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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대장 안량을 파견하여 백마를 포위하자, 조조는 [[장료]]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대장기<ref>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서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 휘개를 파성넷의 번역문에서 “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라고 해놨는데, 호삼성이 휘개는 융거(병거)의 덮개라고 주석에서 해석해 놔서 그렇다. 휘(麾)는 군진(軍陣)에서 사용하는 대장기이고, 개(蓋)는 그 대장기의 꼭대기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니, 즉, 휘개라 하면 높다란 대장기 꼭대기이다.</ref><ref> [http://cafefiles.naver.net/data24/2007/4/14/39/01_%BB%EF%B1%B9%C1%F6%BB%E7%C0%FC_%C8%D6%B0%B3.jpg 삼국지사전 (산동교육출판사)],[http://cafefiles.naver.net/data23/2007/4/14/172/02_%B0%ED%B4%EB%C7%D1%BE%EE%BB%E7%C0%FC_%C8%D6%B0%B3.jpg 고대한어사전 (상무인서관)]</ref>를 응시하더니 말에 채찍질을 해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조는 즉시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때 [[장료]], [[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이에 관우가 탄식하며 말하길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 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장료는 조조에게 이를 고하려 하다가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는데 결국 탄식하면서 "조공은 내가 섬기는 군주요, 관우는 형제와 같다." 라고 관우가 한 말을 고하니 조조는 관우가 천하의 의사라며 감탄했다.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조는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지만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 놓은 후 유비가 있던 원소군으로 홀연히 떠났다. 이후 유비 휘하에서 유비가 가는 곳마다 다시 조조군과 싸웠다. === 적벽대전에서 ===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정벌했는데, 유비는 번성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사람들을 태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판에서 유비군이 대파당하자 유비는 한진을 끼고 도주했는데 이때 관우의 배를 만나 구원을 받았고 함께 하구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유비가 조조를 칠때 종군했으며 유비와 주유가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길을 끊는 역할을 했다. 이때 관우는 단독으로 서황, 만총, 문빙, 악진, 이통을 상대하여야 했는데 서황은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으며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해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가 위에 넘어가고 남군일대 만이들과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이통이 자신의 군사를 나누어 관우와 싸우게 하고 자신은 일부의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을 뚫어 조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후 유비는 형남 4군(무릉,장사,영릉,계양 들을 공격하여 차지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 청니대치 === 이후 청니에서 악진과 대치했는데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얼마 후 대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량이 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 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 이는 형주 전체를 수복하기 위한 전면공격은 아니고 [[손권]]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형주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국지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익주 공략을 우선시하기 위해 형주 전선을 희생하는 도박을 건 것으로 보이며 결국 관우는 별 수 없이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 익양대치 ===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무렵 손권은 [[유비]]와의 형주 소유건을 두고 대치하여 여몽을 시켜 군을 이끌고 형주를 공격하게 했다, 장사와 계양은 군대를 이끌고 편지를 보내 협박하여 항복시켰으며 영릉은 태수 학보가 오군의 계략에 속아 항복했다. 이에 유비는 5만을 이끌고 직접 형주를 구원하고 익양에서 관우를 시켜 노숙과 대치했다. 노숙에게 회담을 제의하는데, 관우는 "형주땅은 유비가 노력해서 얻은 땅"이라며 항변했으나 노숙의 "그건 손권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반박하는 말에 밀려 커다란 성과는 보지 못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는데 자신에게 병사를 주면 관우를 공격하여 포로로 만들것이라고 자신하고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관우의 도하지점으로 이동했고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한편 노숙 역시 진영을 만들면서 관우를 대비했는데 이것을 노숙제라고 불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던 도중 조조의 한중 공략 소식이 알려지고 유비는 손권과 협상해 상수를 경계로 남군, 무릉, 영릉을 자신의 소유로 하고 나머지 는 손권의 소유로 하자고 하면서 대치가 종료된다. === 형주 통치 === 합비전투, 유수구 전투 이후 손권은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라고 진언하는 여몽의 계책을 따랐다, 여몽과 손권은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이후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했다. 한편 관우 역시 손권을 믿지 않았기에 봉수대를 쌓고 방비하여 오나라의 침공을 대비하였다. 번성을 침공할때도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이는 여몽이 관우가 번성을 토벌할때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 형주 공방전 ===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이 수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관우는 배를 이용해 화살을 쏘면서 위군을 격렬하게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살아남은 7군 잔병 3만을 잡아 포로로 삼았으며 사령관 우금은 항복시키고 방덕의 목을 베었다. 위나라에선 난을 일으키는 자들이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다, 관우의 위엄은 화하에 떨쳤고 번성과 양양을 포위했다. 이후 서황의 조인 구원도 실패했다. 조조는 천도까지 논했으나 사마의, 장제가'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 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조는 이에 따랐으며 본인이 직접 출병했다. 한편 [[서황]]은 조인을 구원하기 위해 신병들만 있을때는 싸우지 않고 기다리다가 12영의 군사를 모아 사총에서 관우의 보기 5천명을 격파하고 10겹의 녹각을 격파했으며 성안에서 만총이 협공하니 관우의 번성포위는 풀린다. 이에 관우는 후퇴해 면수를 수군으로 굳게 통제하고 양양을 단단하게 포위하여 양양과 북쪽의 위군 간의 연락이 끊긴다. 한편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었고 장군 사인은 공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중에서도 미방은 관우와 사이가 틀어졌고 남군태수로 있을때 남군성에 불이나 많은 물자와 기물을 태운 죄로 질책을 받아 두려워하며 손권과 몰래 내통하였다. 이후 여몽이 잠깐 기만책으로 아직 큰 공적이 없던 육손과 자리를 교대하고 이에 육손은 좋은말로 관우를 꼬고 협력할 것을 약속하니 관우는 육손을 경시하여 수비병을 뽑아 지원군으로 보내고 7군을 잡아들여 식량이 부족해지자 상수의 관문인 상관의 군량고를 털었는데 여몽이 이를 기회로 형주로 침공했으나 내통이 있었으니 척후나 봉화가 발동되지 않았다, 우번이 공안을 굳게 지키려고 하고 오의 항복사자를 만나지도 않으려던 사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형주에 우리와 내통한 내응자가 있으며 포위되어 굳게 지키려고 해도 살길이 없을것라고 언질하자 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항복했다, 남군에서는 미방 혼자만 성문을 열고 항복했는데 갑작스러운 내응에 남군에서 여몽에게 반격을 하려고 했으나 우번의 충고를 들은 여몽이 신속하게 남군을 제압하고 남군의 민심을 통치를 후하게 베풀어서 무마시켰다. 관우는 이렇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을 임저에서 참수했다, 관우가 격파된 이후에도 육손은 형주를 돌아다니면서 형주를 진압해야 했고 형주에서 저항이 있거나 촉으로 탈출한 군원들도 있었으며 무릉만이들은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였다. === 사후 === 260년에 촉한에서 장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당나라 시절 무성왕묘 72인에 배향되었으며 송나라 시절 관우를 왕이나 진군에 봉함으로서 점차 백성들 사이에 관우신앙이 퍼지게 되었다. 이후 관우 신앙이 퍼지고 각종 민담이나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으로 관우 신앙은 더욱 강해져 명나라 시절엔 마침내 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오늘날 관우 신앙은 관성제군 신앙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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