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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평화민주당을 향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 및 민주정의당 총재는 전격적으로 양당의 합당을 은밀히 제안했다. 이는 13대 총선서 125석밖에 획득하지 못한 민주정의당<ref>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당시 선거법상 지역구 의석이 가장 많은 정당이 득표율 다 무시하고 전국구 의석 절반을 배분받게끔 되어 있어서 그나마 이정도라도 확보한 거다. 만약 득표율 기준으로 배분했다면 약 10여 석 정도는 빠졌을 거다.</ref>이 안정적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평화민주당과 김대중은 호남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인 민주정의당측과 전격적으로 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합당제의를 거부한다. | 그런 평화민주당을 향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 및 민주정의당 총재는 전격적으로 양당의 합당을 은밀히 제안했다. 이는 13대 총선서 125석밖에 획득하지 못한 민주정의당<ref>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당시 선거법상 지역구 의석이 가장 많은 정당이 득표율 다 무시하고 전국구 의석 절반을 배분받게끔 되어 있어서 그나마 이정도라도 확보한 거다. 만약 득표율 기준으로 배분했다면 약 10여 석 정도는 빠졌을 거다.</ref>이 안정적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평화민주당과 김대중은 호남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인 민주정의당측과 전격적으로 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합당제의를 거부한다. | ||
그러자 노태우는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접촉, [[1990년]] 초 사상 초유의 3당합당을 결행했다. 이로서 평화민주당은 의석수 변화가 없음에도 단번에 소수야당으로 전락해 버렸다. | 그러자 노태우는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접촉, [[1990년]] 초 사상 초유의 3당합당을 결행했다. 이로서 평화민주당은 의석수 변화가 없음에도 단번에 소수야당으로 전락해 버렸다. | ||
이후 평화민주당은 재야세력, 시민사회단체 등을 규합하여 이에 대항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으로 바꾼다.<ref>[[1985년]] 창당되어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처럼 약칭으로 '''신민당'''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다.</ref> 하지만 [[1991년]] 부활한 지방의회 선거에서 88년 총선에서 승리한 서울에서조차 겨우 광역의원 21석을 차지하는 등 총 165명의 당선자<ref>서울 21명, 인천 1명, 경기 3명, 대전 2명, 광주 19명, 전남 67명, 전북 51명, 경남 1명</ref>를 내는데 그치며 564명을 당선시킨 민주자유당에 대참패하고 만다. | 이후 평화민주당은 재야세력, 시민사회단체 등을 규합하여 이에 대항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으로 바꾼다.<ref>[[1985년]] 창당되어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처럼 약칭으로 '''신민당'''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다.</ref> 하지만 [[1991년]] 부활한 지방의회 선거에서 88년 총선에서 승리한 서울에서조차 겨우 광역의원 21석을 차지하는 등 총 165명의 당선자<ref>서울 21명, 인천 1명, 경기 3명, 대전 2명, 광주 19명, 전남 67명, 전북 51명, 경남 1명</ref>를 내는데 그치며 564명을 당선시킨 민주자유당에 대참패하고 만다. | ||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신민주연합당은 통일민주당 탈당파인 꼬마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 ( |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신민주연합당은 통일민주당 탈당파인 꼬마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 (1991)]]으로 재탄생한다. | ||
== 기타 == | == 기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