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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갈리폴리 전역.png|섬네일|왼쪽|갈리폴리 반도의 위성사진]] | [[파일:갈리폴리 전역.png|섬네일|왼쪽|갈리폴리 반도의 위성사진]] | ||
{{전쟁 정보 | {{전쟁 정보 | ||
|그림= | |||
|설명= | |||
|그림 | |날짜=1915년 2월~1916년 1월 | ||
|장소=[[터키]] 갈리폴리 반도 및 인근 해역 | |||
| | |결과=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승리 | ||
|날짜 | |교전국1=[[영국]] | ||
| | |교전국2=[[오스만 투르크 제국]] | ||
|결과 | |병력1=본문 참조 | ||
| | |병력2=본문 참조 | ||
| | |사상자1=본문 참조 | ||
|사상자2=본문 참조 | |||
|지휘관1= | |||
|지휘관2= | |||
| | |||
|병력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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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배경== |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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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말, 유럽의 서부전선의 대치상태가 [[참호전]]의 양상을 띠면서 완전한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대군에 대처하는 독일의 병력은 전체 전력의 20% 미만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무장상태가 빈약한 정도를 넘어서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력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을 통하여서 부족한 무기를 공급받으려고 하였는데 문제는 러시아측이 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는 독일이 통제하는 [[발틱 해]]쪽 통로와 오스만 투르크가 통제중인 다다넬즈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 질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 1914년 말, 유럽의 서부전선의 대치상태가 [[참호전]]의 양상을 띠면서 완전한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대군에 대처하는 독일의 병력은 전체 전력의 20% 미만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무장상태가 빈약한 정도를 넘어서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력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을 통하여서 부족한 무기를 공급받으려고 하였는데 문제는 러시아측이 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는 독일이 통제하는 [[발틱 해]]쪽 통로와 오스만 투르크가 통제중인 다다넬즈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 질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 ||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해결보기 위하여 러시아를 제대로 무장시키고 독일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분산시키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러시아의 남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함께 계획중이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의 전쟁위원회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하여 봉쇄된 흑해의 러시아 항구로 향하는 항로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동맹국이지만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으로 가담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벌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유럽쪽 세력을 약화시킬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가 영국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해군측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주장하자 영국 전쟁위원회는 |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해결보기 위하여 러시아를 제대로 무장시키고 독일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분산시키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러시아의 남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함께 계획중이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의 전쟁위원회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하여 봉쇄된 흑해의 러시아 항구로 향하는 항로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동맹국이지만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으로 가담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벌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유럽쪽 세력을 약화시킬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가 영국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해군측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주장하자 영국 전쟁위원회는 {{날짜/출력|1915-1-13}} '''"[[이스탄불]]을 목표로 갈리폴리 반도를 포격하고 탈취하는 해군원정을 2월 말에 실시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 ||
==다다넬즈 전투== | ==다다넬즈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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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다넬즈 봉쇄전대 사령관인 카든 중장에게 작전계획 보고를 지시하였으며, 1915년 1월 11일 보고한 카든의 작계는 다음과 같은 4단계의 공격계획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다넬즈 봉쇄전대 사령관인 카든 중장에게 작전계획 보고를 지시하였으며, 1915년 1월 11일 보고한 카든의 작계는 다음과 같은 4단계의 공격계획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 ||
{{인용문2|1.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 파괴<br | {{인용문2|1.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 파괴</br> | ||
2. 네로우스까지의 기뢰원에 대한 소해와 소해를 제원하기 위한 적 방어진지 제압<br | 2. 네로우스까지의 기뢰원에 대한 소해와 소해를 제원하기 위한 적 방어진지 제압</br> | ||
3. 네로우스의 적 방어진지 제압<br | 3. 네로우스의 적 방어진지 제압</br> | ||
4 네로우스에 대한 소해와 해안 요새를 포격하면서 네로우스를통과하여 마르마라 해에 진출}} | 4 네로우스에 대한 소해와 해안 요새를 포격하면서 네로우스를통과하여 마르마라 해에 진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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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다넬즈 해협에서 퇴각하여 전진기지인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도착한 드 로벡 제독은 육군의 지상작전과 연계되지 않고는 다다넬즈에 대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이를 처칠이 수용하면서 연합국 해군의 2단계 작전은 실패로 종료되었다. | 한편 다다넬즈 해협에서 퇴각하여 전진기지인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도착한 드 로벡 제독은 육군의 지상작전과 연계되지 않고는 다다넬즈에 대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이를 처칠이 수용하면서 연합국 해군의 2단계 작전은 실패로 종료되었다. | ||
==갈리폴리 전투== | ==갈리폴리 전투== | ||
영국 육군상은 해군의 삽질을 보면서 육군을 동원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다넬즈 전투에서 해군이 삽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육군을 동원해서 지신들이 숟가락을 얹고 손쉽게 이스탄불까지 진격하여 투르크를 공중분해시킨다는 계획이었던 것. 이에 [[이집트]]에 주둔중이던 안작군을 다다넬즈 입구에 있는 그리스령 렘노스 섬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또한 영국 본토의 29사단을 파견하였고, 프랑스측에서 [[아프리카]]에 주둔중이던 1개 사단을 차출하여 파견하도록 협의했다. 이 결과 3월 말에는 8만명이 넘는 육군 전력이 렘로스 섬에 집결하게 된다. | 영국 육군상은 해군의 삽질을 보면서 육군을 동원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다넬즈 전투에서 해군이 삽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육군을 동원해서 지신들이 숟가락을 얹고 손쉽게 이스탄불까지 진격하여 투르크를 공중분해시킨다는 계획이었던 것. 이에 [[이집트]]에 주둔중이던 안작군을 다다넬즈 입구에 있는 그리스령 렘노스 섬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또한 영국 본토의 29사단을 파견하였고, 프랑스측에서 [[아프리카]]에 주둔중이던 1개 사단을 차출하여 파견하도록 협의했다. 이 결과 3월 말에는 8만명이 넘는 육군 전력이 렘로스 섬에 집결하게 된다. | ||
===작전계획 및 참가전력=== | ===작전계획 및 참가전력=== | ||
====연합군==== | ====연합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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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륙은 4월 25일 오전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200여척이 넘는 함정들이 상륙 전날인 24일 각각 상륙예정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 모든 상륙은 4월 25일 오전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200여척이 넘는 함정들이 상륙 전날인 24일 각각 상륙예정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 ||
[[파일:갈리폴리 상륙작전.png]]<br | [[파일:갈리폴리 상륙작전.png]]</br>갈리폴리 전투의 초기 부대 배치 현황 | ||
상륙지점으로 향하던 부대는 블레어 지역의 상륙양동을 위한 해군 보병(해병대) 1만명, 쿰 케일 지역에 견제상륙할 프랑스군 1개사단, 가베 테페 곶 부근에 상륙할 안작군 3만명, 그리고 주공인 헬레스 곶에 상륙할 영국 제29사단이 상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 상륙지점으로 향하던 부대는 블레어 지역의 상륙양동을 위한 해군 보병(해병대) 1만명, 쿰 케일 지역에 견제상륙할 프랑스군 1개사단, 가베 테페 곶 부근에 상륙할 안작군 3만명, 그리고 주공인 헬레스 곶에 상륙할 영국 제29사단이 상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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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이 전선에서 효과를 본 것은 [[잠수함]]에 의한 것들 뿐이었는데 4월부터 12월까지 몇 척 되지 않는 영국과 프랑스의 잠수함들이 다다넬즈 해협의 내로우스 포인트를 막고 있는 대잠용 철망을 뚫고 이스탄불 남쪽의 마르마라해까지 진입하여 해상 교통로를 괴롭히는 작전을 수행하기는 하였으나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만한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 그나마 이 전선에서 효과를 본 것은 [[잠수함]]에 의한 것들 뿐이었는데 4월부터 12월까지 몇 척 되지 않는 영국과 프랑스의 잠수함들이 다다넬즈 해협의 내로우스 포인트를 막고 있는 대잠용 철망을 뚫고 이스탄불 남쪽의 마르마라해까지 진입하여 해상 교통로를 괴롭히는 작전을 수행하기는 하였으나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만한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 ||
11월이 되자 연합군이 갈리폴리에서 이스탄불로 진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되었다. 여기에 50만명의 병력을 쏟아부었으며, 그 중 절반 가까운 25만명의 사상자만 발생시켰을 뿐, 4월에 상륙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 | 11월이 되자 연합군이 갈리폴리에서 이스탄불로 진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되었다. 여기에 50만명의 병력을 쏟아부었으며, 그 중 절반 가까운 25만명의 사상자만 발생시켰을 뿐, 4월에 상륙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 발짜국도 전진하지 못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고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사상자 숫자도 비슷하였지만 여전히 킬리드 바 고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 ||
결국 영국의 육군상 | 결국 영국의 육군상 킷쳐너는 하는 수 없이 갈리폴리 전역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영국군은 그 해 12월 10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한 달동안 단계별로 철수하면서 갈리폴리 전역의 전투가 종결되게 된다. | ||
==결과== |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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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영국의 사건]] | [[분류:영국의 사건]] | ||
[[분류:터키의 사건]] | [[분류:터키의 사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