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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1889년)|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 | 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1889년)|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 | ||
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 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김종진과 만나 김좌진과의 연대 문제를 협의했고, 난징에서 온 이을규와 합세해 3월 하순에 중동선 해림역으로 향했다. 해림소학교에서 있었던 환영회 이후, 김좌진, 유림, 김종진, 이을규 등은 여러 날에 걸쳐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문제와 현지 사정에 따른 당면 과제를 토론했다. | ||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