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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
{{인용문2|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ISSN 1739-2705}} | {{인용문2|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ISSN 1739-2705}} | ||
{{전쟁 정보 | {{전쟁 정보 | ||
| | |분쟁 = 개성-문산-봉일천 전투 | ||
| | |전체 = [[서부지역 작전]] | ||
|그림 | |그림 = Battle of Gaeseong-Munsan.jpg | ||
| | |그림크기 = | ||
| | |설명 = | ||
|날짜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28일 | ||
| | |장소 = | ||
|결과 | |상태 = | ||
| | |결과 = 북한의 승리 | ||
|지휘관1 | |이유 = | ||
|병력1 | |교전국1 = 북한 | ||
|교전국2 = 대한민국<br>미국 | |||
|지휘관1 = 최광 소장<br>방호산 소장<br>최율석 대좌 | |||
|지휘관2 = 백선엽 대령 | |||
|병력2 | |군대1 = | ||
제1군단 | |||
* 제1보병사단 | |||
* 제6보병사단 | |||
* 제105전차여단 | |||
** 제203연대 | |||
|군대2 = 제1사단 | |||
| | |병력1= 약 2만 1000명<br>122mm 유탄포 24문<br>76mm 유탄포 72문<br>45mm 대전차포 168문<br>T-34 40대<br>자주포 32문<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작전』, p.172</ref> | ||
| | |병력2 = | ||
| | |사상자1 = | ||
| | |사상자2 = | ||
| | |지도 = | ||
|지도설명 = | |||
|기타 = | |||
}} | }} | ||
{{작성중}} | |||
<s>너무 분량이 많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가장 오래걸리고 정성(?)이 들어갈 것 같지만 위키니트의 저력을 보여주겠습니다.</s> | <s>너무 분량이 많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가장 오래걸리고 정성(?)이 들어갈 것 같지만 위키니트의 저력을 보여주겠습니다.</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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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 | === 한국군 === | ||
1950년 4월 22일 제1사단장에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작전지역을 돌아본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유사시 개성, 연백, 청단 등 주요 지구를 포기하는 이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 1950년 4월 22일 제1사단장에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작전지역을 돌아본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유사시 개성, 연백, 청단 등 주요 지구를 포기하는 이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제1사단은 6월 초까지 진지구축작업을 마치고 임진강 철교 폭파를 계획하였다. | ||
제1사단은 중대 전술훈련을 마치고 대대 전술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23일 비상경계가 해제된 장병들은 24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1/3이 휴가를 떠나고 남은 병력의 1/3은 외출 또는 외박 중이었다. 또한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사단장은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자리를 비운터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행 중이었다. 추가적으로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많은 고급지휘관들이 초대되어 전쟁 전 날 사단장대리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 등 많은 장교들이 외출한 상태였다. | 제1사단은 중대 전술훈련을 마치고 대대 전술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23일 비상경계가 해제된 장병들은 24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1/3이 휴가를 떠나고 남은 병력의 1/3은 외출 또는 외박 중이었다. 또한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사단장은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자리를 비운터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행 중이었다. 추가적으로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많은 고급지휘관들이 초대되어 전쟁 전 날 사단장대리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 등 많은 장교들이 외출한 상태였다. | ||
== 전투 == | == 전투 == | ||
6월 25일 04:00 북한의 포격이 시작되고 많은 병력과 전차들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경비부대가 분산하게 되자 제1사단장은 제13연대로 하여금 주진지를 점령하고 예비인 수색의 제11연대에게 임진강선에서의 방어를 준비시켰다. | |||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개성의 방어를 위해 제3대대를 예성강 서쪽 연백에, 제2대대를 개성 북쪽에 배치하였다. | |||
=== 청단-연백 전투 === | |||
예성강에서 청단 서쪽의 해안까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3대대의 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좌측 청단-대흥리에 제11중대, 중앙 대흥리-포운리에 제10중대, 우측 포운리에서 예성강에 제9중대를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토록 하였다. 대대본부는 연안에 위치하였다. | 예성강에서 청단 서쪽의 해안까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3대대의 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좌측 청단-대흥리에 제11중대, 중앙 대흥리-포운리에 제10중대, 우측 포운리에서 예성강에 제9중대를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토록 하였다. 대대본부는 연안에 위치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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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중대의 경우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04:30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중대장 김두열 대위가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이미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철수하였다. | 제9중대의 경우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04:30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중대장 김두열 대위가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이미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철수하였다. | ||
날이 밝자 중대장은 백천서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인민군이 내려왔으니 다같이 항복합시다"였다. 그 말을 들은 중대장은 "개소리 그만하라 빨갱이 새끼야"라고 했다 [[카더라]].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북한군이 백천경찰서를 점령하고 서장을 사칭해 건 전화였다. | 날이 밝자 중대장은 백천서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인민군이 내려왔으니 다같이 항복합시다"였다. 그 말을 들은 중대장은 "개소리 그만하라 빨갱이 새끼야"라고 했다 [[카더라]].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북한군이 백천경찰서를 점령하고 서장을 사칭해 건 전화였다. |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제9중대에게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예상강 교량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제9중대에게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예상강 교량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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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이미 북한군의 수중에 들은 후였다. 10:00 대대는 철수를 시작하였고, 13:00에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제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였으며 대대의 일부 병력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 제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이미 북한군의 수중에 들은 후였다. 10:00 대대는 철수를 시작하였고, 13:00에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제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였으며 대대의 일부 병력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 ||
=== 개성 전투 === | |||
제12연대 제2대대는 예성강 동안에서 제13연대가 있는 대원리까지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제5, 제6, 제7중대 순서로 배치된 상태였다. 04:00 포성에 잠을 깬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작전장교에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렸다. 이때 개성시내에서도 포탄이 낙하되어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 제12연대 제2대대는 예성강 동안에서 제13연대가 있는 대원리까지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제5, 제6, 제7중대 순서로 배치된 상태였다. 04:00 포성에 잠을 깬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작전장교에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렸다. 이때 개성시내에서도 포탄이 낙하되어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 ||
지역 내 주요 도로를 담당했던 제5중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분산되고 연락선이 차단되었다. | 지역 내 주요 도로를 담당했던 제5중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분산되고 연락선이 차단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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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대인 제1대대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 외박으로 일부만이 남고 거의 비어 있었는데, 25일 아침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제1대대의 잔여병력과 본부병력을 고남리에 배치하여 공격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멀지 않아 연대장이 연대참모를 집합시켜 철수준비를 지시하고 불필요한 물자는 파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연대장에게 군인가족을 빨리 남하시키자고 하자 <s>우리 가족이라도 살려요!!</s> 연대장은 "개성시민 피난 대책도 없는데 군인가족이라고 부족한 차량을 주냐"라고 대노했다고 한다. <s> 진정한 군인</s> | 예비대인 제1대대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 외박으로 일부만이 남고 거의 비어 있었는데, 25일 아침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제1대대의 잔여병력과 본부병력을 고남리에 배치하여 공격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멀지 않아 연대장이 연대참모를 집합시켜 철수준비를 지시하고 불필요한 물자는 파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연대장에게 군인가족을 빨리 남하시키자고 하자 <s>우리 가족이라도 살려요!!</s> 연대장은 "개성시민 피난 대책도 없는데 군인가족이라고 부족한 차량을 주냐"라고 대노했다고 한다. <s> 진정한 군인</s> | ||
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과거를 소개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본 제국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 때 귀국해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s>군대 두 번 다녀오기.</s> 이후 제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제12연대장으로 임관해 서부의 요충지인 개성의 경비를 맡았다. <s>국K-1들 | 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과거를 소개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본 제국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 때 귀국해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s>군대 두 번 다녀오기.</s> 이후 제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제12연대장으로 임관해 서부의 요충지인 개성의 경비를 맡았다. <s>국K-1들 보고있냐?</s> | ||
고남리 부근에서 제2대대의 철수병력과 만난 연대장은 제1, 제2대대장과 함께 사후대책을 논의하였고 개성시내에 있는 북한군을 역습하기로 결정했다.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제1중대와 특공대를 이끌고 10:00 개성시 남대문까지 전진하여 대열을 정비중인 북한군을 기습,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군의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17:00 영정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19:00 김포로 도하 퇴각하였다. | 고남리 부근에서 제2대대의 철수병력과 만난 연대장은 제1, 제2대대장과 함께 사후대책을 논의하였고 개성시내에 있는 북한군을 역습하기로 결정했다.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제1중대와 특공대를 이끌고 10:00 개성시 남대문까지 전진하여 대열을 정비중인 북한군을 기습,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군의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17:00 영정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19:00 김포로 도하 퇴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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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본부와 제1대대는 문산으로 후퇴하였다. | 연대본부와 제1대대는 문산으로 후퇴하였다. | ||
=== 고랑포 전투 === | |||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 ||
=== 문산 전투 === | |||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25일 11:00~15:00 사이에 문산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병력이 980명이던 제11연대는 임진강 철교 부근 마정리에 제1대대,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2대대, 지휘소가 설치된 적전리에 제3대대를 배치하였다. 연대가 배치되는 동안 외출했던 장병들이 귀대, 1,500명으로 병력이 증가되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 | |||
25일 | |||
= | |||
제12연대 일부가 철교를 통해 철수한 것을 확인한 최경록 대령은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였고 실행하였지만 불발로 인해 실패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리라 판단했던 북한군은 보유한 전차를 제11연대 방어선에 보내지 않았고, 이윽고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15연대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 파평산 전투 === | |||
제1사단의 우익을 담당한 제13연대(연대장 김익렬 대령)는 제1, 제2대대를 파평산에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다가오자 격퇴시키는 활약을 하였으나 26일에는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하였다. 이에 국군은 2.36인치 바주카를 사용하였으나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이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묶어 만든 폭탄을 안고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뛰어들자'''<ref>일본 제국군이 실행한 자폭전술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ref> 전차들은 기동을 멈추고 정지하였는데 하필이면 예광탄에 전차 옆 초가집이 불타올랐으며 전차에 옮겨 붙은 것을 목격한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 북한군 1개 연대가 제13연대를 공격하였으나 방어에 성공하였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 임진강 방어선 붕괴 === | |||
26일 국군 제1사단은 증원병력과 함께 방어선을 강화하고 기회를 보아 반격할 준비를 하였으나 우편의 제7사단의 철수로 우익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협공을 받을 상황에 놓였다. 또한 임진강 철교 폭파 저지에 성공한 북한군 제6사단이 철교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자 전차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국군 제11연대는 문산 남쪽으로 후퇴하였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그러나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자 제11연대는 역공을 가했으며 북한군을 임진강 북쪽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려한대로 제13연대가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백선엽 대령은 철수명령을 내리게 된다.<ref name=Gaeseong-Munsan></ref> | |||
== 결과 == | == 결과 == | ||
국군 제1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완벽히 노출된 김포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 국군 제1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완벽히 노출된 김포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 ||
{{한국전쟁}} | {{틀:한국전쟁}} | ||
{{각주}} | {{각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