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박건하

Caeruleum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26일 (금) 20:09 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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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원에 오게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스포츠동아 인터뷰 中

프로필[원본 편집]

  • 이름: 박건하 (朴建夏 / Park Kun-Ha)
  • 생일: 1971년 7월 25일
  • 국적: 대한민국
  • 출신지: 대전광역시
  • 키: 182cm
  • 학력: 대전동중-대전상업고-경희대
  • 커리어: 이랜드 푸마 (1994~1995)-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6)-가시와 레이솔 (임대) (2000)
  • 지도자: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2007~2009) 매탄고 감독 (2009~201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군 코치 (2010) 대한민국 U-23 코치 (2011~201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2013~2016) 서울 이랜드 FC 감독 (2016) 
  • 포지션: 중앙 공격수, 센터백 1
  • 대표팀: 21경기, 5골

소개[원본 편집]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멤버이자 폭풍간지의 세리머니와 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한 선수.

프로 경력[원본 편집]

어린 시절[원본 편집]

대전 출신으로 대전동중학교, 대전상고를 거쳐 경희대를 졸업한 선수이다. 경희대를 졸업한 뒤, 1994년 드래프트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으나 당시 드래프트 제도에 반발,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당시 실업리그 최강 팀이였던 이랜드 푸마에 입단하면서 폭발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다. 1994년 박건하를 앞세운 이랜드는 3개대회를 석권하며 3관왕을 달성했고, 이듬해인 1995년에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춘계실업연맹전, 실업축구선수권을 모두 우승시키며 3개 대회 모두에서 박건하가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랜드에서의 폭발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박건하는, 코리아컵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첫 A매치를 치루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원본 편집]

1996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하게 되면서 프로 진출을 선언, 수원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되었다.

수원에서 뛰게 된 첫 시즌에는 '중고 신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꾸준히 활약, 34경기 출장 14골 6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2001 시즌까지 꾸준히 수원의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은근히 잔부상이 있었으며 수원의 공격수가 그동안 워낙 후덜덜해서2  박건하는 주로 No.3 공격수 정도로 취급받기도 했으나 타 K리그 팀들의 영입 제의가 있어도 꾸준히 수원에 대해 충성심을 바쳐오기도 했다. 2000년에는 가시와에서 수원으로 임대를 간 샤샤를 대신해서 3개월간 가시와로 임대를 갔다오기도 하였으나 수원으로 복귀하여 다시 활약하게 된다.

2002 시즌을 앞두고 당시 수원 수비진의 부실화 및 박건하의 전체적인 공격수로의 폼 저하, 그리고 그의 수비수로서의 재능을 눈여겨 본  김호 감독에 의하여 중앙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였는데 이것이 예상외로 대성공을 거두었다.3  비록 발이 느려졌긴 하지만 공격수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 공격수들의 심리적 특성을 잘 이해하는 박건하의 지능적인 플레이는 당시 수원이 운용하던 포백에서 매성환이나 조병국과 같은 젊은 수비수들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2004년 박건하는 무사와 함께 수비 라인에서 맹활약 팀의 세번째 우승을 일구어 내었지만, 이듬해인 2005년부터 노쇠화 기미를 뚜렷하게 보이며 수원의 10위 추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여담으로 이 때 박주영과 몸싸움을 하다가 코뼈 부상을 당해서 안면 보호용 마스크, 일명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출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2006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등록되며 15경기를 더 뛴 박건하는 2007 시즌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통산 292경기 출장. 수원에서만 올린 기록이기에 의미가 더욱 남다른 것이었다.

지도자 경력[원본 편집]

첼시에서 연수를 받은 후 수원 삼성에서 코치 생활을 하였다. 수원 매탄고(수원 U-18팀) 감독을 거쳐 윤성효 감독 선임 때 같이 수원 코치로 승격하였다.

2011년 1월 4일 서정원 코치가 국대 코치로 옮기게 되어 비어버린 올림픽 대표팀 코치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같은 시기에 수원 매탄고(수원 U-18팀) 코치로 고종수 코치가 영입.

2013년 홍명보호가 출범하면서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되었고, 동아시안컵, 브라질 월드컵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워낙에 결과가 안좋아 선수단이 단체로 욕먹던 와중에도 이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감독 교체 후 사퇴가 유력했다. 이후 슈틸리케호에서도 아시안컵까지 코치로서 남아있게 되었다. 외국인 감독으로서 국내 축구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코치가 필요한 이유였다. 

그리고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이루는 성과를 올리자 그런대로 까방권은 얻게 되었고 이후 김봉수 골키퍼 코치와 함께 계약 연장을 하며 국가대표팀 코치로서 잔류하게 되었다.

긴 시간 대표팀 코치에 역임하던 중, 2016년 6월 15일부로 성적 부진으로 서울 이랜드 FC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마틴 레니의 후임 감독으로 설기현과 함께 급부상하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난 2016년 6월 23일, 공식 기사로 박건하 감독이 부임했다는 것을 알렸고 은퇴 후 처음으로 프로팀 감독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임 이후로 한동안 감독으로서 성장통을 겪는 듯한 모습으로 부진한 서울을 반등시키지 못하면서 초보 감독의 한계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말았다. 가을부터는 팀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로 최오백, 심상민, 김봉래 등의 선수들을 요긴하게 활용하며 조직력을 끌어오리는 등의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2017년 시즌을 구상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2017년 1월 9일로 상호 합의로 서울 감독을 사임한다는 기사와 함께 물러나고 말았다. 후임 감독은 김병수 감독.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박건하가 공격수로 활약하던 시절, 그와 친하게 지내던 외국인 선수들은 친숙한 별칭으로 '찰리 박(Charlie Park)'이라고 불렀다.
  • 득점을 한 이후 옷깃을 세우는 골 세레머니를 통해 주위에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