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사로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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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 초기 ===
=== 정계 초기 ===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사로는 1905년에 급진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에밀 콩브]] 내각이 발의한 [[1905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률|1905년 정교분리법]]의 찬성측 일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7월 13일, [[드레퓌스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와,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복권에 대한 투표가 하원에 부의되었을 때, 사로는 당시 드레퓌스를 무고했던 [[오귀스트 메르시에]]의 일파였던 [[폴 푸글리에시 콩티]](Paul Pugliesi-Conti) 의원에게 일방적으로 결투를 선언당했고, 콩티의 칼이 사로의 폐부를 찌른 바람에 사로는 6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사로는 1905년에 급진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에밀 콩브]] 내각이 발의한 [[1905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률|1905년 정교분리법]]의 찬성측 일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7월 13일, [[드레퓌스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와,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복권에 대한 투표가 하원에 부의되었을 때, 사로는 당시 드레퓌스를 무고했던 [[오귀스트 메르시에]]의 일파였던 [[폴 푸글리시-콩티]] 의원에게 일방적으로 결투를 선언당했고, 콩티의 칼이 사로의 폐부를 찌른 바람에 사로는 6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 [[1907년 랑그도크 포도주 위기]]에서 ====
==== [[1907년 랑그도크 포도주 위기]]에서 ====
[[1907년 랑크도크 포도주 위기]]가 일어날 당시, 사로는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으로 입각해 있었는데, 프랑스 남부 출신이었던 덕분에 사로는 당시 시위를 일으킨 랑그도크를 비롯한 남부 양조업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그 정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로는 시위의 주동자였던 [[마셀린 알베르]]와, 사실상 알베르가 이끄는 아르젤리에 위원회(Comité d'Argeliers)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사로의 협상 제안을 '''"내가 남부 놈들을 잘 아는데, 결국 놀자판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Je connais le Midi, tout ça finira par un banquet!)'''라는 비웃음 섞인 농담과 함께 거부했고, 6월 10일까지 사태가 가라앉길 기다렸으나 결국 사태는 곧 전국을 휩쓸 정도로 격화되고 말았다.
[[1907년 랑크도크 포도주 위기]]가 일어날 당시, 사로는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으로 입각해 있었는데, 프랑스 남부 출신이었던 덕분에 사로는 당시 시위를 일으킨 랑그도크를 비롯한 남부 양조업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그 정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로는 시위의 주동자였던 [[마셀린 알베르]]와, 사실상 알베르가 이끄는 아르젤리에 위원회(Comité d'Argeliers)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사로의 협상 제안을 '''"내가 남부 놈들을 잘 아는데, 결국 놀자판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Je connais le Midi, tout ça finira par un banquet!)'''라는 비웃음 섞인 농담과 함께 거부했고, 6월 10일까지 사태가 가라앉길 기다렸으나 결국 사태는 곧 전국을 휩쓸 정도로 격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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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사로의 사고방식은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사로의 사고방식은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이는 일반 식민지인들은 물론, 식민당국과 협조해야 할 안남과 통킹 보호령의 [[주이떤|유신제]] 조정까지 실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판보이쩌우]]의 [[베트남 국민당]] 결성과, 유신제가 참여한 [[1916년 베트남 봉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러한 사로의 ''위선적인'' 행보는 일반 식민지인들은 물론, 식민당국과 협조해야 할 안남과 통킹 보호령의 [[주이떤|유신제]] 조정까지 실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판보이쩌우]]의 [[베트남 국민당]] 결성과, 유신제가 참여한 [[1916년 베트남 봉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하여튼 그렇게 1913년 11월에 1차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로는, 1914년 6월에 조각된 [[공화사회당]]의 [[르네 비비아니]] 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대전쟁]]이 터지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수상으로 삼은 거국내각(Union Sacrée)이 수립되면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1916년 베트남 봉기 이후, 그 뒷수습을 위해 사로는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까지 다시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사로는 인도차이나 지역의 점진적 독립 계획을 발표하는 등, 2번째 총독 임기의 많은 부분을 현지 민심을 달래는 데 할애했다.
하여튼 그렇게 1913년 11월에 1차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로는, 1914년 6월에 조각된 [[공화사회당]]의 [[르네 비비아니]] 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대전쟁]]이 터지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수상으로 삼은 거국내각(Union Sacrée)이 수립되면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1916년 베트남 봉기 이후, 그 뒷수습을 위해 사로는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까지 다시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사로는 인도차이나 지역의 점진적 독립 계획을 발표하는 등, 2번째 총독 임기의 많은 부분을 현지 민심을 달래는 데 할애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사로는 총독부 산하의 비밀경찰 기관인 '''인도차이나 보안국(Surété Générale Indochinoise)'''을 창설하여,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사상과 사회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사로는 호치민과 필담으로 논쟁하면서 언급했듯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는 후일 사로가 [[국민혁명|페탱파의 친위 쿠데타]]에 참여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는 데 일조했다.


===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 ===
===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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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년 후인 1926년 7월 18일, 사로는 현재 [[옥시타니]] 주(Région)의 오드 지역구 보궐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당선된 지 5일 만에 4기 [[레몽 푸앵카레]]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1928년까지 장관으로 봉직하는데, 사로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있던 1927년 10월, [[우크라이나국]]의 군사 독재자였던 [[시몬 페틀류라]]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사무일 슈바르츠발트]]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페틀류라 군벌이 자행했던 수많은 유대계 우크라이나인 학살과 우크라이나 무정부주의자의 거물이자 페틀류라의 적이었던 [[네스토르 마흐노]]의 비참한 말년에 슈바르츠발트가 분노해 저지른 짓이었다. 이런 점이 참작되어 슈바르츠발트는 1년여의 재판을 걸쳐 풀려났으나, 이는 슈바르츠발트를 소련 비밀경찰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수많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26년 7월 18일, 사로는 현재 [[옥시타니]] 주(Région)의 오드 지역구 보궐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당선된 지 5일 만에 4기 [[레몽 푸앵카레]]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1928년까지 장관으로 봉직하는데, 사로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있던 1927년 10월, [[우크라이나국]]의 군사 독재자였던 [[시몬 페틀류라]]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사무일 슈바르츠발트]]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페틀류라 군벌이 자행했던 수많은 유대계 우크라이나인 학살과 우크라이나 무정부주의자의 거물이자 페틀류라의 적이었던 [[네스토르 마흐노]]의 비참한 말년에 슈바르츠발트가 분노해 저지른 짓이었다. 이런 점이 참작되어 슈바르츠발트는 1년여의 재판을 걸쳐 풀려났으나, 이는 슈바르츠발트를 소련 비밀경찰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수많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가 앞서 인도차이나 총독 재임기에서 서술했듯 공산주의를 죄악시하는 제국주의자였던 사로는 1927년에 알제리에서 소비에트의 코민테른이 반식민주의 운동을 선동해 프랑스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서 '''"공산주의가 바로 적이다!"'''라고 주장하여 프랑스 내의 중도파와 좌파의 반발까지 불러 일으키고 만다.<ref>재미있게도 사로는 인도차이나 총독 시절부터 최후에 이르기까지 반식민주의 운동이란 본질적으로 오롯이 공산주의라는 외부적 요소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ref>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1928년, 푸앵카레 총리가 개각을 시행했을 때, 사로는 저명한 청회색 의원이자 포슈 원수의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던 [[앙드레 타르디외]]에게 내무장관 자리를 내줘야 했다.
거기다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였던 사로는 1927년에 알제리에서 소비에트의 코민테른이 반식민주의 운동을 선동해 프랑스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서 '''"공산주의가 바로 적이다!"'''라고 주장하여 프랑스 내의 중도파와 좌파의 반발까지 불러 일으키고 만다.<ref>이는 사로가 인도차이나 총독 시절부터 반식민주의 운동이란 본질적으로 오롯이 공산주의라는 외부적 요소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f>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1928년, 푸앵카레 총리가 개각을 시행했을 때, 사로는 저명한 청회색 의원이자 포슈 원수의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던 [[앙드레 타르디외]]에게 내무장관 자리를 내줘야 했다.


===== 해군장관 1, 2기 =====
===== 해군장관 1, 2기 =====
이후 11기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과, 1기 앙드레 타르디외 내각 등의 단기 내각을 걸쳐, 1930년에 급진당 우위의 1기 [[카미유 쇼탕]] 내각이 들어서자 사로는 해군장관으로 입각했지만, 앙드레 타르디외가 이끄는 [[민주동맹]] 등의 정당들이 급진당 내각을 비토함에 따라 사로는 겨우 9일만에 허무하게 해군장관 자리를 내놔야 했다. 하지만 9개월 후, 2기 타르디외 내각이 붕괴하면서 다시 급진당의 [[테오도르 스테그]]를 총리로 삼는 급진당 우위 내각이 구성되었고, 사로는 다시 한번 해군장관으로 입각한다. 그 과정에서 사로는 자신의 대자인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밀어주면서 해군 예산을 증액시켰지만, 또 1개월만에 내각이 다시 붕괴되면서 사로는 또 다시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이후 11기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과, 1기 앙드레 타르디외 내각 등의 단기 내각을 걸쳐, 1930년에 급진당 우위의 1기 [[카미유 쇼탕]] 내각이 들어서자 사로는 해군장관으로 입각했지만, 앙드레 타르디외가 이끄는 [[민주동맹]] 등의 정당들이 급진당 내각을 비토함에 따라 사로는 겨우 9일만에 허무하게 해군장관 자리를 내놔야 했다. 하지만 9개월 후, 2기 타르디외 내각이 붕괴하면서 다시 급진당의 [[테오도르 스테그]]를 총리로 삼는 급진당 우위 내각이 구성되었고, 사로는 다시 한번 해군장관으로 입각한다. 그 과정에서 사로는 자신의 대자인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밀어주면서 해군 예산을 증액시켰지만, 또 1개월만에 내각이 다시 붕괴되면서 사로는 또 다시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 식민지장관 2기, 해군장관 3기 =====
===== 식민지장관 2기 =====
그리고 1932년, 급진당 우위의 3기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이 들어서고, 사로는 다시 식민지장관으로 입각하게 되는데 이때 사로는 '''식민주의의 영광과 구속(Grandeur et servitude coloniales)'''이라는 제목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1920년대의 식민지인들의 문명화에 대한 낙관 대신 공산주의에 맞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식민지 개발론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사로는 이전까지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모두 버리고 아프리카인의 본성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인종론을 내세워 자신의 실책을 변명했다.<ref>하지만 이는 각주에서 인용한 페르낭 베르나르의 저작에서 '사로주의'의 문제점이라고 언급되듯이, 당시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구 밀도가 낮았고, 주민 중 상당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사와 이후 대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는 점을 사로가 식민지 당국의 행정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과소평가한 것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의 강제 노역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만다.</ref>
그리고 1932년, 급진당 우위의 3기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이 들어서고, 사로는 다시 식민지장관으로 입각하게 되는데 이때 사로는 '''식민주의의 영광과 구속(Grandeur et servitude coloniales)'''이라는 제목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1920년대의 문명화 낙관을 버리고, 공산주의에 맞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식민지 개발론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사로는 이전까지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모두 버리고 아프리카인의 본성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인종론을 내세워 자신의 실책을 변론했다.<ref>하지만 이는 각주에서 인용한 페르낭 베르나르의 저작에서 '사로주의'의 문제점이라고 언급되듯이, 당시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구 밀도가 낮았고, 주민 중 상당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사와 이후 대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는 점을 사로가 식민지 당국의 행정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과소평가한 것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의 강제 노역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만다.</ref>


그러면서 사로는 1920년대에 이어 다시금 식민지에 대한 공공지출의 증가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당시 에리오 내각은 [[대공황]] 때문에 사로의 제안을 받아들일 형편이 되질 못했고, 결국 대공황으로 인한 부채 문제 때문에 내각이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사로의 제안은 [[조제프 폴 봉쿠르]] 내각과 1기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을 거쳐서도 통과되지 못했고, 결국 사로는 1933년 9월 2일 개각 때, 같은 당의 [[알베르 다리미에]](Albert Dalimier)에게 식민지장관 직책을 이임하고 해군장관에 재취임하게 된다. 결국 사로의 구상이 받아들여진 것은 사로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있던 1934년이었는데, 이때 프랑스가 지배하던 식민지 내부 사정이 경제 불황과 심각한 강제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노동쟁의들 때문에 굉장히 불안한 형국에 놓이고, 영국이 한발 앞서 식민지발전법안과 기금, 그리고 제국관세블록 등의 정책들을 입안하자, 프랑스 정부도 식민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식민지인에 대한 투자를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ref>그러나 이런 식민지 공공지출의 증가는 되려 식민지 피지배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공공지출이 '''융자'''의 형태로 주어져 자연히 식민지의 부채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고, 대공황이 겹쳐 그 부담이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로주의식 공공지출을 두고, 프랑스의 사학자인 C. 코크리 비드로비치(Catherine Coquery-Vidrovitch)는 그녀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공저한 저작인 '''Histoire de la France Coloniale(프랑스 식민지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잘 알려진 현상이 탄생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3세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원조와 부채의 악순환이고 이는 그때 이후 증가 일로에 있다"'''라고 비평했다.</ref>
그러면서 사로는 1920년대에 이어 다시금 식민지에 대한 공공지출의 증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때마침 프랑스가 지배하던 식민지 내부 사정이 경제 불황과 심각한 강제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노동쟁의들 때문에 굉장히 불안한 형국에 놓이고, 영국이 한발 앞서 식민지발전법안과 기금, 그리고 제국관세블록 등의 정책들을 입안하자, 더 이상 두고볼 수 없게 된 프랑스 정부는 사로가 식민지장관 직책에서 물러난 지 오래인 1934년에서야 식민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로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ref>그러나 이런 식민지 공공지출의 증가는 되려 식민지 피지배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공공지출이 '''융자'''의 형태로 주어져 자연히 식민지의 부채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고, 대공황이 겹쳐 그 부담이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로주의식 공공지출을 두고, 프랑스의 사학자인 C. 코크리 비드로비치는 '''"우리는 이 시대에 잘 알려진 현상이 탄생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3세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원조와 부채의 악순환이고 이는 그때 이후 증가 일로에 있다"'''라고 비꼬기까지 했다.</ref>


하여튼 사로는 최후의 사회공화당 총리를 배출한 조제프 폴 봉쿠르 내각에서 해군장관을 겸임하게 되었고, 이 해군장관 자리는 사로가 식민지장관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과 사로 그 자신을 수상으로 삼는 내각까지 계속 유임되었다.
===== 해군장관 3기, 내무장관 2기 =====


==== 단기내각의 총리 ====
==== 단기내각의 총리 ====
===== 총리 1기 =====
 
===== 총리 2기 =====
=== [[국민혁명]] 합류 ===
=== [[국민혁명|페탱의 쿠데타]]에 합류하다 ===


=== 말년 ===
=== 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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