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71번째 줄: | 71번째 줄: | ||
이러한 사로의 ''위선적인'' 행보는 일반 식민지인들은 물론, 식민당국과 협조해야 할 안남과 통킹 보호령의 [[주이떤|유신제]] 조정까지 실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판보이쩌우]]의 [[베트남 국민당]] 결성과, 유신제가 참여한 [[1916년 베트남 봉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 이러한 사로의 ''위선적인'' 행보는 일반 식민지인들은 물론, 식민당국과 협조해야 할 안남과 통킹 보호령의 [[주이떤|유신제]] 조정까지 실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판보이쩌우]]의 [[베트남 국민당]] 결성과, 유신제가 참여한 [[1916년 베트남 봉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 ||
하여튼 그렇게 1913년 11월에 1차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로는, 1914년 6월에 조각된 [[공화사회당]]의 [[르네 비비아니]] 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대전쟁]]이 터지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수상으로 삼은 거국내각(Union Sacrée)이 수립되면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1916년 베트남 봉기 이후, 그 뒷수습을 위해 사로는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까지 다시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다 | 하여튼 그렇게 1913년 11월에 1차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로는, 1914년 6월에 조각된 [[공화사회당]]의 [[르네 비비아니]] 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대전쟁]]이 터지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수상으로 삼은 거국내각(Union Sacrée)이 수립되면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1916년 베트남 봉기 이후, 그 뒷수습을 위해 사로는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까지 다시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다. | ||
하지만 이 시기에 사로는 총독부 산하의 비밀경찰 기관인 '''인도차이나 보안국(Surété Générale Indochinoise)'''을 창설하여,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사상과 사회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사로는 호치민과 필담으로 논쟁하면서 언급했듯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는 후일 사로가 [[국민혁명|페탱파의 친위 쿠데타]]에 참여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는 데 일조했다. | 하지만 이 시기에 사로는 총독부 산하의 비밀경찰 기관인 '''인도차이나 보안국(Surété Générale Indochinoise)'''을 창설하여,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사상과 사회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사로는 호치민과 필담으로 논쟁하면서 언급했듯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는 후일 사로가 [[국민혁명|페탱파의 친위 쿠데타]]에 참여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는 데 일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