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 운동

等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은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인권운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상남도 진주에서 비롯되어 가장 오랫동안 전개된 인권운동이자 사회운동이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표면적으로는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존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 불만을 품은 백정계급에 있었던 사람들이 1923년 4월 25일 강상호의 주도하에 형평사를 조직한 것이 그 시점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진주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서다가는 언제 멍석말이를 당하고 골로 갈 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심지어 일제가 들어선 뒤에도 그랬다. 법적으로는 평등했지만 호적이라 할 민적(民籍)에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이러한 백정 차별은 전국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서도 백정은 호적에 표시된 천민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백정은 계속 백정이었다. 이러한 점은 진주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당시 보수적인 진주에도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겨났다. 1905년 설립된 진주 교회가 그 시초였는데 이 교회를 개척했던 커틀 선교사는 어렵게 어렵게 끌어들인 소중한 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에 ‘대략난감’해지고 말았다. 즉 예수는 믿겠는데 백정은 인간이 아니니 함께 죽어도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는 신자들의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의 남녀유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멀쩡한 사람을 두고 사람이 아니니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우기는 데에는 서양 선교사라고 하여도 딱히 대책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정리됐는데 이후 1909년 부임한 리알 선교사는 꽤 괄괄하고 원칙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는 백정들과 일반인(?)들과의 동석 예배를 추진한다.

1909년 5월 둘째 주일, 마침내 15명 백정들이 쭈뼛쭈뼛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교회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수백명 교인 중 리알 선교사를 따르던 30여 명을 제외학도는 "백정과는 함께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면서 몽땅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물론 리알 선교사도 보통내기는아니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면서 뚝심있게 버텼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억지에 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리알 선교사는 49일간의 분쟁 끝에 결국 종전처럼 따로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진주 지역에 적잖은 파문을 던진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를 부르짖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일반인(?)들이고 백정들이고 가슴 속에 의문 한 자락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 없이 진주냉면 위 육전은 무엇으로 만들며 진주비빔밥 고명의 하이라이트인 육회는 뭘로 마련한단 말인가. 백정들도 자각했고 사람들도 여태까지의 생각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사람들의 몸에 새긴 습관의 벽이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발단[편집 | 원본 편집]

3.1 운동이 끝난 직후 진주에서 백정들을 자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서 개를 잡으라고 명령하였으나 백정이 잡지 못하겠다고 한 것. 그때까지도 백정을 사람취급하지 않던 그들은 백정을 집단구타한 뒤 다시 개를 잡으라고 하였으나 여전히 백정은 고개를 저었고 이에 몽둥이찜질까지 퍼부어진 끝에 그 백정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부라쿠민이라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천민 집단을 보유한 일본 경찰은 백정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다.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살인이 성립하지 않고,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수사를 할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당연히 백정을 죽인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

이 이상한 사건의 전말을 혀를 차며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양반 출신인 강상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주 지역에서 벌어진 3.1항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8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던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는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 등과 더불어 1923년 4월 24일 형평사(衡平社)를 설립, 백정 해방 운동을 주창하고 나섰다. 강상호는 백정이 아닌 양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여 형평사의 초대 사장이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형평사 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 운동"으로 평가된다. 이후 형평사는 분열과 화해를 거듭하며 수그러들었지만 한 번 인식을 새롭게 한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이고, 전국에서 백정들의 세상은 그 이전과 달랐고 달라지고 있었고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30년대 초반 조선 총독부는 백정들의 호적에 기입했던 "도한"(屠漢)이라는 글자를 빼기로 결정했고 붉은 점 등을 찍어 백정이라는 표식을 남기는 제도도 없앴다. 최소한 법적이나 행정적으로 백정에 대한 차별은 사라져 갔다.

의의와 한계[편집 | 원본 편집]

형평사 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의 동란으로 전국이 완전이 개발살 난 뒤에야 가능해졌다. 이 형평사 운동만으로는 실질적인 신분 철폐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거기에 이에 대한 반동도 상당하여 농민 계층에서 이를 거부하는 일도 많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운동이 스스로를 자각하여 신분제 철폐운동을 하였던 의미는 사라지 않으며, 이 형평사 운동은 신분제 철폐와 인권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물꼬를 튼 운동이라 평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이 운동에 가장 방해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일제의 탄압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이 운동이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지도자였던 강상호를 끊임없이 감시하였으며, 이 운동이 다른 사회주의권 운동과 연계가 될 때 그 탄압이 극에 달하였었다. 이런 이유로 형평사 운동은 내부 분열을 겪기도 하는 등의 질곡을 겪었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존의 사회 변혁 운동성의 동력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추어 진주문화원 옆 자리[1]에 형평운동 기념탑이 세워졌다.
  • 2015~16년 진주시의 진주대첩기념광장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형평운동 기념탑의 이전을 추진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각주

  1. 진주성 촉석문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