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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땅따먹기 살육전으로 인해 [[1979년]]에는 갱 관련 살인사건이 32건에서 70건으로 늘어나버렸다. 젊은 단원들의 영입은 계속 멈출 기미를 보이질 않았고, 그들과 같이 뛰놀며 자라온 이웃들까지 줄줄이 크립스에 가입하여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조직원들은 '일'이라고 불리는 범죄 행위로 존경심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뺏으며 나와바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크립스에 가입한 모두가 '일'에 미쳐가는 동안 워싱턴의 부재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그가 없는 동안 45개의 크립스 파벌이 탄생했고, 이제는 총구를 블러즈 조직원에서 자기네들이랑 다른 크립스 파벌의 조직원에게 겨누게 되었다. 이제 크립스라는 이름은 하나의 조직명이 아닌 갱단에서 각자 자기네 조직을 자랑하기 위해 쓰일뿐인 명칭으로 전락하였다. 이듬해 지도자인 스탠리 윌리엄스가 살인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 이들의 땅따먹기 살육전으로 인해 [[1979년]]에는 갱 관련 살인사건이 32건에서 70건으로 늘어나버렸다. 젊은 단원들의 영입은 계속 멈출 기미를 보이질 않았고, 그들과 같이 뛰놀며 자라온 이웃들까지 줄줄이 크립스에 가입하여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조직원들은 '일'이라고 불리는 범죄 행위로 존경심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뺏으며 나와바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크립스에 가입한 모두가 '일'에 미쳐가는 동안 워싱턴의 부재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그가 없는 동안 45개의 크립스 파벌이 탄생했고, 이제는 총구를 블러즈 조직원에서 자기네들이랑 다른 크립스 파벌의 조직원에게 겨누게 되었다. 이제 크립스라는 이름은 하나의 조직명이 아닌 갱단에서 각자 자기네 조직을 자랑하기 위해 쓰일뿐인 명칭으로 전락하였다. 이듬해 지도자인 스탠리 윌리엄스가 살인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 ||
이런 내부 분열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 이런 내부 분열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것에는 워싱턴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9년]] [[8월 9일]] 오후 10시, 레이먼드 워싱턴은 산 페드로 거리에서 돌아다니다가 차량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크립스 조직원에게 직사거리에서 샷건으로 복부를 명중당하여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ref>워싱턴을 죽인 범인은 검거되지 못했다고 한다.</ref> 결국 분열 위기의 조짐을 보이던 크립스 연맹은 머리를 잃은 뒤 그날로 완전히 콩가루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크립스라는 이름 하에 지저분한 내전이 오고갔다. 이들의 새로운 지도자 자리는 워싱턴의 죽마고우이자 크립스의 또다른 설립자 스탠리 윌리엄스가 차지하였다. | ||
서부 지방 크립스 파벌인 롤린 60 네이버후드 크립스와 에이트 트레이 갱스터 크립스의 파티에서의 한 여자로 인한 불화를 시작으로 내분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10대 중반의 청소년 크립스 단원들은 서로에게 차량 사격등의 공격을 가하였고, 그에 따라 청소년 교도소 수감자들도 늘었다. [[1980년]]에는 로스엔젤레스 군에서만 350건의 타살 건이 보고되었다. 2년 뒤의 로스엔젤레스 군에서는 155명의 흑인 갱스터들이 집계되었고, 그들만의 내전은 여전하였다. | 서부 지방 크립스 파벌인 롤린 60 네이버후드 크립스와 에이트 트레이 갱스터 크립스의 파티에서의 한 여자로 인한 불화를 시작으로 내분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10대 중반의 청소년 크립스 단원들은 서로에게 차량 사격등의 공격을 가하였고, 그에 따라 청소년 교도소 수감자들도 늘었다. [[1980년]]에는 로스엔젤레스 군에서만 350건의 타살 건이 보고되었다. 2년 뒤의 로스엔젤레스 군에서는 155명의 흑인 갱스터들이 집계되었고, 그들만의 내전은 여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