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묵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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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김정묵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1926년 10월 10일 [[원세훈]], [[장건상]], [[조남승]], [[조성환 (1875년)|조성환]], 배천택, 김광천, [[박건병]] 등이 민족혁명을 위한 대독립당의 결성을 촉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김정문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창설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10월 28일 발표된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박멸, 한국의 절대독립 주장, 한국 혁명 동지의 당적 결합, 민족혁명의 유일전선 결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단결 등을 골자로 하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강령을 적극 지지했다.
1926년, 김정묵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1926년 10월 10일 [[원세훈]], [[장건상]], [[조남승]], [[조성환 (1875년)|조성환]], 배천택, 김광천, [[박건병]] 등이 민족혁명을 위한 대독립당의 결성을 촉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김정문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창설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10월 28일 발표된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박멸, 한국의 절대독립 주장, 한국 혁명 동지의 당적 결합, 민족혁명의 유일전선 결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단결 등을 골자로 하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강령을 적극 지지했다.


한편, 김정묵은 봉천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마적과 토빌의 토벌에 상당한 공을 올렸다. <신한민보> 1933년 3월 30일자 '[[김규식 (1881년)|김규식]] 박사의 연설' 기사에 따르면, 마적이나 의용군은 봉천군 한인 장교 '김국빈'(김정묵의 이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만주지역 거주 한인들의 사회, 경제적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1926년 11월경 장건상, 박승병, 조성환, 강구우 등이 남북만주 이주 200만 한인의 정치, 경제상 이익을 옹호하고, 비참한 상황에 빠진 이주민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 하나의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하자, 이에 공감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30년 1월 17일 봉천에서 육군대좌를 맡아 동북성 군법처의 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인들이 한인을 일본의 정탐으로 보는 태도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한편, 김정묵은 봉천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마적과 토빌의 토벌에 상당한 공을 올렸다. <신한민보> 1933년 3월 30일자 '[[김규식]] 박사의 연설' 기사에 따르면, 마적이나 의용군은 봉천군 한인 장교 '김국빈'(김정묵의 이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만주지역 거주 한인들의 사회, 경제적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1926년 11월경 장건상, 박승병, 조성환, 강구우 등이 남북만주 이주 200만 한인의 정치, 경제상 이익을 옹호하고, 비참한 상황에 빠진 이주민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 하나의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하자, 이에 공감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30년 1월 17일 봉천에서 육군대좌를 맡아 동북성 군법처의 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인들이 한인을 일본의 정탐으로 보는 태도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1930년 10월경 돈화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철교를 폭파하려 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한인 15명이 총살당했고, 많은 한인이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의 [[김동삼]], [[신숙 (1885년)|신숙]] 등은 간부회의를 통해 무고한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동삼성을 장악한 동북정무위원회 직속하에 가칭 '간민관리국'을 두고, 각 성, 현, 향, 촌에 분국을 두고자 하였다. 김정묵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김동삼, [[김규환 (1890년)|김규환]] 등 7인과 함께 '전만간민대표'의 명의로 청원서를 작성한 뒤 동북정무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장쉐량]]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면담을 거부했고, 1931년 1월 말 동북정무위원회는 거절을 통보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김정묵은 장학량이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에 분노하여 동북군계의 군직을 물러났다.
1930년 10월경 돈화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철교를 폭파하려 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한인 15명이 총살당했고, 많은 한인이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의 [[김동삼]], [[신숙 (1885년)|신숙]] 등은 간부회의를 통해 무고한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동삼성을 장악한 동북정무위원회 직속하에 가칭 '간민관리국'을 두고, 각 성, 현, 향, 촌에 분국을 두고자 하였다. 김정묵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김동삼, [[김규환 (1890년)|김규환]] 등 7인과 함께 '전만간민대표'의 명의로 청원서를 작성한 뒤 동북정무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장쉐량]]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면담을 거부했고, 1931년 1월 말 동북정무위원회는 거절을 통보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김정묵은 장학량이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에 분노하여 동북군계의 군직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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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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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분류: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분류:1888년 출생]]
[[분류:1944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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