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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br /><br />생각한 것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는데도 정두경의 상소를 보건대, (중략) ‘신의 고조 정순붕(鄭順朋)은 을사년(1545) 의옥(議獄)의 잘못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당초 신들은 단지 정현의 이름만을 보았고 정순붕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서경 단자 가운데 이름을 쓴 대수(代數)가 조금 가까운 정현은 버려두고 대수가 조금 멀어 원래 단자에 이름을 쓰지 않은 정순붕을 제기하였으니, 도리어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후략)|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0_05A_29A_00130_2009_025_XML 인조 10년 임신(1632) 5월 29일(병인) 맑음]}} {{인용문2|헌부가 직강 정두경(鄭斗卿)을 파직시키자고 논하였다.<br /><br />두경은 문장에는 능하지만 사정에 어둡고 성격이 또 오활하고 엉성하였다. 진위(振威)의 유생들이 그 고을의 향교가 지은 지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장차 쓰러질 지경이라며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자 하므로, 두경이 당시 경기 도사로서 심사를 나갔는데, 술이 하도 취하여 소리를 지르고 말이 너무 조리가 없었다. 유생들이 모두<br /><br />"도사(都事)가 선성(先聖)을 능멸하여 심지어는 ‘집이 무너지면 산 사람도 압사를 면키 어려운데, 위판(位版)이야 깔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br /><br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탄핵을 받은 것이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302027_001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2월 27일 무신 1번째 기사]}} {{인용문2|감시(監試) 이소(二所)의 거자(擧子)가 고관(考官) 정두경(鄭斗卿)을 축출하였다. 사관(四館)에 명하여 유학(幼學) 강인(姜戭) 【 강대수(姜大遂)의 아들이다.】 ·심창(沈敞) 【 심동귀(沈東龜)의 아들이다.】 ·김하영(金廈楹)·조정항(曺挺恒)·조시망(曺時望)·박빈(朴賓)·박수행(朴粹行) 등 수창자 7명을 적발하여 모두 장형으로 다스리고 충군하였다.<br /><br />이에 앞서 두경이 망발로 인하여 탄핵을 입었는데, 일대(一隊)의 의논은 엄하게 따져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었다. 고관이 되자 강인 등이 창언(倡言)하기를,<br /><br />"선성(先聖)을 모욕한 자가 어떻게 감히 많은 선비의 시험을 주관할 수 있는가?"<br /><br />하고, 서로 인솔하여 축출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파장(罷場)을 의논토록 명하였는데,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7009_001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7월 9일 신해 1번째 기사]}} {{인용문2|유학(幼學) 민도(閔燾) 등이 상소하기를,<br /><br />“삼가 아룁니다. (중략) 불행히 신들이 한 시장에 함께 들어가 그 변고를 목격하고 섞여서 파장의 처분을 받았고 도리어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부득이 밝으신 성상께 우러러 아뢰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자초지종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br /><br />당일에 제목을 내건 뒤에 거자가 각기 자리를 정하고 앉아 막 글의 초안을 잡으려 할 즈음 갑자기 서너 명이 한 곳에 머리를 모으고 무엇을 하는 듯하였습니다. 신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범범하게 보아 넘겼습니다. 조금 있다가 봉명지(封名紙)를 잘라 통문(通文)을 써 내고는 제목을 내건 판에 내걸었는데 시관 정두경(鄭斗卿)의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한 번 발생하니 온 시장이 떠들썩하였는데 (중략) 정두경은 비록 협실(挾室)로 피해 들어갔습니다만 달려가고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상황은 여전히 조용해지지 않았습니다. 시관이 입계하여 (중략) 시끄러운 분위기가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정두경이 다시 자리에 나와 앉았는데 - 5, 6자 원문 빠짐 - 큰 소리로 사방에서 모여들어 따라 올라가 시관의 자리를 꽉 채우고서 때리고 욕하는 것이 정두경에게까지 미치니 정두경이 - 5, 6자 원문 빠짐 - 소란을 일으킨 무리가 북을 치며 막고 길을 막아 터 주지 않으므로 정두경이 나아갔지만 나가지 못하고 물러나 협실로 돌아갔는데 끝내 면치 못하였고 밤중을 틈타 나갔으니 그 기상(氣像)이 참담하여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후략)|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13A_0023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13일(을묘) 맑음]}} {{인용문2|헌납 김익희(金益熙)가 와서 아뢰기를,<br /><br />“나라에서 시장을 설치하여 선비를 시험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하여 조금이라도 구차한 점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사습이 불선하여 과거에서 소란을 일으켜 시관을 몰아내고 많은 선비를 협박하여 마침내 파장하는 지경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이것은 전고에 없었던 큰 변고입니다. 선동하여 소란을 주동한 자는 패악하고 망녕된 십수 명에 불과한데 이로 인해 10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선비를 모두 정거시키는 것은 갑에 대한 분노를 을에게 옮기고 목이 멜까 걱정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중략) 파방하도록 속히 명하소서.”<br /><br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17A_0016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17일(기미) 맑음]}} {{인용문2|행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br /><br />“(중략) 지난번에 헌납 김익희(金益熙)가 죄는 거자에게 있으니 거자만 벌하라는 등의 말로 피혐하였는데 신이 처치할 때에 또한 시관으로서 진정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었다는 것으로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으니<ref>보통 실록 등의 기록에서의 ‘출사’는 ‘出仕’로 표기하며, 그 뜻은 출근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출사’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승정원일기의 원문에는 ‘[http://sjw.history.go.kr/id/SJW-A14070200-02000 亦以試官無可鎭定之策請出]’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 마지막에 ‘請出’이라고 되어 있으므로,(그 앞의 구절은 ‘시관으로서 진정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출사는 내쫓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자로 따지자면,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다는 뜻의 ‘出社’가 될 것이다.[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59487&supid{{=}}kku000332157 #]{{ㅊ|근데 이렇게 써도, ‘회사에 출근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한다(...)}}</ref> 지금 처음의 견해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도록 명하소서.”<br /><br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20A_0019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0일(임술) 맑음]}} {{인용문2|정언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br /><br />“(중략) 시관이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고 겁내어 금하고 억제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감시관(監試官)은 그 직임이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좌시하고 태연스러이 괴이하게 여기지도 않고서 대담하게 말 한 마디 하여 적발해서 규정(糾正)하지 못하고 정두경(鄭斗卿)이 피해 나갈 즈음에야 황망(慌忙)히 뜰에 내려와 직접 자신이 호송하며 소란을 일으킨 무리와 서로 섞여 허둥지둥 달아났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들 경악하였습니다. 신이 시관에 대해서는 모두 추고할 것을 청하고 감시관은 파직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석상에서 발언하니 장관(長官)이 여러 차례 수작(酬酌)하여 - 6, 7자 원문 빠짐 - 또 날짜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중략)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반복해서 상의하니, (중략) 석상에서 무릇 네 차례 발언하였습니다만 한 번도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코 뻔뻔스럽게 외람되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br /><br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20A_0021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0일(임술) 맑음]}} {{인용문2|행 대사간 김경징이 아뢰기를,<br /><br />“신이 정언 이시매가 피혐한 말을 보니 그중에 시관에 대해 논계한 일은 어제 이미 이로 인해 인피(引避)하였으니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중략) 네 차례 발론(發論)하여 한 번도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데에 이르러 사설(辭說)이 낭자하여 현저히 지적하여 나무라기를 그치지 않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br /><br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21A_0011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인용문2|한흥일이 아뢰기를,<br /><br />“헌납 김익희(金益熙), 대사간 김경징(金慶徵), 정언 이시매(李時楳)가, 재차 아뢰는 것은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이므로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br /><br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21A_0022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인용문2|대사헌 김덕함(金德諴)이 와서 아뢰기를,<br /><br />“(중략) 이번 파장의 변고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로서 소란을 일으켰을 때에 진정시키고 금하고 억제하지 못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거자에게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 추론(追論)하는 것은 다만 거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뿐입니다. (중략) 자신이 언책(言責)에 있는 자로서 일에 따라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또한 소견이 있으니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대사간 김경징, 헌납 김익희, 정언 이시매에 대해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br /><br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7A_21A_00080_2013_034_XML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인용문2|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5008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5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ref>해당 기록은 인조 14년 5월의 것으로, 과거장 난동 사건의 날짜보다 시기가 앞선다. 그러나 후술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윤황을 대사간으로 삼은 때는 (승정원일기에서 기록되어 있는) 김경징이 체직을 요청한 때로부터 며칠 후에 해당한다. 따라서 김경징이 대사간의 자리에서 체직된 때는, 위에 언급한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행적 이후임을 알 수 있다.</ref> {{인용문2|김경징(金慶徵)을 도승지로, (중략)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중략) 삼았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7024_002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7월 24일 병인 2번째 기사]}}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