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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평민당'''. |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평민당'''. | ||
== | == 창당배경 == | ||
[[6월 항쟁]]과 이로 인한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고 [[1987년#12월|198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예고되면서,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목적으로 총결집했던 야권 세력에 분열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야권은 [[통일민주당]]으로 결집한 상태였는데,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에 했던, '''직선제가 이뤄진다면 | [[6월 항쟁]]과 이로 인한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고 [[1987년#12월|198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예고되면서,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목적으로 총결집했던 야권 세력에 분열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야권은 [[통일민주당]]으로 결집한 상태였는데,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에 했던, '''직선제가 이뤄진다면 대선에 불출마하겠다'''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파기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여 이 분열에 불을 지폈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수없이 접촉했으나 끝내 둘 다 대통령의 꿈을 포기 못했고, 이에 동교동계가 집단 탈당하고 [[11월 12일]] 창당하며 김대중을 당 총재 및 후보로 추대했다. 이는 한화갑이 제창한 '''사자필승론'''<ref>[[민주정의당]] [[노태우]]가 TK를, 통일민주당 김영삼이 PK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충청도를, 그리고 평화민주당 김대중이 호남을 각각 차지한다면 최종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우세한 김대중이 필승한다는 논리. 그러나 충청의 결집력은 약했고, 노태우가 PK에서 비교적 선전하고 경기/인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호남/충청/TK/PK의 결집력을 동일하게 보고, 경기도 지역에서 우세할 것이라 오판한 전략이었다.</ref>에 기인한 바가 컸다. | ||
== 역사 == | == 역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