 진입함에 따라 조정은 일본군의 영향력 안에 떨어졌다. 조정은 청일간 군사적 충돌에서 청군이 일본군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친청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점점 더 많은 수의 일본군이 서울로 몰려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측의 '내정 개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서울로 진주한 일본군을 지휘하던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6월 26일부터 구체적인 '내정 개혁안'을 제시하며 조선 조정을 압박해 왔다.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진 오오토리 공사와의 회담에서 조선 측은 개혁의 표면적 취지와 필요성에 대해 기본적인 동의를 전제하면서, 크게 두 가지 논리를 펴 일본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첫째, 교정청 등을 통해 이미 조선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중이며 그 개혁의 내용이 일본 측의 요구와도 상당 부분 부합한다는 것. 둘째,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킴으로써 조선의 자주 체면을 손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조일수호조규(修好條規)에도 위배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일본 측은 조선의 이같은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고, 또 당시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에도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개혁을 강제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내정 간섭은 일시적으로 포기했다. 대신에 일본은 조선 조정 내에 반청·친일경향의 개화파 인사들로 이루어진 정권을 수립한 뒤 개입을 최소화하고 방임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같은 전략 하에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다.

교정청

일본으로부터의 '내정 개혁' 압력이 이루어지던 도중인 1894년 7월 13일 고종은 개혁추진기구로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한다. 이는 독자적 내정 개혁 추진의 의지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일본 측 주장의 명분을 제거하여 내정 간섭의 압력을 무마하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교정청은 일련의 개혁조치를 의정부에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는데, 주요한 내용으로는 잡다한 세금 항목을 혁파하여 납세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조치와, 불법적인 세금 포탈 및 토지 강점 등에 대한 조치 등이 포함되었다.

교정청의 개혁 내용은 기존 제도의 운영 개선에 머무르는 보수적인 것으로서 근대적 제도 개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교정청의 개혁 활동을 넓은 의미의 갑오개혁에 포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그 구성원으로서 김홍집, 박정양 등 이후 갑오경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개화파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이후 교정청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친일 내각 수립 과정에서 폐지되고, 군국기무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추진 세력의 인적 구성

넓은 의미의 갑오개혁 기간인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정 내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크게 다섯 계파로 분류할 수 있다.

  • 갑오파 :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등
  • 갑신정변파 : 박영효, 서광범 등
  • 정동파 (친미파) :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등
  • 대원군파 : 대원군, 이준용, 이용태 등
  • 궁정파 : 고종, 명성황후 민씨 등

이 중 개혁 전 기간에 걸쳐 가장 집권 기간이 길고 개혁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김홍집, 유길준 등의 갑오파로서, 특히 제1차(갑오)와 3차(을미)개혁의 주도 세력이었다. 갑오파는 민씨 정권기인 1885년(갑신정변 이후)~1894년 사이에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반청, 반민 성향의 관료 집단이었다.

이들 중 대원군파와 궁정파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큰 틀에서 ‘온건 개화파’로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은 1880년대 초반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와 함께 개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은 이들로서, 급진 개화파가 해외로 망명할 때 그들과 절연하고 조정에 남아 다시금 개혁 운동을 전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이들의 특징으로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으로는 이들 중 대다수가 서얼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사를 통틀어 서얼 출신의 관료가 이처럼 대거 중앙 정치에 진출한 것은 초유의 일로서, 일본 등 외신에서는 이들이 조정 내에서 '소실파(小室派; Bastards's faction)'를 형성하여 기존 세력인 '적실파(嫡室派)'와 대립하고 있고 이들 파벌 간의 대립이 조선 조정 내 개혁 운동의 주요 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대체로 조사시찰단, 영선사, 보빙사 등 해외 사절단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 청, 미국, 러시아 등 외국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서 외국어에 능통한 이들이었으며, 고종의 능력 본위 등용 정책에 힘입어 기용되었기 때문에 국왕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근왕사상(勤王思想)으로 무장한 인물들이었다.

제1차 갑오개혁

제2차 갑오개혁

제3차 갑오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