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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형사 기록부에 따르면, 이병철은 1899년생이며, 본적지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만월정이고, 주소지는 충청북도 충주군 양성면 영죽리라고 한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중앙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그해 4월 자신의 처 경하순을 비롯하여 김원경, 최숙자 등 기독교 계통 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지도하여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3.1 운동이 흐지부지되자 활동을 중단했다. | 일제 형사 기록부에 따르면, 이병철은 1899년생이며, 본적지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만월정이고, 주소지는 충청북도 충주군 양성면 영죽리라고 한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중앙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그해 4월 자신의 처 경하순을 비롯하여 김원경, 최숙자 등 기독교 계통 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지도하여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3.1 운동이 흐지부지되자 활동을 중단했다. | ||
그러던 1919년 5월 초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조용주, [[연병호]] 등과 뜻을 모아 외교 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하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였고, 총무를 맡았다. 그는 외교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 대부분을 조달하여 재정 지원에 힘을 보탰다. 그해 6월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김마리아]], [[황애시덕]]이 여성을 끌어모아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활성화시키자 이에 가담하였고, [[이정숙 (1896년)|이정숙]] 등이 주도하던 | 그러던 1919년 5월 초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조용주, [[연병호]] 등과 뜻을 모아 외교 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하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였고, 총무를 맡았다. 그는 외교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 대부분을 조달하여 재정 지원에 힘을 보탰다. 그해 6월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김마리아]], [[황애시덕]]이 여성을 끌어모아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활성화시키자 이에 가담하였고, [[이정숙 (1896년)|이정숙]] 등이 주도하던 혈성단애국부인회]]와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 ||
1919년 8월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애국금수합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9월 이종욱과 함께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의 국내 지부로서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를 설치하여 간사를 맡았고, 앞서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연계하였다. 그해 10월 초 청년외교단을 확대 개편하여 명칭을 배달청년당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 1919년 8월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애국금수합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9월 이종욱과 함께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의 국내 지부로서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를 설치하여 간사를 맡았고, 앞서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연계하였다. 그해 10월 초 청년외교단을 확대 개편하여 명칭을 배달청년당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