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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가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공채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국장의 임무를 맡았다. 1920년 8월 임시정부 특파웡이자 경상북도 교통사무국 책임자로서 국내에 파견된 이형수와 함께 최급경고문, 일본물품 불매고지서, 포고문,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안정서, 자유지 등을 입안, 작성, 복사하여 대구, 달성, 고령 일대의 동지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 증권을 직접 유지들에게 전달했다. | 이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가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공채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국장의 임무를 맡았다. 1920년 8월 임시정부 특파웡이자 경상북도 교통사무국 책임자로서 국내에 파견된 이형수와 함께 최급경고문, 일본물품 불매고지서, 포고문,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안정서, 자유지 등을 입안, 작성, 복사하여 대구, 달성, 고령 일대의 동지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 증권을 직접 유지들에게 전달했다. | ||
한편, 워싱턴국제회의에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는 한인들의 열망을 담은 독립지원요청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구에 있는 미국인 부혜리 선교사, 경성의 카우만 선교사, 허인수 선교사 등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 한편, 워싱턴국제회의에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는 한인들의 열망을 담은 독립지원요청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구에 있는 미국인 부혜리 선교사, 경성의 카우만 선교사, 허인수 선교사 등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동디인 김달문, 김은수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이 탄로났고, 이상철응 수사를 피해 피신 생활을 했다. | ||
이후 외삼촌인 최두형을 통해 카우만 선교사와 재회했고, 카우만 선교사의 알선을 통해 최두형의 이름으로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 편입학했다. 1922년 제11회로 졸업했고, 성서학원 학감으로 시무하다 1923년 기관지 '활천' 창간에 관여했으며, 1926년 성서학원 대강당구령회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 이후 외삼촌인 최두형을 통해 카우만 선교사와 재회했고, 카우만 선교사의 알선을 통해 최두형의 이름으로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 편입학했다. 1922년 제11회로 졸업했고, 성서학원 학감으로 시무하다 1923년 기관지 '활천' 창간에 관여했으며, 1926년 성서학원 대강당구령회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