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18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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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鎭浩.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호는 '애산'이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와 개신교 입교[편집 | 원본 편집]

1873년 9월 29일 경상북도 함창군 수하면(현재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에서 빈농인 청풍 김씨 김규진과 강옥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8살 위인 형 김진수가 1881년 사망하면서, 그는 장남이 되었다. 증조부 김동규와 조부 김학성에게 학문을, 서당에서 경서를 배웠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당화의 침해를 많이 받은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청김은 모든 씨족 중 가장 당화의 침해를 많이 받은 족속이다. 식암(息菴) 김진위(金鎭胃) 상공(相公)과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 상공(相公)이 다 오인(午人)으로 더불어 대오(大忤)하여 세부양립(勢不兩立)이 되었고 그 후에도 당화가 있을 때 피해가 부소(不小)하였다.


- 김진호 목사 1953년 1월 1일 진해에서의 회고.[1]

또한 일찍이 국사를 읽고 한탄하기를 "우리 국사는 혈의 사라 곧 사람을 죽이는 역사요, 당화로 인하여 황실을 짊어질 사류를 참살하는 것 외에 다른 역사가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1896년 부친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후 1899년 상경하였다. 이는 가산이 점차 빈곤에 들자 생활의 방도를 찾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는 경성에서 김유와 함께 노암 이용태의 문객이 되었다.

그가 관직을 얻은 시점과 기독교인이 된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애산 김진호 목사 약력>에 따르면, 1905년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애국자적 품성과 신앙에 은혜받고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1907년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회고에는 이 부분이 모호하게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이용태가 내부대신에 임명되었을 때 그 역시 세무주사로 임명되었으나, 이용태가 체임되자 세무주사를 사직하였으며, 이후에 승동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이때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민영환이 자결하자, 김진호는 '서장로' 라는 교인에게 "민영환이 자결하여 죽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교인은 "민보국은 역적이지요."라고 답했다. 김진호는 이 말에 심히 분노하여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모르는 썩은 놈들'이라고 생각하여 다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명성이 높은 전덕기 목사를 찾아가 서장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더니, 전덕기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 말은 옳은 말이지만 잘못 들으면 낙심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인데 민보국이 자의로 죽었으니 하나님을 거스림이란 말이요, 나라의 역적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민보국이 양심으로 죽었으면 하나님이 죄로 아시지 않습니다.

김진호는 그 말을 듣자 깨달음을 얻고 전덕기 목사의 교회인 상동예배당에 다니다가 나중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이용태가 내부대신에 임명된 시기는 1904년 5월이었으나[2], 곧이어 6월에 중추원 부의장으로 체임되었다.[3] 그리고 김진호가 탁지부 세무주사로 이명된 것은 1906년 10월이다.[4] 그러다 1907년 5월 독직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이듬해인 1908년 1월에 억울한 누명이었음이 밝혀졌지만, 그는 이미 상경한 뒤였다. 민영환이 순절한 시기는 1905년 11월 30일로, 세무주사를 면직한 후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김진호의 회고는 착오임이 분명하다.

김진호가 승동교회를 찾은 시기는 이르면 1905년 12월로, 거기서 몇주 다니다가 서장로에게 "민보국은 역적"이라는 답변을 듣고 실망하여 승동교회를 떠났다. 한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전덕기를 찾아갔고, 그에게 감화받아 상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12월에 이 모든 게 진행되기엔 지나치게 촉박하므로, 김진호가 전덕기를 만나 개신교에 입교한 시기는 1905년보다는 1906년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김진호의 3남인 김희영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이 순절한 뒤 김진호가 승동교회에 출석하여 몇주간 다니다가 서장로의 답변을 듣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고, 얼마 후 상동청년회에 입회하여 시사토론회에 참석하다가 상동예배당으로 가서 청년회장 전덕기 목사를 만난 뒤, 그에게서 서장로의 답변에 대한 해석을 듣고 감화되어 개신교에 정식으로 입교했다고 한다. 같은 해 경북 의성에서 세무주사로 재직하다가 1907년 사직한 뒤 다시 상경하여 전덕기에게 세레를 받고,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 교원이 되었으며, 신민회에 입회했다고 한다.

민족운동[편집 | 원본 편집]

김진호는 기독교 신자가 된 뒤, 전덕기이동녕의 권유를 받고 임치정의 집에서 신민회에 입회했다. 김진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지방연락사무를 보며 해내, 해외로 연락하며 회원을 결집하였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연락책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보훈처가 작성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김진호가 경상도 대표로 활동했다고 기술되었으나, 김진호의 회고나 일제측 자료 어디에도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없다. 일제측이 파악한 신민회의 국내 지회는 강원지회, 경기지회, 황해지회, 평남지회, 평북지회, 함경지회로,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지역과 신민회의 관련성은 아직 입증된 바 없다.

한편, 김진호는 상동청년학원의 교원을 맡아 역사를 주로 가르쳤다. 이와 동시에 공옥소학교에서도 교원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통한학만 익혔을 뿐 근대식 학문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상동청년학원이 다루던 '만국사'를 맡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종교와 철학과 시문과 역사"라고 회고했으며, 1931년경 박문서관에서 <조선사략>을 간행할 정도로 한국사에 관심이 깊은 점을 볼 때, 한국사를 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진호는 상동청년학원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폐교 후 8년이 지난 1921년 3월경 동창들을 모아서 총회를 열고 재건을 논의했으나, "우리 사회에는 그보다도 더욱 큰 사업이 많으며, 학교 부활문제는 여간 고난한 문제가 아니다"는 반대가 많아서 무산되었다.[5] 8.15 광복 후인 1948년에는 "청년학원의 부활이 곧 한국의 부활"이란 신념을 갖고 청년학원 초대 원장을 지낸 바 있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하자 다시 이시영 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남산감리교회 이규갑 목사와 상의하여 교회 부속교실을 사용하여 신과, 국문학과, 외국어과를 둔 청년학원의 재건을 계획하였고, 김구 등과 직간접으로 협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13년 상동청년학원이 폐원된 뒤, 같은 감리교 계통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1914년 상동교회 전도사직을 받았고, 1916년 정동교회 전도사를 맡았다. 그러던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찬동했다. 1919년 2월 28일 경성부 정동의 자택에서 독립선언서를 경성 러시아 영사관 앞의 봉투에 넣고,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오흥순에게 교부하여 3월 1일 영사관 관원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3월 3일 종로에서 <국민회보> 6~7매를 행인에게 배포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6]

목회 활동[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인천 내리교회 담임 목사로 안수받은 뒤, 김진호는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아펜젤러 목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배재학당 교목으로 다시 부임하였고, 학생들과 함께 전도 활동을 하면서 홍제원교회, 이태원교회를 설립했다. 1924년 장로목사로 안수받아 체부동, 삼청동 담임목사를 맡았다. 1935년 배재학당 교목을 은퇴한 뒤, 1937년 궁정동, 삼청동, 원동 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교인들을 이끌었다.

1940년 함경북도 청진지방 목사로 파송되어 청진, 어항, 경성, 주을, 생기령 등 6개 교회를 설립했다. 8.15 광복 후 소련군정과 갈등을 벌이다 소련군에 붙잡혀 심문당했다. <애산 김진호목사 약력>에 따르면, 그가 체포된 이유는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이며, 김진호는 심문을 받으면서 보안서로부터 모든 기록을 빼앗겼다고 한다.

1947년경 보안서 감옥에서 풀려난 뒤 해주를 경유하여 월남하였고, 그해 8월 궁정동교회의 요청에 따라 담임목사를 맡았고, 재건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강릉 주문진 지방교회에서 분규가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가덕도로 피난하였고, 1951년 4월 노령을 이유로 담임목사를 사임했다. 1960년 9월 29일 서울에서 위장염에 걸려 소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김진호에게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12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애산 김진호 홈페이지
  2. 황성신문 1904년 5월 5일자 기사
  3. 황성신문 1904년 6월 30일자 기사
  4. 황성신문 1906년 11월 1일자 기사
  5. 매일신보 1921년 3월 10일자 기사 '청년학원 부활'
  6.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