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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는 상동청년학원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폐교 후 8년이 지난 1921년 3월경 동창들을 모아서 총회를 열고 재건을 논의했으나, "우리 사회에는 그보다도 더욱 큰 사업이 많으며, 학교 부활문제는 여간 고난한 문제가 아니다"는 반대가 많아서 무산되었다.<ref>[[매일신보]] 1921년 3월 10일자 기사 '청년학원 부활'</ref> [[8.15 광복]] 후인 1948년에는 "청년학원의 부활이 곧 한국의 부활"이란 신념을 갖고 청년학원 초대 원장을 지낸 바 있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하자 다시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남산감리교회 [[이규갑]] 목사와 상의하여 교회 부속교실을 사용하여 신과, 국문학과, 외국어과를 둔 청년학원의 재건을 계획하였고, [[김구]] 등과 직간접으로 협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 김진호는 상동청년학원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폐교 후 8년이 지난 1921년 3월경 동창들을 모아서 총회를 열고 재건을 논의했으나, "우리 사회에는 그보다도 더욱 큰 사업이 많으며, 학교 부활문제는 여간 고난한 문제가 아니다"는 반대가 많아서 무산되었다.<ref>[[매일신보]] 1921년 3월 10일자 기사 '청년학원 부활'</ref> [[8.15 광복]] 후인 1948년에는 "청년학원의 부활이 곧 한국의 부활"이란 신념을 갖고 청년학원 초대 원장을 지낸 바 있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하자 다시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남산감리교회 [[이규갑]] 목사와 상의하여 교회 부속교실을 사용하여 신과, 국문학과, 외국어과를 둔 청년학원의 재건을 계획하였고, [[김구]] 등과 직간접으로 협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 ||
1913년 상동청년학원이 폐원된 뒤, 같은 감리교 계통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 1913년 상동청년학원이 폐원된 뒤, 같은 감리교 계통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엿다. 또한 1914년 상동교회 전도사직을 받았고, 1916년 정동교회 전도사를 맡았다. 그러던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찬동했다. 1919년 2월 28일 경성부 정동의 자택에서 독립선언서를 경성 러시아 영사관 앞의 봉투에 넣고,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오흥순에게 교부하여 3월 1일 영사관 관원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3월 3일 종로에서 <국민회보> 6~7매를 행인에게 배포했다. | ||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ref>[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953&evntdowngbn=Y&indpnId=000000807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f> |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ref>[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953&evntdowngbn=Y&indpnId=000000807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