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1894년)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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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1889년)|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
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1889년)|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


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김종진 (1901년)|김종진]]과 만나 김좌진과의 연대 문제를 협의했고, 난징에서 온 이을규와 합세해 3월 하순에 중동선 해림역으로 향했다. 해림소학교에서 있었던 환영회 이후, 김좌진, 유림, 김종진, 이을규 등은 여러 날에 걸쳐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문제와 현지 사정에 따른 당면 과제를 토론했다.
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김종진과 만나 김좌진과의 연대 문제를 협의했고, 난징에서 온 이을규와 합세해 3월 하순에 중동선 해림역으로 향했다. 해림소학교에서 있었던 환영회 이후, 김좌진, 유림, 김종진, 이을규 등은 여러 날에 걸쳐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문제와 현지 사정에 따른 당면 과제를 토론했다.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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