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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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林. 본명은 유화영(柳華永), 자는 화영(華永), 원중(元仲), 호는 월파(越坡, 月波, 月坡), 단주(旦洲). 이명은 고상진(高尙眞), 고삼현(高三賢), 고자성(高自性), 김영진(金永鎭), 하성기(河性基) 등 여러 개를 사용했다.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정치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림은 1894년 5월 23일 경상북도 안동부 임북면 계곡리에서 부친 유이흠(柳李欽)과 모친 김진과(金鎭科)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유림의 친가와 외가는 안동의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자 지주로, 그는 5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9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다. 뒤이어 서당에서 수학한 뒤 경북 최초의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 재학했다. 또한 13살 때인 1906년에 고성 이씨와 혼인했다.

유림은 협동학교에서 국어, 역사, 대수, 생물, 화학, 창가, 체조, 세계지리 등 17개 과목을 익혔다. 아울러 신민회 계열 인사인 이관직(李觀稙), 김기수(金基洙), 안상덕 등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민족의식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유학의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협동학교를 수학하면서 현실문제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애국계몽 및 구국항쟁의 의지를 갖출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1910년 협동학교 수학 중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군애국(忠君愛國)' 네 글자를 손가락에 베어 새기며 나라를 되찾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1]

그러던 1910년 7월 18일, 안동, 예천 영주 지역의 의병 15명이 협동학교에 난입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화(李鐘華)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협동학교 관계자들과 학생들의 수학 의지는 꺾이지 않아 1911년 3월 30일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에 협동학교 교사 및 학생들이 가담한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유림이 협동학교를 졸업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911년 3월 30일 1회로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협동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대구에서 정진탁(鄭振鐸) 등과 함께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또한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여러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다 다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모은 그는 1918년 대규모의 암살, 파괴를 도모했다. 구체적인 암살 파괴 계획의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5년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조직하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유림은 독립선언 선포에 협력했고 협동학교 출신인 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안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가서 이상룡, 김동삼 등과 협의해 독립군 양성 문제를 논의한 뒤 군정서 특파원의 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했다가 봉천에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한편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화영(유림)이 대정 8년(1919년) '제령 위반' 죄로 도주하여 중국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는 유림이 3.1 운동에 관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또한 유원식의 <나의 아버지 유림>에 따르면, 유림은 3.1 운동 직후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요중현에 정착했다가 한꺼번에 땅을 전부 매각 처분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만든 후 어느 날 홀로 머나먼 길을 훌쩍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유림은 3.1 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서로군정서에 가서 비밀특파원의 임무를 띄고 2차례 국내에 입국한 후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의 봉천성 요중현으로 가서 정착했다가 봉천에서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봉천에서 구금된 유림은 곧 풀려났고, 1920년 말에 베이징에 가서 신채호, 남형우 등과 함게 독립운동가들의 결집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중국인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金正墨), 남형우 등이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는 데 관여했다. 천고는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고양하기 위해 한, 중 양국의 지식인들을 겨냥한 월간지였으며, 1921년 1월 천고출판사 명의로 베이징에서 제1호가 발간된 이래 제7권까지 발간되었다. 이후 1921년 상하이로 간 유림은 김규식, 여운형이 활약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1920~1921년 당시 중국의 사상적 지형은 이석증(李石曾) 등의 아나키즘. 주작인(周作人) 등의 인도주의, 리다자오, 천두슈 등의 마르크스주의, 후스 등의 실천학파 등 다양한 사상이 제각기 새로운 세상의 건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이렇듯 다양한 부류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혁명이론을 연마했다.

1922년 봄, 유림은 김두봉이 상하이에서 깁더조선말본을 발간할 때 관여했다. 깁더조선말본은 1916년 김두봉이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글 활자가 없어서 자음과 모음을 새로 만들고 활자를 주조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발간되었다. 하지만 집필한 내용에 대한 반대 견해가 제기되었고 판매도 부진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평판이 좋았고, 김두봉은 1930년 동아일보로부터 한글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유림은 1922년 9월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가 성도에 간 시기는 이보다 전인 1921년 중반이었다.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 파금(巴金)이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21년 중반 성도에서 <반월보(半月報)>에 3편의 글을 발표했고 그 중 하나는 에스페란토를 소개한 것인데, 얼마 후 그 잡지를 들고 고씨 성의 조선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조선인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토를 보급시킬 수 있을 지를 상의하러 왔다고 한다. 파금은 그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웠지만 몇 번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보급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유림이 중국에서 고상진(高尙眞), 고자성(高自性), 고삼현(高三賢) 등의 가명을 사용한 사실로 볼 때 이 '고씨 성의 조선인'은 유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간에서는 유림이 1922년경부터 유교를 버리고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고 보지만, 여러 기록을 봤을 때 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시기는 이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를 보급함으로서 자신들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유림이 저명한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를 찾아가 에스페란토 보급에 관심과 열정을 보인 걸 감안할 때 유림은 1921년 중반 무렵에 이미 아나키즘을 깊이 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림이 기존에 활동하던 상하이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성 성도의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가 아나키즘을 채택하고 이를 숙련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천성은 아나키즘이 유독 활발했고 프랑스 유학이 중국 내에서 가능한 가장 큰 창구였다.[2] 또한 성도고등사범학교는 국립사범학교로 사천성 정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학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1916년부터 조선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서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유림은 이곳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공부하는 한편 불어를 공부하며 프랑스로 유학가기를 희망했다.

유림은 성도고등사범학교 예과 영어부서 학업을 수행했다. 그가 언제 졸업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유림 본인이 직접 기술한 기록[3]에는 '단기 4258년(서기 1925년) 졸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 입학하고 8월에 졸업하는 중국의 학제로 미뤄볼 때, 그는 1925년 8월경에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졸업 후 준비하던 프랑스 유학을 그만두고 국민정부 교무원의 자격으로 남중국 교육 시찰을 했으며, 광둥으로 가서 김원봉 등과 함께 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간부 및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창설하여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 선전하며 활동하다 대구에서 방한상, 신재모 등이 진우연맹을 결성하자 이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고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기 위해 비밀 공작을 추진했다. 진우연맹은 1925년 9월 아나키스트들이 대구에 모여 아나키즘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일제 경찰은 1926년 7월 진우연맹 요인들을 체포한 뒤 이들이 아나키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군자금 모집 및 파괴 음모, 요인 암살을 위해 파괴단을 조직했으며,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할 폭탄은 상하이에 있는 민중사의 '고백성'에게 위촉하여 사오도록 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고백성은 유림의 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림은 봉천으로 가서 중국 국민당원들과 협의하여 한,중 혁명세력의 합작에 노력했다. 이후 유림은 광둥으로 갔고 광동기계공인총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25년 6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일어났던 광둥 노동자들의 홍콩과 광저우에서의 대규모 파업에 참가했고, 광동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에도 관여했다. 이후 우한으로 가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모색했고, 1927년 1월 3일 노동자들이 한커우 영조계 회수 투쟁을 벌일 때 참여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림은 생디칼리슴 운동의 맹장으로 활약했고 십만 공인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아나키즘의 이론적 모색 및 고양을 위해 생디칼리슴과의 연계를 꾀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무정부 내지 강권폐지를 위한 아나키즘의 발전적 모색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을 중요시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꾀했다.

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

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김종진과 만나 김좌진과의 연대 문제를 협의했고, 난징에서 온 이을규와 합세해 3월 하순에 중동선 해림역으로 향했다. 해림소학교에서 있었던 환영회 이후, 김좌진, 유림, 김종진, 이을규 등은 여러 날에 걸쳐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문제와 현지 사정에 따른 당면 과제를 토론했다.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1929년 11월 평양에서 관서흑우회 주최의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이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김영진(金永鎭)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평양에 왔다. 그러나 평양 경찰서 고등계가 모여드는 아나키스트들을 검거하면서 대회가 열리지 못했고, 유림은 11월 7일에 평양 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된 뒤 자신이 대구인쇄직공이며 26살의 김영진이라고 위장해 석방되었지만 11월 11일 유림의 정체를 알아챈 대동경찰서 순사들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대동경찰서 형사들은 관서흑우회 회관을 수색해 이홍근을 체포하고 중요 서류를 압수한 뒤 유림과 이홍근과의 관련 여부를 알아내고자 했다. 유림은 자신이 아나키스트인 점은 시인했지만 그 외의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대동경찰서는 11월 20일 오전 10시 유림을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을 석방시켰다.

1929년 11월 22일, 동아일보는 유림이 체포된 사실을 보도했다. 이후 유림에 대한 기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상세하게 게재되었다. 대동경찰서는 유림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29일간 취조했지만 끝내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자 1930년 2월 9일 새벽 3시 18분 봉천행 열차로 유림과 그의 부인, 아들을 봉청신시가 교립정 5번지 자택으로 추방했다. 그는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여전히 일제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이에 유림은 자신과 함께 의성숙(義誠塾)을 세우며 함께 활동하던 남상옥(南相沃)을 국내로 보내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꾀했다. 남상옥은 원산으로 들어온 뒤 김정희(金鼎熙), 노호범(盧好範) 등과 함께 원산청년회를 부활시키고 원산일반노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던 중 관제(官製)인 함남노동회가 부두하역을 독점하고 여러가지 명목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자, 원산일본노동조합이 이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결국 쌍방이 출동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경찰이 원산청년회와 원산일반노동조합의 관련자 60여 명을 검거하여 4개월 동안 비밀리에 취조한 뒤 1931년 4월 김정희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이후 경찰은 김정희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심이 되었던 협동단이란 자치조직의 존재를 알아낸 뒤 1929년 11월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 당시에 조직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검거 선풍이 일어났고, 결국 1931년 7월 간부 13명이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조직이 와해되었다. 유림 역시 1931년 10월 초 봉천 자택에서 체포되어 원산경찰서에 압송되었다.

유림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은 원산검사국 송치 이후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소속의 원산 와우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1931년 2월부터 원산법원지청 예심을 받고 2년만에 예심이 종결되었는데, 조서의 기록이 진술 내용과 틀려서 사건 관련자들이 서명을 거부했지만 일방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1932년 12월 22일 유림, 최갑용, 이홍근, 조중복, 임중학, 김정희, 강창기, 안봉연 등이 치안유지법 위반의 혐의로 원산형무소에서 함흥지방법원으로 호송되었다. 이후 1933년 3월 17일 제1회 공판이 함흥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개정되어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1933년 3월 24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이때 유림은 최갑용, 조중복, 임중학과 함께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사건 관련자들은 복심법원에 항소했고, 1933년 5월 4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그해 5월 11일 원심 유지 판결이 내려졌다. 유림은 다시 상고했지만 7월 6일 판결에서 기각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1937년 10월 8일 만기출소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 전향 요구와 고문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그와 함께 수감되었던 권오돈의 증언에 따르면, 한 번은 교회사(敎誨師)가 찾아와서 유림의 외아들 유원식이 폐병이 깊어져 절에서 요양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아들의 치료를 위해 가석방을 시켜줄 테니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림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인용문|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아들 스스로 원하는 바일 것이고, 나는 나가면 반드시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니 자식을 팔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이에 교회사가 당연히 그럴 것이니 독립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나가는 방편으로 말로만 안한다고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유림이 대답했다.

비록 임시방편이라 할 지라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

출소 후 즉시 만주로 피신했고, 1938년에 변장한 채 남, 북만주를 순회하며 남아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재편성에 노력했다. 1940년에는 베이징, 천진 등지에 머무르며 중국인들과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에 노력했으며, 1941년에는 일본이 천진의 각국 조계를 점령하자 천진을 탈출하고 옌안에서 며칠간 머물며 마오쩌둥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때 농촌 중심의 해방구를 통한 중국 특유의 혁명방법론에 많은 부분 공감을 표했지만,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노선 차이는 분명히 했다고 한다. 이후 1942년에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체류하면서 한국독립군의 원조 문제를 토의했고, 그해 10월 충칭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세했다.

1942년 10월 20일, 유림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피선되었고 10월 24일 당선증을 교부받았다. 이때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대표 자격이었으며, 유림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된 아나키스트 유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을 대표하여 참여했다. 유림은 1943년 2월 16일 외교위원회의 외교연구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4월 10일 조소앙, 신익희, 김성숙, 엄항섭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43년 10월 14일, 유림은 제35차 회의에서 안훈(安勳), 박건웅 등 5명과 함께 '건국강령수개에 관한 안'을 제안했다. 이후 '대한민국 건국강령 수개의원'으로 최동오, 조소앙, 강홍주(姜弘周),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피선되어 활동했다. 건국강령수개위원회는 4차례에 걸쳐 회의를 가졌는데, 유림은 건국강령에 대하여 아무 제약 없이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5월 10일, 유림은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해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충원(金忠元),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김규광(金奎光),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김순애, 한국청년회 대표 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추대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 외세 간섭 배격 등의 강연과 토론이 있었으며, '동맹국 영수에게 보내는 전문'을 '한국 각 혁명단체연합 재중국자유한인대회' 명의로 보내고 주석단에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한국애국부인회, 한국청년회를 병기했다. 전문의 개요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전후 한국의 국제 보호설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동맹국의 대일 작전에도 해가 되므로 반대", "동맹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며 반일 대혁명을 적극 수행", "물자 원조와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 지위 인정 요구" 등의 내용이었다.

또한 유림은 1943년 12월 13일 제35차 회의에서 박건웅 등 17명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안에 관한 재수정안을 제안했지만 보류되었다가 제36차 의회 개회일인 1944년 4월 20일에 다시 상정했다. 이 재수정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4월 21일에 출석의원 37인 중 35인의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4월 22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이 개헌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개헌으로, 개정안에 유림의 주도로 대한민국의 유래를 밝히는 머리말을 새로 기입하고 제2장 '인민의 권리와 의무', 제5장 '심판원'을 새로 두었으며, 종전 약헌의 5장 '회계'를 6장으로 두었다. 머리말에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 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 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寤寐)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여 3.1 대혁명에 이르러 전 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趨向)에 순응하여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체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 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이에 본원은 25년의 경험을 적(積)하여 제36회 의회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범 7장 공 62조로 개수하였다.

유림은 자신이 주도하여 제정한 이 대한민국 임시헌장 머리말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해방 후 창당한 독립노농당의 당의에 그대로 적용해 반영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임시헌장 자체를 완전하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의회 개원식 축사에서 해외 혁명역량을 모으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헌법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유림, 김붕준, 성주식(成周寔), 김원봉, 김성숙 등이 새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4월 26일에 선서가 있었다. 그는 국무위원으로서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1942년 10월 31일과 11월 2일에 2차례에 걸쳐 '서안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임시정부 측의 무성의를 질책하고 그들의 구명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안 사건이란, 1942년 3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이 대원들과 불화를 빛다가 암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사건으로 보고 처벌에 중점을 뒀지만, 유림은 혁명인재들을 모조리 숙청해서 되겠냐며 이들 중 죄질이 약한 이들은 구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유림은 이외에도 '건국 강령 수개에 관한 안',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안에 대한 재수정 안', '외교통일에 관한 안', '재정통일에 관한 안', '광복군 9개조항 취소원안에 대한 수정 안', '간부 인재양성에 관한 안' 등 여러 입법 제안을 해 결의 통과시켰으며, 다른 의원의 제안에 공동 제안자로 참여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제안자 명단이 기재된 의회 제안은 총 42개인데, 그 중 그가 첫번째로 발의하여 서명한 제의안은 10개 안에 달했다. 이는 전체 숫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가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후 4월 11일 제38차 의회 개원식에서, 유림은 축사 연설을 했다. 이때 그는 "3.1 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임시정부와 의정원이 독립운동과 일치하지 못하였으므로 해외 혁명역량을 모아 혁명정부와 혁명의정원이 되어야겠다. 그런데 헌법이 시대환경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였으니 특권을 요구하지 않고 자유연합을 하였던 3.1운동 당시의 자세로 되돌아가 시대에 맞는 헌법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아나키즘적 자유연합에 의한 혁명정부와 혁명의정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38차 의회에서, 유림은 제1과 법제위원회에 김상덕, 안훈 등과 함께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5월 8일에는 조소앙, 안훈, 차이석, 엄항섭 등과 함께 제1과 법제, 청원, 징계위원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기초위원'과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에 피선되었다. 이후 천황의 비공식 항복선언이 알려진 다음에 열린 8월 10일 국무위원회에서, 유림은 '당면 정책기초위원'으로 조소앙, 조경한과 함께 선출되었으며, 특히 유림과 조경한 두 명이 화급한 현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문건으로 완성하고 제39차 의회를 소집한 후 제출하도록 의결되었다. 그러나 이때 제출된 문건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8.15 광복 후,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7일에 제39차 의회를 개회했다. 유림은 김붕준, 성주식, 조소앙 등과 함께 정부위원(政府委員)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각 정파 간에 입국을 둘러싸고 국무위원 총사퇴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이는 임시정부의 그간의 역할에 대한 각 정파의 평가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유림은 이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고, 기자들로부터 정부의 방침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비공식회의가 있었고, 총사직할 필요는 없다는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 조선은 차지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하던 일이 반쯤 성공되었다."고 표현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1945년 12월 2일 유림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에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1945년 12월 7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유림은 1946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그해 7월 7일 독립노농당을 창당했다. 그가 이 당을 통해서 추구한 목표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세력이 되어 근로대중의 최대 복리를 추구하되 경제 운용의 주체로서 중·소 자산층을 활용한 자주적 계획경제, 민주입헌정치,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아울러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차별과 주도권 설정 대신에 농공병진(農工竝進)과 상호조화, 연대를 강조했다. 그리고 산업기관 관리와 경영에 노동자의 참여권을 보장하고, 자력으로 경작할 농민에게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사유권 인정을 역설했다.

유림이 이끄는 독립노농당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협상회의 결과 도출된 5년간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이후 그는 1947년 7월에 남북협상을 주장했으며, 1948년 3월에는 “독립정부 수립이 늦어질지라도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평양에서 협상하지 말고 서울에서 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북쪽의 정부가 미리 짜놓은 각본을 인정할 수 없으며, '협상은 하되 자주적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김구김규식 등의 평양 행을 만류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한편 유림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 반대했고, 1948년 5월 5~6일 서울시내 역경원에서 제2차 전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해 당의 단정(單政) 반대 노선을 어긴 5·10 제헌의회 선거 출마자 50여 명 전원을 당에서 제명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유림은 부산으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이승만 정권이 “수도 서울을 지킬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는 대국민 담화 방송을 해놓고 몰래 빠져나와 수많은 시민을 희생시킨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3개월 동안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또한 1952년 5~7월 이승만 정부가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유림은 신익희, 장면 등 야당 인사들과 재야 인사들을 규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발기했다. 1953년 3월 휴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을 즈음,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반대를 내세웠다. 그러나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더 이상의 동족 상쟁을 막기 위해 휴전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또한 유림은 1959년 12월부터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이 시작됐을 때 ‘재일동포 강제추방’이라며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후 4.19 혁명이 터지고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옛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을 모아 '혁신동지총연맹'을 조직했다. 그는 1960년 6월 서울대에서 열린 '정치대강연회'에서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독립노농당이 아나키즘 정당임을 밝히며, “자본은 무제한으로 허용할 수 없으며 중요 산업은 국유화하고 토지는 경작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7.29 선거 이후에는 혁신진영의 통합을 모색했다.

1961년 4월 1일, 유림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며칠 뒤인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단주 유림 선생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이때 장례위원장을 맡은 성균관대 초대총장 김창숙은 추도사를 발표했는데, 그 중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적혀 있었다.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君在大韓重)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君去大韓空).

유림의 유해는 국립 4.19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고, 권력을 쟁취한 쿠데타 세력은 모든 혁신단체들을 해산시키고 혁신인사들을 '용공행위자'로 간주하고 모조리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이때 유림이 생전에 세웠던 독립노농당 역시 강제로 해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유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1990년 4월 6일 독립노농당 핵심 간부들이었던 하기락, 정인식, 유영봉, 주경희 등이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사회당을 창당, 발기했다. 하기락이 위원장을 맡았고 정인식과 유영봉이 조직과 당무를 맡았다. 사회당은 현재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와 한국자주인연맹, 한국정치사상연구소를 잇달아 설립해 한국 아나키즘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 1993년 독립기념관에서 유림의 어록비가 제막되었고, 2001년 4월과 2005년 11월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아나키즘 학술대회가 열렸다.
  • 2006년 8월 독립기념관이 주최한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특별기획전'에서 유림의 유품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 2007년 9월 14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대회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의 공동 주최로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유림의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 논문이 발표되었다.
  • 유림은 자신의 외아들 유원식(柳原植)이 일제 말기에 일본군 장교가 되자 크게 실망해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며 자신의 부인 역시 아들을 잘못 키웠다며 멀리했다. 그리고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고위 경찰을 맡자 사위는 물론 외동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은 어찌할 수 없었는지, 유원식의 아내가 죽어 서울대병원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유림은 아무 연락 없이 병원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이에 한 독립노동당 소속 당원이 "왜 모르는 여인으로 간주한 사람의 죽음에 이리도 슬퍼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아.

각주

  1. 이 일화는 1958년 대구시 을 의원 선거에 출마한 유림의 선거홍보물에서 처음 언급되며, 1971년 3월호 잡지 <세대>에 유림의 아들 유원식이 기고한 <나의 아버지 유림>에서도 언급된다.
  2. 1919년 6월 말 사천성 성도에 설립된 해외 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출신 60여 명이 프랑스로 유학간 이래, 1919년과 1920년에 사천성 출신 중국인 유학생 378명이 프랑스로 유학갔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떠난 프랑스 유학생 1,500명 중 25%가 넘는 수치였다.
  3. <유림의 선거홍보물>, 대구시을 선거관리위원회,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