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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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 世界 大戰, the Great War, World War 1 1914. 7. 28 ~ 1918. 11. 11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 당시에는 World War나 the Great War로 통칭했고 후자는 지금도 유효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붙여진 것. 그 전까진 당연히 유일한 세계대전이어서 1차라는 수식어가 붙지는 않았다. 워낙 끔직하고 충격적이었던 초대규모 전쟁이어 당대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전쟁이 일어날 리 없을 것이라 믿고 Great War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유명한 SF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칭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간의 전쟁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유럽 열강국가간의 외교관계 속에 마침내 전 대륙을 집어삼킨 전쟁. 최초의 총력전(Total War)로 불리기도 하며, 19세기 유럽인들이 빛나게 쌓아올린 화려한 현대문명이 가장 참혹한 살인과 파괴의 수단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증명한 전쟁이다. 그리고 이를 불과 20년만에 더 큰 규모로 반복하게 된다.

전장은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발칸반도와 동유럽 일대가 중심이었으며, 소아시아와 중동 일대가 포함되었다. 독일의 식민지가 있던 동아프리카나 태평양 도서, 중국 산둥성에서도 교전은 발생했으나 그 규모는 미약했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과 그 과정은 개전 1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사학자들의 연구과제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발호와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광기, 독일 민족주의 등의 결합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설명되지만 1차대전은 몇몇 원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너무 많다.

이를 최대한 간략히 하자면 유럽열강간의 갈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 국가간 갈등 외에도 각 국가가 겪고 있는 내재적 문제나 제국주의로 발현된 민족주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vs 프랑스 관계와 러시아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술은 오직 철저하게 프랑스의 고립, 그리고 러시아를 우호국가로 묶어두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된 상태였고, 양국은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며 유럽 최대의 긴장을 낳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3개 제국간의 결속을 강화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고 이는 비스마르크 재임 기간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비스마르크가 사실상 강요된 은퇴를 당하고, 독일의 외교정책에서 러시아가 배제되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익을 중요시하며 3제국간 동맹에서 러시아를 방치, 사실상 내쫓았고 이로 인해 안보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러시아로서는 발칸 반도에서의 팽창정책이 비스마르크의 외교략으로 계속 장애를 겪는 가운데, 그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독일의 새 황제가 대놓고 오스트리아 편을 들면서 발칸에서의 남하 팽창책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고립을 겪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고립을 탈피하고 동시에 독일의 배후에 거대한 동맹국을 두게 되는 이점을 안게 된 것이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제1,2차 모로코 사건 등으로 전면전 직전의 위기에까지 내몰렸으나 어찌어찌 무마되었다.

독일 vs 영국의 세계정책

비스마르크 시기 독일은 영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본격적으로 세계정책을 추진, 3B(Berlin-Byzantium-Baghdad) 정책을 내세우며 유럽과 중동에 걸치는 철도망 부설, 그리고 이를 통한 발칸과 소아시아, 중동에 걸친 독일의 절대적 영향력 확보에 나섰고, 이는 영국의 3C(Cairo-Capetown-Calcutta) 정책을 통한 인도양 패권 정책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틸피츠(Tirpitz)가 주도하고 빌헬름 2세가 적극 후원한 대해군 건설 계획은 전통적인 해군국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해상패권에 대한 직접적이며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독일은 단시간 내에 대규모 해군함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여, 영국의 전통적 해상우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고, 이는 영국에게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맞대응을 유발함으로서 영국, 독일 두 열강이 중심이 된 대규모 건함경쟁을 유발했다.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 양국의 해군은 대규모로 팽창하여 엄청난 규모와 함께 막대한 예산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새로운 최대위협국으로 급부상하자 영국의 외교정책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래 19세기 영국의 외교정책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에 초점을 두어 양국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불리는 충돌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보다 독일의 위협이 더 심각해진데다가, 그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해상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이 실패하자 러시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1907년)하기에 이른다.

발칸의 불씨 :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16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서 절대적인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후반 이후로 계속 약화되면서 그 빈틈을 채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였다. 각각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대표하는 두 제국은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팽창정책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적극적인 보스니아 정책은 슬라브계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과 그 동맹국 러시아를 격분케 했다. 이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민족들이 오스트리아에 상당한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다. 훗날 사라예보 사건의 계기가 된다.

뒤이은 제1, 2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다시 한 번 명백히 보여주었다. 오스만의 공백으로 인한 발칸의 무게추는 점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쏠리게 되었고 지역의 불안정은 점점 심화되어 당대에 이미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지경이었다.

사라예보 사건

그리고 이 모든 내재된 충돌요소들을 폭발시킨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인 결사조직 검은손과 연계한 보스니아인 테러조직 젊은 보스니아에 의해 1914년 6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가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황태자 내외 암살이 보도된 시점에 이미 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간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내외가 백주대낮에 암살된 명백한 테러 행위에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양국간의 전쟁에서 그쳐야 할 것이, 위에서 언급된 유럽 국가간의 갈등관계에 결합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발칸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독일은 러시아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아울러,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그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과 이를 위한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준비했고, 이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던 영국까지 말려들게 했다.

개략

1914년 :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바다로의 행진

1915년 : 장기전

1916년 : 양 전선의 격동, 베르됭 전투와 브로실로프 공세

1917년 : 러시아 혁명과 동부전선의 종식

1918년 :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와 전쟁의 종료

결과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