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윤방을 공격하다 === 1636년(인조 14년) 2월, 후금(이하 청)으로부터 용골대, 마부대를 위시한 사절단이 들어왔다. 그들이 온 목적은 조선과 군신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청을 황제국으로 받들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자신들의 문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신단은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인조는 대신들과 청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윤방은 "적이 쳐들어 올 게 분명하니, 미리 강도(강화도)로 피신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김경징은 “지금 중요한 건 방어하는 것이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은 이미 그들과 한 차례 [[정묘호란|전쟁]]을 하였다. 청나라의 위협은 조선에겐 이미 현실이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든 청에 대해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었고, 그러한 정서는 자연히 조정의 여론을 [[척화파|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청과의 결사항전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백성들을 내버려두고 강도로 피신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8020_002 대사간 윤황(尹煌)이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리기를, "... 혹 전하께서 한번 강도로 들어가신 후에 오랑캐의 병사가 국내에 가득하여 백만 생령들이 모두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면 전하께서는 그때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 전하께서 항시 강도로 들어가 보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었으므로 군신들의 해태한 마음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평양(平壤)에 진주하는 것이 최선인 듯합니다. ... 강도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평양을 보전하고 진주하여 친정(親征)할 계책을 세우신다면 전하의 신하들 중 누가 감히 움츠리고 물러가 살기를 도모할 마음을 갖겠습니까. ...]</ref> “'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그 호칭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이도 있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4026_002 간원이 아뢰기를, "... 지경연 최명길은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금한(金汗)을 일러 ‘청국 한(淸國汗)’이라고 하여, 정식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명길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깊지 못합니까. 저들이 청국으로 호칭하는 것은 실로 범연히 호칭한 것이 아닙니다. ... 만일 그의 말이 세상에 행하여지게 된다면 국가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 관직을 삭탈하소서." ...]</ref> 마침내는 “후금에 사절단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왔고,[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8A_02A_00140_2013_035_XML #]<ref>이성구가 “추신사를 보낼 때가 가까워졌다.”고 말하자, 이홍주가 “보내지 말자.”고 반응하고,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홍주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 그래서 1636년(인조 14년)에는 추신사(秋信使)를 보내는 것을 두고 지지부진하게 논쟁이 벌어지다, 12월 4일에야 사절단이 출발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12A_04A_00030_2013_036_XML #]<ref>추신사는 그 이름 그대로 가을에 보내는 사절단이다. 보통 7월 ~ 8월, 늦어도 10월 중에 보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7_06A_18A_00080_2009_017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8_07A_18A_00070_2009_020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09_08A_03A_00040_2009_023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0_08A_28A_00070_2009_026_XML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211012_001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308008_002 #]</ref><ref>1633년의 추신사는 언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추가 바람.</ref><ref>1634년에도 추신사가 언제 갔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실록에 ‘후금이 추신사를 억류하고 선전관 편으로 답서를 보냈다.’는 11월 12일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1634년에 추신사가 간 때는, 늦어도 10월 초순~중순일 것이다.</ref>{{ㅊ|[[병자호란]] D-4}}<ref>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대는 1636년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에서 침공을 인지한 때는 12월 9일이었다.</ref> 조정 신료들 대다수가 이와 같은 태도를 취했는데, 그들이 바로 ‘척화파’였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거나 신중론을 펼치는 이들은 이귀, 최명길, 장유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 ‘주화파’의 의견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공공연히 척화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9019_002 #]<ref>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명길이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오달제 등의 척화파들이 공격하였고, 이에 최명길은 자리를 떠났다.</ref> 척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담론을 바탕으로 명분의 우위를 점함으로써,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였다.{{ㅊ|후금 개새끼 해봐}} 김경징의 발언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윤방을 비방했다. 그리하여 이 일이 있고 약 한달 후, 윤방은 인조에게 체직<ref>遞職. 관직이 바뀌는 것. 임기가 만료되거나 상피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경우 체직되었다.</ref>을 청했다. 아들 혹은 조카뻘인 인물(김경징)<ref name="윤방의_나이">윤방은 김경징보다 26살 더 많고, 김류보다는 8살이 더 많다. 한 마디로, 윤방은 김경징에게 큰아버지뻘이었다.</ref>이 면박을 주지 않나, 여러 사람들이 조리돌림을 하지 않나, 대단히 속이 상했을 것이다. {{인용문2|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서달(西㺚)의 대장 47인, 차장 30인과 종호(從胡) 98인을 거느리고 나왔다. 용골대가 의주 부윤에게 말하기를,<br /><br />"우리 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이에 서달의 여러 왕자들이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귀국과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차인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들도 함께 온 것이다."<br /><br />하였는데, 의주 부윤 이준(李浚)이 조정에 계문하였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16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16일 신묘 1번째 기사]}} {{인용문2|(전략) 장령 홍익한(洪翼漢)이 상소하기를,<br /><br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br /><br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21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1번째 기사]}} {{인용문2|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익합□(溺哈□) 등 세 장수가 거느리고 온 종호(從胡) 196명 가운데 서달(西㺚)이 144명이고 종호가 52명인데, 서울에 들어왔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4_02A_23A_00030_2013_033_XML 인조 14년 병자(1636) 2월 23일(무술) 맑음]}} {{인용문2|금의 차인 용골대 등이 서울에 들어왔다. (중략) 용호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br /><br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팔고산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br /><br />하고,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br /><br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br /><br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br /><br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br /><br />하였다.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24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4일 기해 1번째 기사]}} {{인용문2|(전략) 비국에서 명백하게 처치하고 따로 답서(答書)를 작성하기를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용호 등이 그들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해 성이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중략) 그들이 성을 나갈 때에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26_002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6일 신축 2번째 기사]}} {{인용문2|대신과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br /><br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도에 들어가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br /><br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br /><br />"오늘날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란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br /><br />하였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2029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9일 갑진 1번째 기사]}} {{인용문2|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br /><br />"강도(江都)를 나라의 보장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조정의 계획이 결정되었고 사민(士民)들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니,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매번 묘당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계책이 마땅히 묘사(廟社)와 군부(君父)를 만전한 지역에 둔 다음에야 싸우거나 지키거나 함에 있어 군색한 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침 등대(登對)하는 기회에 망령되이 이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말을 조리 있게 못해 미처 뜻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갑자기 곁에 있던 신료에게 논척당하여 【 윤방이 탑전에서 강도로 이피(移避)하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면전에서 논척하였다.】 감히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일어나 공격을 하였는데,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윤황(尹煌)이 상소한 말이다.】 그러니 사리상 그날로 사퇴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신으로 있는 처지에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발끈하여 떠나지 못하고 조당(朝堂)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오늘날까지 있어 왔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해 주소서."<br /><br />하니, 답하기를,<br /><br />"그들의 상식에 벗어난 말은 마음속에 품어 둘 필요가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br /><br />하였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3022_00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3월 22일 정묘 1번째 기사]}}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