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이호석

인천 유나이티드 FC No. 30

이호석 (李鎬碩 / Lee Ho-seok)

등록번호

20140125

생년월일

1991년 5월 2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광양시

포지션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주발

오른발

신체조건

173cm, 65kg

학력

광양제철남초 - 광양제철중 - 광양제철고 - 동국대

프로입단

2014년 충주 험멜

소속팀

충주 험멜 (2014) 1

경남 FC (2014~2016) 대전 시티즌 (2017)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8~ ) 상주 상무 (2018~2019, 군 복무)

국가대표

U-14 0경기

별명

츤데레, 스피드 레이서

개요[원본 편집]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현재 인천 유나이티드 FC 소속이다.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이며, 윙어나 세컨드 스트라이커, 심지어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까지 소화한 경험이 있다.

클럽 경력[원본 편집]

유소년 시절[원본 편집]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난 이호석은 자연스럽게 전남 드래곤즈 유스팀인 광양제철남초, 광양제철중, 광양제철고 축구부를 거치면서 축구를 배웠다.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컵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주목받았고, 맨유 이적설이 잠시 생기기도 할 정도였다. 광양제철고 시절 그는 지동원, 이종호, 김영욱, 이중권 등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며 뛰어난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그를 웨인 루니같은 느낌을 준다고 표현한 기사도 나올 정도였다.

광양제철고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때는 축구에 회의감을 느끼며 방황하기도 했지만, 점차 축구부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중요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대학교 4학년이 된 뒤에는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동국대에서 이호석은 미드필더, 윙어, 스트라이커 등 다양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며 신임을 얻었고, 이 활약을 바탕으로 덴소컵에 참여하여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경남 FC[원본 편집]

2014년 드래프트에서 충주 험멜에 지목됐지만, 경남에서 충주로 임대된 뒤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정성민의 임대를 연장하는 조건으로 트레이드되어 바로 경남에 합류했다. 첫 시즌부터 신인치고는 많은 출전 기회를 받았지만, 어울리는 포지션을 찾지 못해서 고전했다. 공격 진영을 주로 소화하던 선수임에도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까지 커버하는 등 온갖 역할을 부여받았던 시기였다.

팀이 강등당한 후에도 잔류해서 본격적으로 공격 진영에 기용되었다. 특유의 침투 능력과 센스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이호석은 2016년 김종부 감독을 만나면서 마침내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김종부 감독은 이호석이 뛰어난 축구 지능을 지닌 선수라고 칭찬하면서 전술의 중심에 뒀고, 그 기대에 부응하면서 크리스티안 더널라케와 함께 경남 공격을 이끌었다. 고양 자이크로 FC를 상대로는 한 경기에서 혼자 1득점 4도움을 쓸어담는 진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K리그 출범 이래 단일 경기에서 한 선수가 가장 많은 도움을 기록한 사례이다. 최종적으로 2016 시즌 리그에서 9득점 10도움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K리그 챌린지 도움왕 타이틀도 얻었다.

대전 시티즌[원본 편집]

FA 대상자가 된 이호석은 경남에서 수석코치로 지낸 경험이 있는 이영익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전 이적을 선택했다. 이적 이후 장원석과 함께 팀의 부주장으로 선임되었고, 그만큼 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대전 시절의 활약은 팬들 사이에서 상당히 호불호가 갈렸으며, 양날의 검이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시즌 초반에는 3경기 연속 득점을 성공시키면서 화려하게 날아올랐지만, 점점 다른 공격진과의 호흡이 어긋나면서 페이스가 떨어졌다. 이에 윙어 대신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를 바꿔서 출전하기도 했지만, 큰 반전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경남 시절 함께 합을 맞추던 크리스찬과의 조합이 대전에서는 잘 살아나지 않았고 그러면서 본인도 초조해하는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호석의 기술이나 센스 자체는 여전히 통했고 덕분에 공격포인트는 꽤 기록하긴 했다. 반면 경기가 안 풀리면 거친 플레이를 보여주거나 경기력이 저하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다. 최종적으로는 리그에서 27경기 5득점 6도움을 기록했는데, 팀 내 득점 2위 및 도움 1위에 오르긴 했으나 팬들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인천 유나이티드 FC[원본 편집]

4.1. 2018년[원본 편집]

2018 시즌 시작을 앞두고 인천의 풀백 박명수와 트레이드되었다. 2부리그에서는 여하튼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였기에 슬슬 1부리그에 도전할만하다는 평을 받았고, 인천 팬들도 멀티 플레이어면서 그간 좋은 기록을 남긴 이호석에게 나름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활동량, 체력, 압박을 중시하는 인천의 팀 컬러에 잘 적응할지 걱정하는 의견도 종종 제시됐다.

프리시즌에는 꽤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고 종종 공격포인트도 기록했으나, 1군 경쟁에서 밀리며 2군으로 분류됐다. 시즌 초반부터 문선민이 2선에서 맹활약하고, 콰베나 아피아-쿠비, 김진야, 김보섭 등에게도 기회가 돌아가면서 이호석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2군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다가, 인천에 온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상주 상무 입대가 확정되면서 팀을 잠시 떠났다. 인천에서는 출전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입대하는 바람에 팬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사실 비판보다는 아예 누군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더 많을 정도로 존재감이 옅었다.

4.2. 상주 상무 입대[원본 편집]

2018년 5월 28일에 인천 동료 송시우, 박용지와 함께 상주 상무에 합류했다. 합류한 뒤 FA컵에서 연장전 진행 도중 교체로 투입되어 2018 시즌 첫 출전을 기록했고, 꽤 빠르게 기회를 얻었으니 이후 팀에서도 종종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있었다. 그러나 상주에서도 역시 명단에 들어가지 못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상주에는 인천에서 같이 온 송시우, 박용지부터 시작해서 심동운, 김민우 등 막강한 경쟁자가 워낙 많았으니 경쟁 자체가 쉽지 않았다.

2019 시즌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종종 서브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전역 전까지도 끝내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서 2년간 K리그 출전은 0에 머물렀다. 송시우, 박용지가 주전 멤버로 뛴 점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대목. 이호석은 장은규와 더불어 유이하게 해당 기수에서 리그에 출전하지 못한 상주 선수였다.

4.3. 2020년[원본 편집]

2020년 1월에 송시우, 박용지와 함께 전역해서 인천 복귀가 예정됐지만, 팬들에게는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지역지 기사에서는 송시우, 박용지의 전역 소식은 다루면서 이호석의 이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등 존재 자체가 잊혀지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팬들 사이에서는 전역 후 바로 이적 내지는 방출을 추진하리라는 예상도 많았지만 구단 관계자가 이호석의 계약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언급했고, 이후 송시우, 안진범과 함께 전지훈련에 합류하며 생존 신고를 했다. 합류 직후 서울 이랜드 FC와 치른 연습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등장하기도 했다.2 

태국 전지훈련이 종료된 후 국내로 돌아왔지만, 남해 전지훈련에는 2군으로 분류되어 동행하지 못했다. 신인급 선수를 제외하면 김동민, 이호석 둘만이 동행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여전히 전망은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개인 훈련을 열심히 하며 절치부심한 그는 3월부터 1군 훈련에 다시 등장했고, 시즌 시작 직전 연습경기에서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었다.

시즌 초에는 역시 명단에서 보기 힘들었으나 4라운드 포항 스틸러스 전에서 서브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후반에 교체로 투입되면서 약 2년 반만에 K리그 출전을 기록했다. 이 날 인천은 기존보다 공격적인 포메이션인 3-4-3을 꺼내들었는데, 공격 자원이 부족해서 이호석을 선택한 것. 비록 워낙 짧은 시간이어서 무언가 보여주기는 어려웠지만, 여전히 그가 팀의 플랜에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출전이었다.

데뷔전 이후로는 다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고, 지언학이 부상에서 돌아오면서 더더욱 애매해졌다. 그러나 송시우의 부진이 겹치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 과정에서 이호석 역시 후보군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결국 9라운드 FC 서울 원정에서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로 선발 출전하며 인천 이적 후 첫 선발 출전을 기록했다.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꽤나 센스있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지만, 몸 상태가 완전히 올라오지 않는 바람에 후반 초반 근육 경련으로 교체됐다. 이 경기에서 자신의 경쟁력은 입증했으나 체력 문제를 노출한데다 임완섭 감독이 사퇴하면서 다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임중용 대행 체제에서는 안진범이 우선적으로 기용되면서 다시 밀려난 분위기.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어린 시절 U-14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경력이 있지만, 공식전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이후 대학 선발 팀에서 이름을 보이기도 했다.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2부리그 시절 많은 팬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비판도 받았던 선수. 한국의 아델 타랍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양날의 검이라는 얘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2선 자원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과 스피드가 훌륭하며, 시야도 넓고 패스 센스도 출중하다. 과감한 침투와 빠른 슈팅 역시 상대 수비를 괴롭히는 주된 무기였다. 패널티 박스 근처에서의 선택이 좋아 찬스도 많이 만들었고 역습 시에는 스피드를 활용해 직접 공격을 전개하는 능력도 선보였다. 축구 지능 자체도 꽤나 뛰어나서 본인이 공을 잡은 상황에서는 영리한 플레이로 허를 찌르는 장면도 있었다. 개인 능력으로는 2부에서 최상급 기량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도 바라볼만한 자원이라는 평이 전성기 시절 자주 나온 이야기였다.

반면, 멘탈이 자주 흔들려서 경기 중에도 기복을 보여줬고 경기가 풀리지 않기 시작하면 몹시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말리기 시작하면 급격히 판단력이 떨어지고 본인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심해져서 템포를 잡아먹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탐욕성 플레이도 나왔다. 피지컬 조건이 썩 좋지 않은지라 상대의 압박을 벗어나야 제 몫을 할 수 있는데, 대전에서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면서 이호석 본인의 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결과를 낳았다. 수비 가담이나 활동량, 체력도 좋은 축이 아니라 기용 시 꽤나 까다로운 상황이 자주 연출됐고 이 특성이 발목을 잡아 인천, 상주에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랜 공백기를 거쳐서 돌아온 후 인천에서는 이전보다 패스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정신적인 능력이 꽤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다. 피지컬은 여전히 강한 편이 아니지만 악착같이 경합에 참여하면서 약점을 메우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좋은 공간 인지 능력에 비해 적극성이 여전히 부족해 정적인 플레이가 자주 나왔고, 오랜 휴식으로 인해 상대 수비를 적극적으로 상대하기에는 부담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체력이 올라오지 않은 모습이 제일 아쉬운 부분.

여담[원본 편집]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컵, 차범근축구상 수상 등 어린 시절 경력이 화려했다. 덕분에 뛰어난 유망주로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 K리그 출범 이래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기록한 선수이다.
  • 좋아하는 등번호는 17번. 그 전까지 부상에 시달리다가 고등학교 때 17번을 달면서 부상을 떨쳐낸 좋은 기억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전남 유스 동기인 지동원과 상당히 친하며, 이호석 본인은 친구지만 존경하는 선수로 지동원을 꼽았다. 지동원 역시 이호석에게 덕담을 아끼지 않는 사이. 그 외에는 대학 시절 선발팀 경력을 통해 친해진 김도혁 등도 이호석과 친분이 있다. 인천에서는 김도혁, 이우혁, 송시우, 이상협 등과 함께 주로 어울리는 편.
  • 동국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당시 보여준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특이한 스타일의 주장이었던 것 같다. 다른 선수들에게 개입이나 간섭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대신 스스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쪽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후배들에게는 사실 우리에게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디스를 들으면서도 팀에서 제일 실력이 좋다는 칭찬, 모범이 되는 주장이었다는 칭찬도 받았다.
  • 인천, 상주에서 2년간 뛰지 못하면서 존재감이 옅어졌는데, 오히려 이런 특징때문에 K리그 커뮤니티 등지에서 드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역지에서 송시우, 박용지만 언급하고 이호석을 빼놓는 데 이어 김현회마저 취재를 갔다가 이호석의 이름만 까먹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며 오히려 갑작스레 인지도가 올라갔는데, 이후 생각보다 빨리 데뷔전을 치르자 반응이 더욱 뜨거웠다.
  • 꽤나 특이한 성격을 지닌 편이다. 주변 선수들의 평을 종합해보면 기본적으로 착하지만 말수도 별로 없고, 까칠한 면도 있다고 한다. 자기관리는 꽤 뛰어나지만, 정작 경기장 내에서는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한다는 말도 종종 나왔다. 한편 은근히 자신감이 떨어지는 모습도 있다. 인터뷰에 임할 때 자신의 장점이 별로 없다고 말하거나, 멀티 플레이어가 아닌 땜빵이라고 표현하는 등. 동국대 시절에는 별명이 츤데레였는데, 이호석이 어떤 스타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