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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1937년]] 이후로 히틀러와 의견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보다 빨리 전쟁을 시작해 안달인 히틀러와 달리 재군비가 끝나지 않았다며 대외전쟁, 특히 [[폴란드]]나 [[프랑스]]와의 전쟁을 40년대까지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다만 [[1937년]] 이후로 히틀러와 의견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보다 빨리 전쟁을 시작해 안달인 히틀러와 달리 재군비가 끝나지 않았다며 대외전쟁, 특히 [[폴란드]]나 [[프랑스]]와의 전쟁을 40년대까지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 ||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는 |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는 1935년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래 역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재군비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블롬베르크와 마찬가지로 개전 시기를 두고 히틀러와 의견 대립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로 대표되는 당 조직이 군사력을 갖게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나치당, 특히 SS의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와 격하게 대립 중이었다.<ref>[[장검의 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독일군과 친위대는 돌격대 처리를 두고 협조하던 관계였다.(...) 물론 친위대가 돌격대보다 더 위협적으로 성장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겠지만.</ref> | ||
즉, 이 둘은 공통적으로 군부를 대표하는 인사로 나치에 협조적이긴 했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충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즉, 이 둘은 공통적으로 군부를 대표하는 인사로 나치에 협조적이긴 했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충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
== 블롬베르크 사건 == | == 블롬베르크 사건 == | ||
블롬베르크는 몇 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홀아비로 지내고 있다가 자신의 비서였던 에르나 그룬(Erna Gruhn)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참고로 블롬베르크는 | 블롬베르크는 몇 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홀아비로 지내고 있다가 자신의 비서였던 에르나 그룬(Erna Gruhn)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참고로 블롬베르크는 1938년 당시 59세였고, 에르나 그룬은 26세로 '''33살 차이'''였다.<del>이건 범죄야 범죄! 숙청감도 아니고 사형감이다!</del> 나이 많은 고위층이 젊은 처녀랑 결혼하는 것은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기시되는 건 또 아니어서 블롬베르크-그룬 커플은 1938년 [[1월 12일]], 나치당 고위직(히틀러 및 [[헤르만 괴링]] 포함)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결혼식을 올린다. | ||
참석자 중에 히틀러와 괴링이 있다는 데 알 수 있듯, 나치 수뇌부도 블롬베르크의 결혼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블롬베르크는 결혼 전 괴링에게 결혼 상담까지 했고, 그 상담을 받은 괴링은 그룬의 전 애인에게 돈을 주고 외국으로 보내주는 등 블롬베르크를 도와주었다.<ref>히틀러 평전 2. 요아힘 C.페스트 (1998). 961p</ref> | 참석자 중에 히틀러와 괴링이 있다는 데 알 수 있듯, 나치 수뇌부도 블롬베르크의 결혼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블롬베르크는 결혼 전 괴링에게 결혼 상담까지 했고, 그 상담을 받은 괴링은 그룬의 전 애인에게 돈을 주고 외국으로 보내주는 등 블롬베르크를 도와주었다.<ref>히틀러 평전 2. 요아힘 C.페스트 (1998). 961p</re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