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65번째 줄: | 65번째 줄: | ||
그리고 사로는 왜 자신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주이떤|유신제]]를 예방함으로서 식민지인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초대 총독이었던 [[폴 두메르]]의 강압적 식민통치 노선을 온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먼저 기초 교육을 널리 확대하여,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고, 베트남어의 새로운 표기법([[쯔꾸옥응으]])을 제정하고 널리 보급하면서 문맹률을 줄이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프랑스인 파견 관료들이 독점하고 있던 총독부의 관직의 문호 역시 개방하여, 베트남 현지 관료도 총독부 고위 관료로 출세할 수 있도록 제도에 손을 보았다. | 그리고 사로는 왜 자신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주이떤|유신제]]를 예방함으로서 식민지인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초대 총독이었던 [[폴 두메르]]의 강압적 식민통치 노선을 온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먼저 기초 교육을 널리 확대하여,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고, 베트남어의 새로운 표기법([[쯔꾸옥응으]])을 제정하고 널리 보급하면서 문맹률을 줄이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프랑스인 파견 관료들이 독점하고 있던 총독부의 관직의 문호 역시 개방하여, 베트남 현지 관료도 총독부 고위 관료로 출세할 수 있도록 제도에 손을 보았다. | ||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 ||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사로의 사고방식은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사로의 사고방식은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