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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金文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생애 ==
1883년 12월 4일 평안남도 용강군 동면 구룡리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익진(金翼軫)이다. 그는 의암 [[유인석]]으로부터 '석계'라는 호를 받았으며, 1907년경 해주 신천, 평산 등지에서 신경칠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고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좌견부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1883년 12월 4일 평안남도 용강군 동면 구룡리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익진(金翼軫)이다. 그는 의암 [[유인석]]으로부터 '석계'라는 호를 받았으며, 1907년경 해주 신천, 평산 등지에서 신경칠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고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좌견부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2021년 10월 6일 (수) 12:04 판

金文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1883년 12월 4일 평안남도 용강군 동면 구룡리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익진(金翼軫)이다. 그는 의암 유인석으로부터 '석계'라는 호를 받았으며, 1907년경 해주 신천, 평산 등지에서 신경칠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고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좌견부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이후 평양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은사로 유형 15년, 다시 금고 10년으로 감형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일병합 직후 은사령으로 석방되었으나, 감옥에 있을 때 스스로 혀를 끊었기 때문에 평생 말더듬이로 살았다. 8.15 광복 후 서울로 월남하였고, 1957년 1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문빈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