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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 ||
| | |종목 = [[사적]] 제11호 | ||
| | |명칭 = 풍납동 토성(풍납토성) | ||
| | |한자 = 風納洞 土城 | ||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 ||
| | |수량= | ||
| | |면적 = 353,589.1㎡ | ||
| | |날짜 = [[1963년]] [[1월 21일]] | ||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 | |||
|시대 =[[삼국시대]] | |||
|소유 = | |||
|관리 = [[송파구]] | |||
}} | }} | ||
==개요== | |||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ㅈ|공식 명칭은 광주 풍납리 토성이었다가 2011년에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에 발생한 홍수로 성벽의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 |||
==특성== | ==특성== | ||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의 축조는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의 축조는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 ||
==논란== | ==논란== | ||
이 성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그냥 단순한 방어용 토성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이 성이 위례성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쪽 지역에 사는 | 이 성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그냥 단순한 방어용 토성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이 성이 위례성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쪽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위례성이 나올 가능성이 꽤 높은 상황이고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 지역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버릴 경우 재산권 행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 | ||
{{주석}} | {{주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