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영어: Blomberg-Fritsch Affair)은 1938년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일련의 숙군 작업이다. 독일의 군 지도부는 이 사건으로 교체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군부 장악이 가속화되었다.

블로베르크 사건과 프리치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거의 동 시기에 진행되었고, 그 영향도 동일하기에 대부분의 문헌이나 사이트에서는 이를 별개로 구분하지 않고 동일 사건으로 묶어서 언급한다.

그들은 누구인가?[편집 | 원본 편집]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는 당시 독일군 총사령관으로 1차대전 후 독일군의 첫 원수였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색채가 강했고 좌파를 혐오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의 1차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입각했다. 대통령 파올 폰 힌덴부르크를 보호할 적임자이자 군부의 의견을 대표할 적임자로서 선택된 인사[1]였다. 본인 역시 자기 자신이 발탁된 이유를 잘 알았기에 히틀러에 협력하기도 하고 가끔 견제구도 날렸다. 장검의 밤 직전에는 히틀러를 향해 힌덴부르크에 의한 친위쿠데타 위협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힌덴부르크 사후 히틀러의 군비증강책을 반기면서 히틀러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1935년 국방장관에서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36년 원수가 되었다.

다만 1937년 이후로 히틀러와 의견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보다 빨리 전쟁을 시작해 안달인 히틀러와 달리 재군비가 끝나지 않았다며 대외전쟁, 특히 폴란드프랑스와의 전쟁을 40년대까지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는 1935년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래 역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재군비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블롬베르크와 마찬가지로 개전 시기를 두고 히틀러와 의견 대립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로 대표되는 당 조직이 군사력을 갖게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나치당, 특히 SS의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와 격하게 대립 중이었다.[2]

즉, 이 둘은 공통적으로 군부를 대표하는 인사로 나치에 협조적이긴 했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충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블롬베르크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블롬베르크는 몇 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홀아비로 지내고 있다가 자신의 비서였던 에르나 그룬(Erna Gruhn)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참고로 블롬베르크는 1938년 당시 59세였고, 에르나 그룬은 26세로 33살 차이였다.이건 범죄야 범죄! 숙청감도 아니고 사형감이다! 나이 많은 고위층이 젊은 처녀랑 결혼하는 것은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기시되는 건 또 아니어서 블롬베르크-그룬 커플은 1938년 1월 12일, 나치당 고위직(히틀러 및 헤르만 괴링 포함)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결혼식을 올린다.

참석자 중에 히틀러와 괴링이 있다는 데 알 수 있듯, 나치 수뇌부도 블롬베르크의 결혼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블롬베르크는 결혼 전 괴링에게 결혼 상담까지 했고, 그 상담을 받은 괴링은 그룬의 전 애인에게 돈을 주고 외국으로 보내주는 등 블롬베르크를 도와주었다.[3]

결혼 후 블롬베르크 부부는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그동안 일이 터졌다. 게슈타포가 에르나 그룬의 나체 사진을 입수했고, 뒤이어 그룬이 창녀였다는 경찰 문서가 나왔다. 그룬의 나체 사진은 진짜였지만 창녀 일을 했다는 문서는 후일 조작으로 밝혀지는데, 당시 문서가 죄 파기되고 관련자들이 모두 죽어 알 수는 없지만 돌격대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에 화가 난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군 총사령관직을 욕심내고 있던 괴링이 배후에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만약 괴링이 배후라면, 블롬베르크의 사전 결혼상담을 받을 때부터 이를 기회로 여기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1월 24일, 신혼여행 후 돌아온 블롬베르크는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괴링과 면담했다. 괴링은 결혼을 취소하라고 조언했으나 33살이나 어린 영계를 버릴 수 없던 블롬베르크는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 장교단에서도 블롬베르크의 결혼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이틀 뒤인 1월 26일, 블롬베르크는 히틀러를 만나 사의를 표했고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블롬베르크 사건은 끝난다.

프리치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블롬베르크 은퇴 후의 타겟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치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입증한다는 허위 문서가 보고되었다. 블롬베르크의 경우 에르나 그룬의 나체 사진이 있기에 그냥 조용히 체념하고 깔끔하게 은퇴한 반면, 프리치는 완전한 누명을 쓴 경우라 격렬히 저항했으나 게슈타포가 주동한 거짓 증거, 거짓 증인 앞에 결국 반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후속 조치[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는 괴링이 희망한 군 총사령관 자리를 자신이 겸직하고 군 지도부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전쟁부를 해체하고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를 신설하였으며 OKW의 수장에 히틀러의 딸랑이로 전쟁기간 내내 명성을 떨치는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되었다. 프리치의 후임 육군 총사령관에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임명했고, 뒤이어 장군 16명을 퇴역시키고 대규모 보직이동을 단행한 것이다.

이로서 히틀러와 나치에 협력을 거부하거나 조건부적으로 협력하던 일부 인사들이 모조리 물갈이되었고, 군 지도부는 카이텔과 같은 딸랑이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나치의 군권 장악, 나아가 히틀러의 침략 계획이 가속화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군권 장악의 성과와는 별개로 군 지도부가 창녀와 결혼 혹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민심이 술렁이자 히틀러는 이를 달래기 위해 대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강력히 압박하여 2월 12일, 슈슈니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오스트리아로부터 양보를 받아낸다. 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참조.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히틀러는 술렁이던 민심을 단번에 가라앉히고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을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프리치는 3월 18일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은거하며 히믈러에 결투를 신청하려고 열심히 권총 사격 연습을 했으나 나치는 프리치와 다른 나치 고위급과의 만남 자체를 금지하며 도망가기 급급했다.(...) 하지만 히믈러에 대한 분노와 별개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지지는 여전해서 수정의 밤을 지지하는 병크를 터트렸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폴란드 침공때 12포병연대의 명예 대령(...)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직함으로 참전했다가 1939년 9월 22일, 바르샤바 포위전 도중 날아온 포탄에 맞아 동맥 절단에 따른 과다출혈로 전사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최고위급 전사자. 하지만 그의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직위나 위치로 보아 암살, 즉 숙청 아니냐는 의심이 많다.

반면 조용히 은퇴하는 길을 선택한 블롬베르크는 그룬과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의 휴양지 카프리 섬[4]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945년 종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전쟁기간동안 활동한 전력이 없어 전범행위가 없었던 지라 바로 석방되었고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발언을 기다리던 중 1946년 초 지병으로 사망한다.

각주

  1. 히틀러의 첫 내각때 히틀러가 요구했던 건 단 두 자리, 바로 자기 자신의 총리직과 빌헬름 프리크가 맡게 될 내무장관이었다. 나머지 장관직들은 다른 보수정파들이나 대통령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
  2. 장검의 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독일군과 친위대는 돌격대 처리를 두고 협조하던 관계였다.(...) 물론 친위대가 돌격대보다 더 위협적으로 성장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겠지만.
  3. 히틀러 평전 2. 요아힘 C.페스트 (1998). 961p
  4.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말년에 짱박혔던 그 곳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