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푹아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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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 | 월남의 역대 황제
! colspan="5" style= | '''역대 [[응우옌 왕조]]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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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 | '''1대 세조 고황제 완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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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 | '''1대 세조 가륭제 완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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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1" style= | 2대 성조 인황제 완복교
| rowspan="2" style= | 2대 성조 [[명명제]] 완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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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완복영.jpg|섬네일]]
'''응우옌푹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1762년 2월 8일 ~ 1820년 2월 3일)은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재위: 1802년 6월 1일 ~ 1820년 2월 3일)이다. 묘호는 테또(Thế Tổ, 世祖)이며, 연호는 지어롱(Gia Long, 嘉隆). 응우옌 왕조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였으므로 통상 지어롱 제(嘉隆帝)라고 부른다.<ref>베트남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베트남어의 한글 표기법에 의해 작성됨. [https://www.korean.go.kr/front/page/pageView.do?page_id=P000120&mn_id=97]</ref>


[[파일:가륭.jpg|섬네일]]
== 생애 ==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던 응우옌씨 정권 제8대 왕 세종 응우옌푹코앗(Nguyễn Phúc Khoát, 阮福濶)의 손자이자, 왕자 응우옌푹루언(Nguyễn Phúc Luân, 阮福㫻)의 아들로 후에(Huế)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1765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1777년 떠이썬(西山, Tây Sơn)의 난으로 응우옌씨 정권이 멸망하고 수장이었던 사촌 형제들이 처형당하자 15세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이미 가문이 축출되고 일가 친척들 대다수가 몰살당해 응우옌푹아인은 짜끄리 왕조가 다스리던 시암 왕국으로 도주한다.


'''완복영''' (阮福暎, 1762년 2월 8일 ~ 1820년 2월 3일)은 대월의 무신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월남의 초대 황제이자 창건자다. 재위 기간은 1802년 6월 1일 부터 1820년 6월 3일 까지이다.
응우옌푹아인은 시암 왕국에서 [[프랑스]]의 선교사 피에르 피뇨 드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 1741 ~ 1799)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이 친분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의 원조를 얻는 대신 영토할양 및 베트남 일대 상업권 독점이라는 파격적인 특혜를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1789년 시암 왕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규모 외국인 용병부대와 현지 소수민족들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인 군단을 이끌고 떠이썬 왕조와 대규모 전쟁을 별였다. 그리고 떠이썬 왕조의 분열을 틈타 연거푸 승리하며 1802년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한다. 그리고 수도를 후에에 정하고 새롭게 응우옌 왕조를 개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남베트남을 다스리던 무신정권 완주 (阮主) 가문의 땅 광남 (지금의 꽝남성) 에서 태어났으나, 서산당의 난으로 가문의 군주였던 사촌 형제들이 처형당해 15세의 나이로 사촌 형재들을 대신하여 가문의 군주가 됐다. 하지만 서산당 형제들에 의해 가문이 축출되고 일가 친척들 대다수가 몰살당해 본인은 짜끄리 왕조가 다스리던 샴 왕국으로 도주한다.  
황제로 즉위한 후, 떠이썬 왕조의 일족을 잡아들여 피의 숙청을 벌이고, 국호를 다이비엣(Đại Việt, 大越)에서 비엣남(Việt Nam, 越南)으로 바꿨다. 고전적인 [[유교]]와 관료 제도를 복원하고, 자딘(Gia Định, 현재의 [[호치민시]])과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청나라]] 제도를 본따 가륭율례(嘉隆律例)를 편찬했다. 지어롱 제는 건국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ref>《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上)》, 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p. 335~337 위키백과의 서술을 재인용.</ref>


샴 왕국에서 프랑스 선교사 피뇨 드 베엔느와의 친분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고, 영토할양 및 베트남 일대 상업권 독점(...) 이라는 불평등 조약 아래 프랑스에서 파병보낸 군대와 샴 왕국에서 파병보낸 군대를 비롯한 대규모 외국인 용병부대와 현지 소수민족들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인 군단을 이끌고 서산당 형제와의 오랜 대규모 전쟁을 별여 승리하고 베트남 전역을 통일한다.
{{각주}}


베트남을 통일한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남베트남의 수도 가정 (嘉定, 오늘날의 호찌민시)과 북베트남의 수도 승륭 (昇龍, 오늘날의 하노이)을 통일했다는 뜻에서 이 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연호를 지으니, 바로 가륭 (嘉隆)이다.
[[분류:베트남의 군주]]
 
황제로 즉위한 후, 서산당의 일가 친척들을 잡아들여 피의 숙청을 벌이고, 수도를 베트남 중부의 화 (化, 오늘날의 후에)로 천도했으며, 국호를 대월에서 월남으로 바꿨다. 내치적으로는 고전적인 유교 제도와 공무원 제도를 복원하고, 가정과 승륭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청나라식 제도를 베껴서 대표적인 업적인 황월율례 (皇越律例)를 편찬했다.

2023년 8월 26일 (토) 11:13 기준 최신판

역대 응우옌 왕조 황제
월남 건국 1대 세조 가륭제 완복영 2대 성조 명명제 완복교
완복영.jpg

응우옌푹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1762년 2월 8일 ~ 1820년 2월 3일)은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재위: 1802년 6월 1일 ~ 1820년 2월 3일)이다. 묘호는 테또(Thế Tổ, 世祖)이며, 연호는 지어롱(Gia Long, 嘉隆). 응우옌 왕조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였으므로 통상 지어롱 제(嘉隆帝)라고 부른다.[1]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던 응우옌씨 정권 제8대 왕 세종 응우옌푹코앗(Nguyễn Phúc Khoát, 阮福濶)의 손자이자, 왕자 응우옌푹루언(Nguyễn Phúc Luân, 阮福㫻)의 아들로 후에(Huế)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1765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1777년 떠이썬(西山, Tây Sơn)의 난으로 응우옌씨 정권이 멸망하고 수장이었던 사촌 형제들이 처형당하자 15세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이미 가문이 축출되고 일가 친척들 대다수가 몰살당해 응우옌푹아인은 짜끄리 왕조가 다스리던 시암 왕국으로 도주한다.

응우옌푹아인은 시암 왕국에서 프랑스의 선교사 피에르 피뇨 드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 1741 ~ 1799)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이 친분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의 원조를 얻는 대신 영토할양 및 베트남 일대 상업권 독점이라는 파격적인 특혜를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1789년 시암 왕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규모 외국인 용병부대와 현지 소수민족들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인 군단을 이끌고 떠이썬 왕조와 대규모 전쟁을 별였다. 그리고 떠이썬 왕조의 분열을 틈타 연거푸 승리하며 1802년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한다. 그리고 수도를 후에에 정하고 새롭게 응우옌 왕조를 개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로 즉위한 후, 떠이썬 왕조의 일족을 잡아들여 피의 숙청을 벌이고, 국호를 다이비엣(Đại Việt, 大越)에서 비엣남(Việt Nam, 越南)으로 바꿨다. 고전적인 유교와 관료 제도를 복원하고, 자딘(Gia Định, 현재의 호치민시)과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청나라 제도를 본따 가륭율례(嘉隆律例)를 편찬했다. 지어롱 제는 건국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

각주

  1. 베트남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베트남어의 한글 표기법에 의해 작성됨. [1]
  2.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上)》, 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p. 335~337 위키백과의 서술을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