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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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감부가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뒤 감시 및 미행을 가한데다 친일단체 [[일진회]]가 방해하는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빛었다. 여기에 고종이 서전서숙을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에게 헤이그 특사에 가담할 것을 지시했고, 이상설은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서전서숙의 운영자금을 끌어써야 했다. 그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빚다가 건립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이에 이동녕은 여준, 황공달 등과 함께 변장을 한 채 국내로 귀국했다.
그러나 통감부가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뒤 감시 및 미행을 가한데다 친일단체 [[일진회]]가 방해하는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빛었다. 여기에 고종이 서전서숙을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에게 헤이그 특사에 가담할 것을 지시했고, 이상설은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서전서숙의 운영자금을 끌어써야 했다. 그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빚다가 건립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이에 이동녕은 여준, 황공달 등과 함께 변장을 한 채 국내로 귀국했다.


1907년 초 [[안창호]],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 문제를 협의한 뒤 [[이동휘 (1873년)|이동휘]], [[이갑]], [[유동열]], [[김구]], [[전덕기]]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신민회는 비밀결사여서 회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원 상호간의 접촉이나 사업 추진은 금하였다. 연락을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YMCA출입사진사가 담당하였다고 하며 1910년 전후에는 전후에는 비밀회원수가 대략 8백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1907년 초 [[안창호]],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 문제를 협의한 뒤 [[이동휘]], [[이갑]], [[유동열]], [[김구]], [[전덕기]]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신민회는 비밀결사여서 회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원 상호간의 접촉이나 사업 추진은 금하였다. 연락을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YMCA출입사진사가 담당하였다고 하며 1910년 전후에는 전후에는 비밀회원수가 대략 8백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공식 대표는 양기탁이었고, 총무에는 이동녕, 재무에는 전덕기, 조직 선전에는 안창호가 맡았다. 이동녕은 신민회가 설립한 오산학교 등 학교와 학회를 후원해 청년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전국의 애국계몽강연에 나서 애국주의, 민권의식 고취, 공화의식의 제고, 새로운 사조, 지식산업의 실시, 안습타파, 교육입국의 필요성, 민력의 양성 활용방안, 실력육성의 비결 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강연했다.
신민회의 공식 대표는 양기탁이었고, 총무에는 이동녕, 재무에는 전덕기, 조직 선전에는 안창호가 맡았다. 이동녕은 신민회가 설립한 오산학교 등 학교와 학회를 후원해 청년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전국의 애국계몽강연에 나서 애국주의, 민권의식 고취, 공화의식의 제고, 새로운 사조, 지식산업의 실시, 안습타파, 교육입국의 필요성, 민력의 양성 활용방안, 실력육성의 비결 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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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서전서숙 등의 경험을 토대 교육기관의 설치를 구상하였다. 젊은 역군을 양성하는 것이 곧 민족의 광복을 앞당기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윽고 빈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개교시켰다. 경학사의 사장은 [[이철영]]을 추대했고, 운영은 이동녕 본인과 이광, 김달, [[윤기섭]], 김창환, 이관직, 이갑수, 장도순, 이규룡 등이 맡았다. 그리고 신흥강습소의 교사로는 [[박찬익]] 등이 한국의 말과 역사, 지리, 풍속, 제도 등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서전서숙 등의 경험을 토대 교육기관의 설치를 구상하였다. 젊은 역군을 양성하는 것이 곧 민족의 광복을 앞당기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윽고 빈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개교시켰다. 경학사의 사장은 [[이철영]]을 추대했고, 운영은 이동녕 본인과 이광, 김달, [[윤기섭]], 김창환, 이관직, 이갑수, 장도순, 이규룡 등이 맡았다. 그리고 신흥강습소의 교사로는 [[박찬익]] 등이 한국의 말과 역사, 지리, 풍속, 제도 등을 가르쳤다.


신흥강습소 교육 과정은 본과와 특별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자는 중학과정이며 후자는 사관양성의 속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양성된 인재는 8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첫 번째 특기생으로 배출된 애국청년들은 김련, 이규봉, 변영태, 성주식 등으로 이들은 초대소장인 석오로부터 초급장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원보에서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고, 이동녕은 사관생도였던 맏아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신흥강습소 교육 과정은 본과와 특별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전자는 중학과정이며 후자는 사관양성의 속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양성된 인재는 8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첫 번째 특기생으로 배출된 애국청년들은 김련, 이규봉, 변영태, 성주식 등으로 이들은 초대소장인 석오로부터 초급장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원보에서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고, 이동녕은 사관생도였던 맏아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부민단이 새롭게 조직되었다. 소재지는 통화현의 합니하로 옮겨졌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로운 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3년,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되었고 교장에는 [[여준]]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신흥강습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신흥학우단도 조직되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부민단이 새롭게 조직되었다. 소재지는 통화현의 합니하로 옮겨졌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로운 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3년,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되었고 교장에는 [[여준]]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신흥강습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신흥학우단도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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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13년 봄, 수원에 거주한다는 맹보순이라는 인물로부터 일제 경찰이 이동녕을 비롯해 [[이회영]], [[이시영 (1869년)|이시영]], 장도순, 김형선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이동녕은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그 행선지를 [[이상설]]이 살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정하였다.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나면서 부인과 자식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던 1913년 봄, 수원에 거주한다는 맹보순이라는 인물로부터 일제 경찰이 이동녕을 비롯해 [[이회영]], [[이시영 (1869년)|이시영]], 장도순, 김형선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이동녕은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그 행선지를 [[이상설]]이 살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정하였다.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나면서 부인과 자식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191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동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고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이동녕을 찾아왔다.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백순, 권대동, [[이동휘 (1873년)|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를 봤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191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동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고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이동녕을 찾아왔다.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백순, 권대동,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를 봤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조직이라며 이동녕을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게 하기도 했다. .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재러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을 통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 (1862년)|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 배포하였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조직이라며 이동녕을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게 하기도 했다. .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재러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을 통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 배포하였다.


이처럼 <해조신문>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선양하고 구국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대종교에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이처럼 <해조신문>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선양하고 구국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대종교에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1918년 12월, 이동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명을 받아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교헌 교주를 필두로 [[조소앙]], 구덕상, 김천식, 민충식, 백순, 안기선, 윤일병, [[조완구]], 이종일, 이승복, 이만복, [[이규풍]] 등과 협의한 뒤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날인했다.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는 이동녕을 비롯하여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신규식]], [[정재관]], [[여준]], [[이범윤]], [[박은식]], [[박찬익]], [[이시영 (1869년)|이시영]], [[이상룡]], [[윤세복]], [[문창범]], [[신채호]], [[허겸]], [[이세영]], [[유동열]], [[이광]], [[안정근]], [[김좌진]], [[김학만]], [[이대위 (1878년)|이대위]], [[손일민]], [[최병학]], [[박용만]], [[임방]], [[김규식 (1882년)|김규식]], [[이승만]], [[조성환 (1875년)|조성환]], [[김약연]], [[이종탁]], [[이동휘 (1873년)|이동휘]], [[한흥]], [[이탁 (1889년)|이탁]], [[황상규]], [[이봉우]], [[박성태]], [[안창호]] 등 39명이었다.
1918년 12월, 이동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명을 받아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교헌 교주를 필두로 [[조소앙]], 구덕상, 김천식, 민충식, 백순, 안기선, 윤일병, [[조완구]], 이종일, 이승복, 이만복, [[이규풍]] 등과 협의한 뒤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날인했다.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는 이동녕을 비롯하여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신규식]], [[정재관]], [[여준]], [[이범윤]], [[박은식]], [[박찬익]], [[이시영 (1869년)|이시영]], [[이상룡]], [[윤세복]], [[문창범]], [[신채호]], [[허혁]], [[이세영]], [[유동열]], [[이광]], [[안정근]], [[김좌진]], [[김학만]], [[이대위]], [[손일민]], [[최병학]], [[박용만]], [[임방]], [[김규식 (1882년)|김규식]], [[이승만]], [[조성환]], [[김약연]], [[이종탁]], [[이동휘]], [[한흥]], [[이탁 (1889년)|이탁]], [[황상규]], [[이봉우]], [[박성태]], [[안창호]] 등 39명이었다.


동삼성 길림성에서 제작,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가 거의 다 망라되었고, 이 시기에는 가장 앞섰던 독립선언서였다. 이후 이동녕은 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을 면담하고 돌아오던 여운형을 만났다. 그는 여운형과 국제정세 및 이에 대처하는 한인의 입장을 교환하면서 이러한 시기일수록 민간지도자가 나서서 우리도 민주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운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민주공화정을 전제로 한 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동삼성 길림성에서 제작,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가 거의 다 망라되었고, 이 시기에는 가장 앞섰던 독립선언서였다. 이후 이동녕은 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을 면담하고 돌아오던 여운형을 만났다. 그는 여운형과 국제정세 및 이에 대처하는 한인의 입장을 교환하면서 이러한 시기일수록 민간지도자가 나서서 우리도 민주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운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민주공화정을 전제로 한 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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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동녕은 동지들과 함께 연락사무소를 프랑스조계내 보창로 329번지에 정하고 구체적인 문안작성에 착수했다. 이때 이동녕은 먼저 입법기관인 의회를 구성해 헌법, 헌장, 서고문, 강령, 정강 등을 정하고 나서 정부의 부서 각료를 내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국내 8도 국민대표와 노령, 미주 중국 등지까지의 국민대표를 모두 망라하여 구성된 임시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이후 이동녕은 동지들과 함께 연락사무소를 프랑스조계내 보창로 329번지에 정하고 구체적인 문안작성에 착수했다. 이때 이동녕은 먼저 입법기관인 의회를 구성해 헌법, 헌장, 서고문, 강령, 정강 등을 정하고 나서 정부의 부서 각료를 내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국내 8도 국민대표와 노령, 미주 중국 등지까지의 국민대표를 모두 망라하여 구성된 임시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정부조직을 위한 임시사무소에는 [[현순]]이 총무로 있었는데, 그는 조직을 위한 선언서를 각국에 발송하였고, 4월 8일에는 한성 임시정부로부터 각료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을 가져옴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진행시켜 나갔다. 다음날 손정도 등의 제의로 각 지방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의정원 의원 29명을 선출하였다. 그 명단은 이동녕을 비롯하여 [[현순]], [[손정도]], [[이광수]], [[최근우]], [[신익희]], [[조성환 (1875년)|조성환]], [[이회영]], [[이시영 (1869년)|이시영]], [[조소앙]], [[이광]], [[남형우]], [[조완구]], [[신채호]], [[김철 (1886년)|김철]], [[선우혁]], [[김동삼]], [[백남칠]], [[한진교]], [[진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호 (1892년)|조동호]], [[현창운]], [[김대지]] 등이었다.
정부조직을 위한 임시사무소에는 [[현순]]이 총무로 있었는데, 그는 조직을 위한 선언서를 각국에 발송하였고, 4월 8일에는 한성 임시정부로부터 각료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을 가져옴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진행시켜 나갔다. 다음날 손정도 등의 제의로 각 지방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의정원 의원 29명을 선출하였다. 그 명단은 이동녕을 비롯하여 [[현순]], [[손정도]], [[이광수]], [[최근우]], [[신익희]], [[조성환 (1875년)|조성환]], [[이회영]], [[이시영 (1869년)|이시영]], [[조소앙]], [[이광]], [[남형우]], [[조완구]], [[신채호]], [[김철 (1886년)|김철]], [[선우혁]], [[김동삼]], [[백남칠]], [[한진교]], [[진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호]], [[현창운]], [[김대지]] 등이었다.


1919년 4월 10일 프랑스조계내 김신부로 22호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어 이튿날 오전까지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의장 등을 선출하였다. 논의 끝에 이동녕이 의장에 선출되었고, 손정도가 부의장에,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된 이동녕은 동지들과 협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또한 관제를 의결한 뒤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으로 선포하고 선서문과 정강을 통과시킨 뒤 각료를 선임하여 국무원을 조직했다. 이리하여 1919년 4월 13일, 이동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내외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내각은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 10일 프랑스조계내 김신부로 22호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어 이튿날 오전까지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의장 등을 선출하였다. 논의 끝에 이동녕이 의장에 선출되었고, 손정도가 부의장에,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된 이동녕은 동지들과 협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또한 관제를 의결한 뒤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으로 선포하고 선서문과 정강을 통과시킨 뒤 각료를 선임하여 국무원을 조직했다. 이리하여 1919년 4월 13일, 이동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내외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내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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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부총장 [[이시영 (1869년)|이시영]]
* 법무부총장 [[이시영 (1869년)|이시영]]
* 재무부총장 [[최재형]]
* 재무부총장 [[최재형]]
* 군무부총장 [[이동휘 (1873년)|이동휘]]
* 군무부총장 [[이동휘]]
* 교통부총장 [[문창범]]
* 교통부총장 [[문창범]]
* 국무원비서장 [[조소앙]]
* 국무원비서장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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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이승만]]
* 대통령 [[이승만]]
* 국무총리 [[이동휘 (1873년)|이동휘]]
* 국무총리 [[이동휘]]
* 내무총장 이동녕
* 내무총장 이동녕
* 재무총장 [[이시영 (1869년)|이시영]]
* 재무총장 [[이시영 (1869년)|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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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2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여 약 6개월간 머물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러시아로 떠나 버렸고, [[김립 피살 사건]]의 여파로 좌익 세력이 임시정부를 대거 이탈해버렸다. 더욱이 이승만이 미주지역으로부터 보내는 군자금을 전액 송달하지 않고 있는 등 독단적인 일처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분란이 일어났다. 결국 1925년 이승만은 강대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 등의 문제까지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다.
1921년 12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여 약 6개월간 머물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러시아로 떠나 버렸고, [[김립 피살 사건]]의 여파로 좌익 세력이 임시정부를 대거 이탈해버렸다. 더욱이 이승만이 미주지역으로부터 보내는 군자금을 전액 송달하지 않고 있는 등 독단적인 일처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분란이 일어났다. 결국 1925년 이승만은 강대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 등의 문제까지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다.


이 시기 이동녕은 이동휘의 후임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내무총장을 맡았다. 또한 이승만이 도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뒤 사실상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 마저 사퇴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이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족 최고 기구를 창조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개조파 인사로는 안창호, 여운형, [[김마리아 (1891년)|김마리아]] 등이 있었고, 창조파 인사로는 [[신채호]], 박은식, [[신숙 (1885년)|신숙]], 김규식 등이 있었다.
이 시기 이동녕은 이동휘의 후임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내무총장을 맡았다. 또한 이승만이 도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뒤 사실상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 마저 사퇴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이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족 최고 기구를 창조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개조파 인사로는 안창호, 여운형, [[김마리아 (1891년)|김마리아]] 등이 있었고, 창조파 인사로는 [[신채호]], 박은식, [[신숙]], 김규식 등이 있었다.


결국 1921년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이 개시되었고, 1923년 1월 120여 지역과 단체에서 120여명의 대표 인사가 상해에 집합하여 약 5개월간 60여회의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성과없이 결렬되었고, 수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렸다. 이동녕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이시영, 조소앙, [[차이석]], [[홍진]], [[노백린]], [[도인권]], 이유필, [[김홍서]], 현순, [[윤기섭]] 등 5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결국 1921년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이 개시되었고, 1923년 1월 120여 지역과 단체에서 120여명의 대표 인사가 상해에 집합하여 약 5개월간 60여회의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성과없이 결렬되었고, 수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렸다. 이동녕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이시영, 조소앙, [[차이석]], [[홍진]], [[노백린]], [[도인권]], 이유필, [[김홍서]], 현순, [[윤기섭]] 등 5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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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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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천안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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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69년 출생]]
[[분류:1940년 사망]]
[[분류:대한독립선언서 연서자 3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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