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미테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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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랑은 1916년에 태어나 레옹 블륌의 인민전선 정부 시절 법학을 공부하고 제2차 대전 때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다.  
미테랑은 1916년에 태어나 레옹 블륌의 인민전선 정부 시절 법학을 공부하고 제2차 대전 때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미테랑은 정치에 입문한 후 드골 정권에서 여러 차례 장관을 역임했고, 1971년 SFIO(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지부)를 사회당(PS: 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했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과의 정책연대를 위해 공동강령에 서명하면서 그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미테랑은 정치에 입문한 후 드골 정권에서 여러 차례 장관을 역임했고, 1971년 SFIO(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지부)를 사회당(PS: 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했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과의 정책연대를 위해 공동강령에 서명하면서 그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1981년 르노 자동차, 에어 프랑스 등 기간산업의 대대적인 국유화를 했는데 자본가와 우파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집권 후 1981년 르노 자동차, 에어 프랑스 등 기간산업의 대대적인 국유화를 했는데 자본가와 우파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ref>이 시기 프랑스는 [[dirigisme]]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ref>
그러나 미테랑은 사회당의 연합세력이던 공산당과 결별하고 자본주의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 결과 좌파지식인들과 급진세력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사회당의 연합세력이던 공산당과 결별하고 자본주의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 결과 좌파지식인들과 급진세력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5주 유급휴가제, 60세 정년퇴직제 실시, 국가보험의 전면적 확대, 사형제 폐지, 그랑 프로제라 일컬어지는 대규모 건축공사 등의 정책을 추진했저.
또 그는 5주 유급휴가제, 60세 정년퇴직제 실시, 국가보험의 전면적 확대, 사형제 폐지, 그랑 프로제라 일컬어지는 대규모 건축공사 등의 정책을 추진했저.

2018년 11월 20일 (화) 08:41 판

틀:지도자 정보

개요

프랑수아 미테랑은 프랑스의 21대 대통령으로 프랑스 대통령들 중 가장 오래 집권했다.

생애

미테랑은 1916년에 태어나 레옹 블륌의 인민전선 정부 시절 법학을 공부하고 제2차 대전 때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미테랑은 정치에 입문한 후 드골 정권에서 여러 차례 장관을 역임했고, 1971년 SFIO(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지부)를 사회당(PS: 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했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과의 정책연대를 위해 공동강령에 서명하면서 그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1981년 르노 자동차, 에어 프랑스 등 기간산업의 대대적인 국유화를 했는데 자본가와 우파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1] 그러나 미테랑은 사회당의 연합세력이던 공산당과 결별하고 자본주의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 결과 좌파지식인들과 급진세력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5주 유급휴가제, 60세 정년퇴직제 실시, 국가보험의 전면적 확대, 사형제 폐지, 그랑 프로제라 일컬어지는 대규모 건축공사 등의 정책을 추진했저. 1991년 독 ·프 통합군 창설 구상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1993년 유럽연합의 발족을 성사시켰다. 1995년 사망했다.

각주

  1. 이 시기 프랑스는 dirigisme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