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SV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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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팀 정보
{{분데스리가 구단정보
|이름    = 함부르크 SV
|정식명칭= 함부르크 SV
|원어이름 = Hamburger SV
|로마자명칭=Hamburger SV
|로고    = [[파일:Hamburger SV logo.svg]]
|엠블럼=HSV-Logo.png
|종목    = [[축구]]
|엠블럼크기=200px
|리그    = [[2. 분데스리가]]
|클럽명=Hamburger Sport-Verein e.V. <small>(법인)</small>
|지역연맹 =  
Hamburger Sport-Verein Fußball AG <small>(축구 분과)</small>
|설립일  = 1887년 9월 29일
|소속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해산일  =
|연고지=독일 [[함부르크]]
|연고지  = [[독일]] [[함부르크]]
|창단일={{날짜/출력|1887-9-29}}
|경기장  =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홈구장=[[폴크스파크 슈타디온]] (Volksparkstadion)
|소유    =  
|운영이사회장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ref>독일의 기업들은 대개 경영을 책임지는 운영이사회(Vorstand)와 이를 감독하는 감독이사회(Aufsichtsrat)의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ref>
|회장    = [[마르셀 얀젠]]
|감독이사회장=옌스 마이어 (Jens Meier) <small>(법인)</small><ref>HSV 법인 전체의 대빵이라고 볼 수 있다.</ref>
|감독     = [[팀 발터]]
칼 게르난트 (Karl Gernandt) <small>(축구 분과)</small>
|웹사이트 = {{URL|https://www.hsv.de}}
|단장=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비고    =
|감독=[[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상징색=파란색, 흰색, 검정색
|홈페이지=http://www.hsv.de
}}
}}


'''함부르거 슈포어트-페어아인'''(Hamburger Sport‑Verein e. V.), 즉 '''함부르크 SV'''는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축구팀이다. 한국에서는 함부르크, 함북, 햄버거 등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Hamburger SV를 줄여서 '''HSV'''라고 부른다.<ref>독일어로는 '하-에스-파우'라고 읽는다.</ref> 그 밖에 붉은 바지를 의미하는 '롯호젠(Rothosen)', 공룡을 뜻하는 '디노(Dino)' 등 다양한 별칭으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HSV로 통일하기로 한다.
== 개요 ==
'''함부르거 슈포어트-페어아인''', 즉 '''함부르크 SV'''는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축구팀이다. 한국에서는 함부르크, 함북, 햄버거 등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Hamburger SV를 줄여서 '''HSV'''라고 부른다.<ref>독일어로는 '하-에스-파우'라고 읽는다.</ref> 그 밖에 붉은 바지를 의미하는 '롯호젠(Rothosen)', 공룡을 뜻하는 '디노(Dino)' 등 다양한 별칭으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HSV로 통일하기로 한다.


HSV는 원래 축구를 포함하여 총 33개의 분과로 구성된 종합 스포츠 법인으로서 독일 내에서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스포츠 클럽이다. 물론 핸드볼, 아이스하키,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이 소속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HSV라고 하면 남자 축구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HSV는 원래 축구를 포함하여 총 33개의 분과로 구성된 종합 스포츠 법인으로서 독일 내에서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스포츠 클럽이다. 물론 핸드볼, 아이스하키,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이 소속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HSV라고 하면 남자 축구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프로 데뷔한 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2010년 이후 팀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탓에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전성기에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전력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문이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이제껏 단 한 번도 2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서 막대한 자부심을 지닌 구단이다. <ref>바이언 뮌헨은 지역별 안배 원칙에 따라 같은 연고지의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창설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두 시즌이 지나서 비로소 승격에 성공하였다.</ref>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프로 데뷔한 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2010년 이후 팀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탓에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전성기에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전력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문이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이제껏 단 한 번도 2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서 막대한 자부심을 지닌 구단이다. <ref>바이언 뮌헨은 지역별 안배 원칙에 따라 같은 연고지의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창설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두 시즌이 지나서 비로소 승격에 성공하였다.</ref>


== 역사<ref>역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사이트들을 참고했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http://www.hsv.de/verein/geschichte</ref> ==
== 역사<ref>역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사이트들을 참고했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http://www.hsv.de/verein/geschichte</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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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 시기에 짚고 넘어갈 만한 사건은 1928년에 있었던 "축구 혁명"(Fußball-Revolution)이었다. 당시 함부르크 지역의 강팀 9곳과 홀슈타인 킬(Holstein Kiel)은 리그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북독일 축구 연맹에 맞서 "10구단의 라운드"(Runde der Zehn)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운영했고, 결국 최상위 리그의 개수를 11개에서 6개로 축소한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특수한 리그에서도 우승은 당연히 9전 8승 1무를 거둔 HSV의 몫이었다.
그 밖에 이 시기에 짚고 넘어갈 만한 사건은 1928년에 있었던 "축구 혁명"(Fußball-Revolution)이었다. 당시 함부르크 지역의 강팀 9곳과 홀슈타인 킬(Holstein Kiel)은 리그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북독일 축구 연맹에 맞서 "10구단의 라운드"(Runde der Zehn)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운영했고, 결국 최상위 리그의 개수를 11개에서 6개로 축소한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특수한 리그에서도 우승은 당연히 9전 8승 1무를 거둔 HSV의 몫이었다.


=== 나치 집권기부터 분데스리가 출범기까지 (1933-1973) ===
=== 나치 집권기부터 분데스리가 출범기까지 (1933-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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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1972-73 시즌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고 리가포칼(DFB-Ligapokal) 초대 우승팀이 된 것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반에 팀은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72년에는 레전드 우베 젤러가 은퇴했고 또 한 명의 레전드 게르트 되르펠(Gert Dörfel)이 팀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빌리 슐츠(Willi Schulz)마저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될 화려한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베테랑들이 팀을 떠났으나, 또 그만큼 많은 젊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페터 노글리(Peter Nogly), [[만프레트 칼츠]](Manfred Kaltz), 루디 카르구스(Rudi Kargus) 등은 이후 세계적인 선수들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1972-73 시즌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고 리가포칼(DFB-Ligapokal) 초대 우승팀이 된 것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반에 팀은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72년에는 레전드 우베 젤러가 은퇴했고 또 한 명의 레전드 게르트 되르펠(Gert Dörfel)이 팀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빌리 슐츠(Willi Schulz)마저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될 화려한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베테랑들이 팀을 떠났으나, 또 그만큼 많은 젊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페터 노글리(Peter Nogly), [[만프레트 칼츠]](Manfred Kaltz), 루디 카르구스(Rudi Kargus) 등은 이후 세계적인 선수들로 성장하였다.


===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 ===
===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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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해에 우주의 기운을 몽땅 끌어다 쓴 탓인지 이후 HSV는 두 번 다시는 이때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3-84 시즌에 팀은 인터컨티넨탈 컵과 UEFA 슈퍼컵을 포함하여 총 5개 대회에 나갔으나, 벨기에로 떠난 간판 스트라이커 호어스트 흐루베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무관에 그쳤다.<ref>1983-84 시즌 분데스리가는 우승팀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 SV,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총 세 팀이 나란히 승점 48점을 거둘 만큼 박빙이었다. 더욱이 4위 FC 바이언 뮌헨은 47점, 5위 SV 베르더 브레멘은 45점이었으니 무려 다섯 팀이 불과 한 경기 안쪽의 승점 차이를 보이며 경쟁했던 셈이다.</ref> 그리고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고, 1986-87 시즌 DFB-포칼 우승을 끝으로 HSV의 화려했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해에 우주의 기운을 몽땅 끌어다 쓴 탓인지 이후 HSV는 두 번 다시는 이때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3-84 시즌에 팀은 인터컨티넨탈 컵과 UEFA 슈퍼컵을 포함하여 총 5개 대회에 나갔으나, 벨기에로 떠난 간판 스트라이커 호어스트 흐루베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무관에 그쳤다.<ref>1983-84 시즌 분데스리가는 우승팀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 SV,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총 세 팀이 나란히 승점 48점을 거둘 만큼 박빙이었다. 더욱이 4위 FC 바이언 뮌헨은 47점, 5위 SV 베르더 브레멘은 45점이었으니 무려 다섯 팀이 불과 한 경기 안쪽의 승점 차이를 보이며 경쟁했던 셈이다.</ref> 그리고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고, 1986-87 시즌 DFB-포칼 우승을 끝으로 HSV의 화려했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 무관의 시대와 중흥을 위한 노력 (1987-2009) ===
=== 무관의 시대와 중흥을 위한 노력 (1987-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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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벤스 감독이 떠나고, <s>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CF|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s> 주장 반 더 바르트마저도 <s>발렌시아가 아닌</s>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스테벤스의 후임으로 취임한 [[마틴 욜]](Martin Jol)은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기존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팀은 리그와 [[UEFA 컵]], 그리고 [[DFB-포칼]]까지 세 개 대회에서 모두 쾌조의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s>단, 신입생 중 [[치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s>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UEFA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스테벤스 감독이 떠나고, <s>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CF|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s> 주장 반 더 바르트마저도 <s>발렌시아가 아닌</s>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스테벤스의 후임으로 취임한 [[마틴 욜]](Martin Jol)은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기존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팀은 리그와 [[UEFA 컵]], 그리고 [[DFB-포칼]]까지 세 개 대회에서 모두 쾌조의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s>단, 신입생 중 [[치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s>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UEFA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 HSV의 몰락과 <i>HSVPlus</i> (2009-2014) ===
=== HSV의 몰락과 <i>HSVPlus</i> (2009-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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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k Arnes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파일:Frank Arnes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 FC|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다.<ref>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ref>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 FC|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고, 특히 [[요리스 마타이센|마타이센]]의 이적에 대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자 구단은 [[마이클 만시엔|만시엔]]의 능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ref>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ref>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마이클 만시엔|만시엔]]과 [[제프리 브루마|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미하엘 외닝|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ref>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4년 반 동안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한 채 전설(?)로 남았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즉,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ref> 이후 소방수로 선임된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 감독 하에서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했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마이클 만시엔|만시엔]]과 [[제프리 브루마|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미하엘 외닝|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ref>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4년 반 동안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즉,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ref> 이후 소방수로 선임된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 감독 하에서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했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2012-13 시즌에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에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시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였다. 팀은 그의 투자에 힘입어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s>또 너냐...</s>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을 하고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성적이 추락하면서 결국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s>사실 이마저도 골키퍼 [[레네 아들러]](René Adler)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s>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2012-13 시즌에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에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시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였다. 팀은 그의 투자에 힘입어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s>또 너냐...</s>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을 하고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성적이 추락하면서 결국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s>사실 이마저도 골키퍼 [[레네 아들러]](René Adler)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s>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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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i>퀴네+나겔</i>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i>퀴네+나겔</i>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i>HSVPlus</i> 이후의 HSV (2014-현재) ===
=== <i>HSVPlus</i> 이후의 HSV (2014-현재)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바이어스도르퍼]]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린 HSV는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비록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적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팀은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러한 빅사이닝을 토대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슬롬카는 조기에 경질되었고, 여러 유명한 이름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팀은 결국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ref>이는 HSV 2군이 8전 8승을 거두며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한 결과였다.</ref><ref>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ref>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화시키며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팀은 전반기 단 19골을 내주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해놓고도 득점에서 9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ref>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보다 거의 2배의 득점을 기록했다.</ref> 이에 팀은 겨울에 노장 공격수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 만에 재영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거기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20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원정에서 0:8이라는 재앙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초짜 감독은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HSV는 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부진하였고, [[요제프 친바우어|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ref>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ref>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바이어스도르퍼]]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린 HSV는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비록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적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팀은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러한 빅샤이닝을 토대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슬롬카는 조기에 경질되었고, 여러 유명한 이름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팀은 결국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ref>이는 HSV 2군이 8전 8승을 거두며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한 결과였다.</ref><ref>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ref>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화시키며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팀은 전반기 단 19골을 내주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해놓고도 득점에서 9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ref>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보다 거의 2배의 득점을 기록했다.</ref> 이에 팀은 겨울에 노장 공격수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 만에 재영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거기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20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원정에서 0:8이라는 재앙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초짜 감독은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HSV는 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부진하였고, [[요제프 친바우어|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ref>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ref>


[[파일:Klassenerhalt.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잔류의 기쁨에 <s>미쳐 날뛰는</s> HSV 선수 및 관계자들]]
[[파일:Klassenerhalt.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잔류의 기쁨에 <s>미쳐 날뛰는</s> HSV 선수 및 관계자들]]
친바우어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HSV 행이 유력했던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감독이 막판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행선지를 바꾸면서 2009-10 시즌에 이미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라바디아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친분에 힘입어 다시 소방수로 HSV에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팬들의 머릿속에는 2009-10 시즌의 악몽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라바디아는 [[VfB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감독으로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면서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s>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s> [[고이코 카차르]]의 부활에 힘입어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친 결과 팀은 꼴찌에서 16위로 올라서며 극적으로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칼스루헤 SC|칼스루헤]]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데 이어 원정에서의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며 팀은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i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서 <s>시즌 내내 계륵이었던</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가 역전골 <s>혹은 속죄골</s>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한 것이다.
친바우어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HSV 행이 유력했던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감독이 막판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행선지를 바꾸면서 2009-10 시즌에 이미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라바디아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친분에 힘입어 다시 소방수로 HSV에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팬들의 머릿속에는 2009-10 시즌의 악몽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라바디아는 [[VfB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감독으로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면서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s>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s> [[고이코 카차르]]의 부활에 힘입어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친 결과 팀은 꼴찌에서 16위로 올라서며 극적으로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칼스루헤 SC|칼스루헤]]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데 이어 원정에서의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며 팀은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i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서 <s>시즌 내내 계륵이었던</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가 역전골 <s>혹은 속죄골</s>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한 것이다.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첫 해에 쓰라린 실패를 겪자 팀은 대대적으로 선수단 체질 개선에 나섰다. 노쇠화가 두드러진 <s>그 놈의 지긋지긋한</s>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와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을 비롯하여 고액 주급자들이 대거 방출되었고, 그 자리는 유망주와 알짜 영입으로 채워졌다. 대형 영입이라고는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아론 헌트]](Aaron Hunt)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2015-16 시즌은 적어도 초반에는 긍정적이었다. [[레네 아들러]] 골키퍼의 선방과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센터백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의 안정된 수비, 나아가 살아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력에 힘입어 팀은 한때 대외컵 진출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안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 감독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사람만 좋아서 선수단 관리자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고,<ref>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에미르 스파히치는 여러 차례 동료 선수들에 대한 욕설 및 폭력 행사로 구설수에 올랐으나, 라바디아 감독과 구단 측은 그를 두둔하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스파히치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ref> 전술가로서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s>[[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Matthias Ostrzolek)으로 대변되는</s>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무색무취의 롱볼 축구로 비난을 받았다. 거기다가 최전방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진까지 겹치면서 시즌 막판에는 한때 다시 잔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s>드디어 각성한 초사이언</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의 활약에 힘입어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내용적으로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첫 해에 쓰라린 실패를 겪자 팀은 대대적으로 선수단 체질 개선에 나섰다. 노쇠화가 두드러진 <s>그 놈의 지긋지긋한</s>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와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을 비롯하여 고액 주급자 및 제 몫을 못한 선수들이 대거 방출되었고, 그 자리는 유망주와 꼭 필요한 알짜 영입으로 채워졌다. 대형 영입이라 할 만한 선수는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이적시장 종료 직전에 데려온 [[아론 헌트]](Aaron Hunt)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2015-16 시즌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비록 [[DFB-포칼]] 1라운드에서 4부 리그 격인 북동부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Nordost) 소속의 [[FC 칼 차이스 예나]](FC Carl Zeiss Jena)에 2:3으로 패하며 불안하게 시즌을 시작했으나, [[레네 아들러]] 골키퍼의 선방과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센터백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의 안정된 수비, 나아가 살아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력에 힘입어 팀은 한때 대외컵 진출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다. 비록 [[FC 아우크스부르크]]와의 17라운드에서 0:1 패배를 당하면서 10위로 전반기를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HSV의 2015-16 시즌 전반기는 성공적이었다.
 
<s>자, 칭찬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즐겁고 신나고 활기차게 까 보도록 하자.</s> 그러나 불안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 감독은 온화한 리더십의 보유자였으나, 때로는 회초리가 필요할 상황에서조차 침묵함으로써 선수단 장악력에서 문제를 노출했으며,<ref>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에미르 스파히치는 여러 차례 동료 선수들에 대한 욕설 및 폭력 행사로 구설수에 올랐으나, 라바디아 감독과 구단 측은 그를 두둔하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스파히치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ref> <s>[[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Matthias Ostrzolek)으로 대변되는</s>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무색무취의 롱볼 축구로 팬과 전문가들의 비난을 샀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이 곪아 터지면서 후반기는 전반기와 다르게 흘러갔다. 선수단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최전방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진까지 겹치면서 시즌 막판에는 한때 다시 잔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s>드디어 각성한 초사이언</s> 니콜라이 뮐러의 활약에 힘입어 전반기와 동일한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전반기만큼 개운한 10위는 결코 아니었다.
 
축구 외적인 문제는 보다 명확했다. 야심차게 시작된 <i>HSVPlus</i>는 그 발의자였던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가 스스로 "<i>HSVPlus</i>는 죽었다"(HSVPlus ist tot)라고 선언할 만큼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ref>리크호프의 <i>HSVPlus</i> 비판은 다음의 칼럼을 참고할 것. http://www.goal.com/de/news/1025/kolumne/2015/10/06/16057762/jovanovs-hsv-vom-kurs-abgekommen</ref> 리크호프가 바랐던 <i>HSVPlus</i>의 목적은 지분 판매로 확보한 자금으로 빚을 갚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면서 유망주에 투자하여 팀을 장기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이상은 철저히 실패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그 자금을 빚을 갚거나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이적시장에 투자함으로써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성적을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은 대부분 기대 이하였고, 성적은 여전히 강등을 걱정해야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은 또 다시 부채를 끌어와 이적시장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구단은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이후 무려 약 6천만 유로를 선수영입에 사용했음에도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팬과 언론의 비판은 점점 더 고조되어 갔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의 개입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감독이사회장 칼 게르난트를 등에 업은 퀴네는 성적이 부진하면 구단 측에 빅샤이닝을 부추겼고, 그로써 영입된 선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그는 다시 막대한 돈을 투자 혹은 대부해주면서 또 다른 빅샤이닝을 촉구했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퀴네에 대한 HSV의 의존도는 갈수록 커졌고, <i>HSVPlus</i>의 흐름은 리크호프의 이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파일:Kuehne.jpg|300픽셀|섬네일|왼쪽|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파일:Kuehne.jpg|300픽셀|섬네일|왼쪽|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축구 외적인 문제는 보다 명확했다. 야심차게 시작된 <i>HSVPlus</i>는 발의자였던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가 스스로 "<i>HSVPlus</i>는 죽었다"(HSVPlus ist tot)라고 선언할 만큼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ref>리크호프의 <i>HSVPlus</i> 비판은 다음의 칼럼을 참고할 것. http://www.goal.com/de/news/1025/kolumne/2015/10/06/16057762/jovanovs-hsv-vom-kurs-abgekommen</ref> 리크호프가 바랐던 <i>HSVPlus</i>의 목적은 지분 판매로 확보한 자금으로 빚을 갚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면서 유망주에 투자하여 팀을 장기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이상은 철저히 실패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그 자금을 빚을 갚거나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이적시장에 투자함으로써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성적을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은 대부분 기대 이하였고, 성적은 여전히 강등을 걱정해야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은 또 다시 부채를 끌어와 이적시장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구단은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이후 무려 약 6천만 유로를 선수영입에 사용했음에도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악순환 속에서 퀴네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질 뿐이었다.<ref>특히 2016년 여름, 퀴네는 최대 5천만 유로의 추가적인 대부를 약속하는 대신 개인 고문으로 폴커 슈트루트(Volker Struth)를 두고 선수를 영입할 때 팀이 자신과 사전에 논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퀴네의 지인으로서 과거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단장이었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향후 HSV는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 겸 단장,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폴커 슈트루트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할 경우에만 선수영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ref>
그런 점에서 2016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HSV의 행보는 양날의 칼이었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페터 크내벨과의 계약 해지로 단장직을 겸임하게 된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바이어스도르퍼]]가 왕년의 감각을 십분 발휘했다는 점이었다.<ref>페터 크내벨의 해임은 지난 두 시즌 동안의 실망스러운 성과와 배낭 분실 사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배낭 분실 사건은 2015년 8월, 분실된 페터 크내벨의 배낭이 한 민간인 여성에게 발견되면서 안에 담겨 있던 선수단 연봉 정보가 외부에 유출된 사고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http://www.mopo.de/sport/skandal-um-hsv-gehaelter-klaute-die--finderin--der-rucksack-von-sportdirektor-peter-knaebel--22461024</ref> 바이어스도르퍼는 최전방과 2선, 백업 골키퍼, 그리고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던 왼쪽 수비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양질의 선수를 영입함으로써 선수 보강을 이루어냈는데, 비록 총 지출액이 3천만 유로를 상회하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영입된 선수들이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던 [[필립 코스티치]](Filip Kostić), 동유럽의 메시로 불리는 대형 유망주 알렌 할릴로비치(Alen Halilović) 등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는 오히려 저렴한 금액에 해당했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은 그러한 성과의 뒤에 퀴네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크내벨의 해임부터가 퀴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으며, 선수 영입과 관련해서도 퀴네는 최대 5천만 유로의 추가적인 대부를 약속하는 대신에 개인 고문으로 폴커 슈트루트(Volker Struth)를 두고 구단이 자신과 사전에 논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즉, 퀴네의 돈과 결정 없이 HSV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f>퀴네의 지인으로서 과거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단장으로 재직했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에 따르면 HSV는 앞으로 선수를 영입할 때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와 그 개인 고문 폴커 슈트루트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해야만 이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ref>
 
이처럼 2016년 HSV의 여름은 강화된 스쿼드와 그 이상으로 강화된 퀴네의 개입이라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복잡한 상황 하에서 마침내 2016-17 시즌이 시작했다.


결국 그 책임은 페터 크내벨 단장의 해임으로 이어졌다.<ref>페터 크내벨의 해임은 지난 두 시즌 동안의 실망스러운 성과와 배낭 분실 사건, 그리고 퀴네의 입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배낭 분실 사건은 2015년 8월, 분실된 페터 크내벨의 배낭이 한 민간인 여성에게 발견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선수단 연봉 정보가 외부에 유출된 사고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http://www.mopo.de/sport/skandal-um-hsv-gehaelter-klaute-die--finderin--der-rucksack-von-sportdirektor-peter-knaebel--22461024</ref> 그리고 단장직을 겸임하게 된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퀴네의 후원과 왕년의 감각으로 2016년 여름 대대적인 선수 보강에 나섰다. 비록 총 지출은 3천만 유로를 상회했으나, [[필립 코스티치]](Filip Kostić), [[알렌 할릴로비치]](Alen Halilović)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점에서 일단 팬과 언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17 시즌, 팀은 1라운드 잉골슈타트 전 무승부 이후 4연패를 당하면서 2011-12 시즌 이후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다. 그 결과 라바디아 감독은 경질되었고, 과거 [[TSG 1899 호펜하임]]을 이끌었던 [[마르쿠스 기스돌]](Markus Gisdol)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ref>재미있는 점은 기스돌은 호펜하임에서 2015년 10월, HSV와의 패배 직후 해임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라바디아 감독의 HSV에 패해 경질된 기스돌이 그 라바디아의 후임으로 그 HSV의 감독이 된 셈이다. <s>자고로 인생이란 모르는 것..</s></ref>


== 상징물 ==
== 상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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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블럼 ===
=== 엠블럼 ===


HSV의 엠블럼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디자인의 자체는 '전원 승선'을 알리는 깃발 신호인 '파란 페터'(Blaue Peter)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파란 페터는 파란 바탕에 커다란 하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선박용 깃발 신호인데, 여기에 SC 게르마니아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징색이었던 파란색과 검은색을 디자인에 반영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지금의 엠블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으로 미루어 볼 때, HSV의 엠블럼은 항구도시로서 함부르크 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HSV는 원정 경기를 치르러 떠날 때 선수단이 출발했다는 의미로 이 '전원 승선'(Alle Mann an Bord)이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한편, 엠블럼 한가운데의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은 흔히 '라우테'(Raute)라고 일컬어지는데, 비록 시기에 따라 이 라우테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눈에 띄는 디자인 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HSV의 엠블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실질적으로 엠블럼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ref>물론 구단 역사가 짧은 [[FC 잉골슈타트 04]](FC Ingolstadt 04) 등은 제외했을 때의 얘기다.</ref> 한편,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는 2016년 4월 12일, 세계 최악의 엠블럼으로 HSV의 문장을 선정하였다.<ref>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534464/Wolfsburg-s-ugly-badge-seen-Champions-League-semi-finals-does-make-list-10-worst-football.html
HSV의 엠블럼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디자인의 자체는 '전원 승선'을 알리는 깃발 신호인 '파란 페터'(Blaue Peter)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파란 페터는 파란 바탕에 커다란 하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선박용 깃발 신호인데, 여기에 SC 게르마니아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징색이었던 파란색과 검정색을 디자인에 반영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지금의 엠블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으로 미루어 볼 때, HSV의 엠블럼은 항구도시로서 함부르크 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HSV는 원정 경기를 치르러 떠날 때 선수단이 출발했다는 의미로 이 '전원 승선'(Alle Mann an Bord)이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한편, 엠블럼 한가운데의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은 흔히 '라우테'(Raute)라고 일컬어지는데, 비록 시기에 따라 이 라우테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눈에 띄는 디자인 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HSV의 엠블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실질적으로 엠블럼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ref>물론 구단 역사가 짧은 [[FC 잉골슈타트 04]](FC Ingolstadt 04) 등은 제외했을 때의 얘기다.</ref> 한편,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는 2016년 4월 12일, 세계 최악의 엠블럼으로 HSV의 문장을 선정하였다.<ref>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534464/Wolfsburg-s-ugly-badge-seen-Champions-League-semi-finals-does-make-list-10-worst-football.html
그러나 이는 데일리 메일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최악의 엠블럼 10개 중 영국 팀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된 구단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독일 일간지 [[빌트]](Bild)에서는 데일리 메일이 선정한 팀들에 잉글랜드 구단 4팀을 추가하여 진정한 세계 최악의 엠블럼을 가리는 인터넷 투표를 진행하였고, 37%의 득표를 받아 잉글랜드의 밀턴 케인스 돈스(Milton Keynes Dones)가 1위에 선정되었다. <s>그 와중에 HSV는 26%로 2등을 차지했다.</s>
그러나 이는 데일리 메일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최악의 엠블럼 10개 중 영국 팀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된 구단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독일 일간지 [[빌트]](Bild)에서는 데일리 메일이 선정한 팀들에 잉글랜드 구단 4팀을 추가하여 진정한 세계 최악의 엠블럼을 가리는 인터넷 투표를 진행하였고, 37%의 득표를 받아 잉글랜드의 밀턴 케인스 돈스(Milton Keynes Dones)가 1위에 선정되었다. <s>그 와중에 HSV는 26%로 2등을 차지했다.</s>
http://www.bild.de/sport/fussball/fussball-international/wer-hat-das-schlimmste-logo-45374124.bild.html</ref>
http://www.bild.de/sport/fussball/fussball-international/wer-hat-das-schlimmste-logo-45374124.bild.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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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HSV의 응원가로는 무수히 많은 곡들이 있으나, 일단은 그 수가 너무 많고 오늘날 그다지 자주 불리지 않는 곡들이 대부분인 만큼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밖에도 HSV의 응원가로는 무수히 많은 곡들이 있으나, 일단은 그 수가 너무 많고 오늘날 그다지 자주 불리지 않는 곡들이 대부분인 만큼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 구호 ===
=== 구호 ===


HSV 팬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구호로는 <i>Nur der HSV</i>와 <i>Die Raute im Herzen</i>을 뽑을 수 있다. 전자는 '오직 HSV'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라우테는 가슴에'라는 뜻이다.
HSV 팬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구호로는 <i>Nur der HSV</i>와 <i>Die Raute im Herzen</i>을 뽑을 수 있다. 전자는 '오직 HSV'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라우테는 가슴에'라는 뜻이다.


=== 마스코트와 헤어만 리거 ===
=== 마스코트와 헤어만 리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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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rmann Rieger Statue.jpg|270픽셀|섬네일|왼쪽|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세워진 헤어만 리거의 동상]]
[[파일:Hermann Rieger Statue.jpg|270픽셀|섬네일|왼쪽|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세워진 헤어만 리거의 동상]]
한편, 2014년 2월 18일에 사망한 마사지사, '''헤어만 리거'''는 HSV 팬들 사이에 진정한 HSV인으로서 추앙받는 존재이다. 1941년 10월 2일, [[바이언]] 주의 미텐발트(Mittenwald)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만프레트 칼츠]]의 소개로 1978년부터 HSV로 옮겨왔고, 이후 암 투병 때문에 2004년에 은퇴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오랜 기간 수많은 선수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큰 힘이 되었으며, 구단은 비(非)선수 출신으로는 예외적으로 그런 그를 위해 은퇴 경기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자,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는 2014년 3월 2일, 3천여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2015년 2월 18일, 그의 1주기를 기념하여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편, 고향 미텐발트(Mittenwald)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헤어만 리거 길'(Hermann-Rieger-Weg)이 있다.
한편, 2014년 2월 18일에 사망한 마사지사, '''헤어만 리거'''는 HSV 팬들 사이에 진정한 HSV인으로서 추앙받는 존재이다. 1941년 10월 2일, [[바이언]] 주의 미텐발트(Mittenwald)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만프레트 칼츠]]의 소개로 1978년부터 HSV로 옮겨왔고, 이후 암 투병 때문에 2004년에 은퇴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오랜 기간 수많은 선수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큰 힘이 되었으며, 구단은 비(非)선수 출신으로는 예외적으로 그런 그를 위해 은퇴 경기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자,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는 2014년 3월 2일, 3천여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2015년 2월 18일, 그의 1주기를 기념하여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편, 고향 미텐발트(Mittenwald)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헤어만 리거 길'(Hermann-Rieger-Weg)이 있다.


=== 분데스리가 시계 ===
=== 분데스리가 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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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ligauhr.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분데스리가 시계]]
[[파일:Bundesligauhr.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분데스리가 시계]]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홈 서포터석에 해당하는 북쪽 관중석(Nordtribüne) 중 22A 블럭 위, 즉 구장 북서쪽 방향 중앙 부근에는 '분데스리가 시계'(Bundesliga-Uhr)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계는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물렀던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데, 앞부터 차례대로 연, 일, 시, 분, 초 순으로 표기된다. 무엇보다도 이는 독일 내 분데스리가를 개근한 유일한 클럽으로서 HSV가 품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단이 강등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언론들은 이 시계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내용으로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한편,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분데스리가 시계와 마찬가지로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무른 시간을 보여주는 위젯을 찾아볼 수 있다.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홈 서포터석에 해당하는 북쪽 관중석(Nordtribüne) 중 22A 블럭 위, 즉 구장 북서쪽 방향 중앙 부근에는 '분데스리가 시계'(Bundesliga-Uhr)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계는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물렀던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데, 앞부터 차례대로 연, 일, 시, 분, 초 순으로 표기된다. 무엇보다도 이는 독일 내 분데스리가를 개근한 유일한 클럽으로서 HSV가 품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단이 강등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언론들은 이 시계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내용으로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한편,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분데스리가 시계와 마찬가지로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무른 시간을 보여주는 위젯을 찾아볼 수 있다.


== 시설 ==
==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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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U-17 팀부터 2군까지는 볼프강 마이어 운동장(Wolfgang-Meyer-Sportanlage)을, 나머지 U-16 이하 팀들은 노르더슈테트(Norderstedt) 소재 파울 하우젠쉴트 운동장(Paul-Hausenschild Anlage)을 각각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한편, U-17 팀부터 2군까지는 볼프강 마이어 운동장(Wolfgang-Meyer-Sportanlage)을, 나머지 U-16 이하 팀들은 노르더슈테트(Norderstedt) 소재 파울 하우젠쉴트 운동장(Paul-Hausenschild Anlage)을 각각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 HSV 캠퍼스 ===
=== HSV 캠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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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캠퍼스는 U-15 팀부터 2군까지를 수용할 예정이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캠퍼스처럼 학업 교육, 각종 편의시설, 심지어 일부 선수들에게는 기숙사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HSV 캠퍼스의 운영은 오토 스포츠 재단 운영이사회장인 란도 아우스트(Rando Aust)와 HSV 축구 주식회사 운영이사회의 요아힘 힐케(Joachim Hilke)가 담당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HSV 캠퍼스는 U-15 팀부터 2군까지를 수용할 예정이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캠퍼스처럼 학업 교육, 각종 편의시설, 심지어 일부 선수들에게는 기숙사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HSV 캠퍼스의 운영은 오토 스포츠 재단 운영이사회장인 란도 아우스트(Rando Aust)와 HSV 축구 주식회사 운영이사회의 요아힘 힐케(Joachim Hilke)가 담당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 HSV 축구 주식회사 (HSV Fußball AG) ==
== HSV 축구 주식회사 (HSV Fußball 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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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HSV 축구 주식회사는 계속해서 투자자를 확보하여 지분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분 판매가 25%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매각을 위해서는 법인 총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 지분이 50%를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독일 축구계의 50+1 원칙에 따른 것으로, HSV 법인은 항상 5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해야만 한다.
앞으로도 HSV 축구 주식회사는 계속해서 투자자를 확보하여 지분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분 판매가 25%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매각을 위해서는 법인 총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 지분이 50%를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독일 축구계의 50+1 원칙에 따른 것으로, HSV 법인은 항상 5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해야만 한다.  


개혁의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는 또한 HSV 법인과는 별개의 운영이사회 및 감독이사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HSV 법인은 여전히 축구 주식회사의 제1주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 회장단은 주주 총회에 참여하여 여섯 명의 감독이사회원 중 다섯 명을 선출하게 되며, 남은 한 명 또한 법인 회장단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이러한 감독이사회는 운영이사회의 인원 수를 결정하고 구성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한을 갖는다. 단,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구단 운영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운영이사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개혁의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는 또한 HSV 법인과는 별개의 운영이사회 및 감독이사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HSV 법인은 여전히 축구 주식회사의 제1주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 회장단은 주주 총회에 참여하여 여섯 명의 감독이사회원 중 다섯 명을 선출하게 되며, 남은 한 명 또한 법인 회장단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이러한 감독이사회는 운영이사회의 인원 수를 결정하고 구성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한을 갖는다. 단,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구단 운영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운영이사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 팬 문화<ref>팬 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였다. http://www.hsv1887.de/</ref> ==
== 팬 문화<ref>팬 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였다. http://www.hsv1887.de/</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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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HSV와 가장 끈끈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클럽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1부 리그로 승격한 1976년 이후 양팀 서포터들은 서로가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날 경우에 동행하며 함께 응원해 주었고, 경기장 바깥에서도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이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198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는데, [[셀틱 FC|셀틱]]의 라이벌 [[레인저스 FC]]와 친선관계에 있었던 HSV로서는 이 소식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8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DFB-포칼]] 경기를 치르러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났을 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팬들은 HSV 팬들을 남겨둔 채 [[겔젠키르헨]]을 떠나 버렸고, 남겨진 HSV 팬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FC 샬케 04|샬케]] 팬들과 신경전을 이어가다가 충돌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ref>다만, 이는 HSV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도르트문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ref>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양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더욱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처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HSV의 친선 관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드 팬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양팀이 맞대결을 펼칠 때면 팬들끼리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HSV와 가장 끈끈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클럽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1부 리그로 승격한 1976년 이후 양팀 서포터들은 서로가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날 경우에 동행하며 함께 응원해 주었고, 경기장 바깥에서도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이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198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는데, [[셀틱 FC|셀틱]]의 라이벌 [[레인저스 FC]]와 친선관계에 있었던 HSV로서는 이 소식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8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DFB-포칼]] 경기를 치르러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났을 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팬들은 HSV 팬들을 남겨둔 채 [[겔젠키르헨]]을 떠나 버렸고, 남겨진 HSV 팬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FC 샬케 04|샬케]] 팬들과 신경전을 이어가다가 충돌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ref>다만, 이는 HSV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도르트문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ref>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양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더욱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처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HSV의 친선 관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드 팬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양팀이 맞대결을 펼칠 때면 팬들끼리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내 클럽으로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Arminia Bielefeld)와 [[하노버 96]]을 들 수 있다. 세 팀은 소위 '북부 동맹'(Nordallianz)으로 일컬어지는 친선 관계로 묶여 있는데,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와 HSV는 팀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은색·파란색·흰색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하노버 96]]은 약자가 'HSV'로 똑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ref>그러나 오늘날 하노버 96의 약자는 HSV보다는 보통 H96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f> 특히 1990년대 중반에는 [[토마스 폰 헤젠]](Thomas von Heesen), [[울리 슈타인]](Uli Stein) 등 한때 HSV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로 이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양팀의 친선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내 클럽으로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Arminia Bielefeld)와 [[하노버 96]]을 들 수 있다. 세 팀은 소위 '북부 동맹'(Nordallianz)으로 일컬어지는 친선 관계로 묶여 있는데,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와 HSV는 팀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정색·파란색·흰색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하노버 96]]은 약자가 'HSV'로 똑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ref>그러나 오늘날 하노버 96의 약자는 HSV보다는 보통 H96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f> 특히 1990년대 중반에는 [[토마스 폰 헤젠]](Thomas von Heesen), [[울리 슈타인]](Uli Stein) 등 한때 HSV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로 이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양팀의 친선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외에서는 전술하였듯이 [[레인저스 FC]]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1974년, HSV 팬들은 원정 응원을 온 [[레인저스 FC|레인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팀은 친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각자의 라이벌 때문이었는데, HSV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FC 장크트 파울리]](FC St. Pauli)가 1987년에 [[셀틱 FC|셀틱]]과 친선을 맺게 되자 양팀은 더욱 서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국외에서는 전술하였듯이 [[레인저스 FC]]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1974년, HSV 팬들은 원정 응원을 온 [[레인저스 FC|레인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팀은 친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각자의 라이벌 때문이었는데, HSV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FC 장크트 파울리]](FC St. Pauli)가 1987년에 [[셀틱 FC|셀틱]]과 친선을 맺게 되자 양팀은 더욱 서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1976년부터 1979년경까지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네 팀은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 맞서 4자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외에서는 한때 잉글랜드의 [[리버풀 FC]] 등과 친선을 맺은 바 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1976년부터 1979년경까지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네 팀은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 맞서 4자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외에서는 한때 잉글랜드의 [[리버풀 FC]] 등과 친선을 맺은 바 있었다.


=== 라이벌 ===
=== 라이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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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FC Falke.jpeg|180픽셀|섬네일|오른쪽|HFC 팔케의 엠블럼]]
[[파일:HFC Falke.jpeg|180픽셀|섬네일|오른쪽|HFC 팔케의 엠블럼]]
2014년 5월 25일의 총회 표결 결과에 따라 프로축구 분과의 스핀오프가 최종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타락한 HSV를 대체하여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고, 2014년 7월 17일, HFC 팔케(HFC Falke)라는 새로운 구단이 공식 등록 절차를 마쳤다.<ref>HFC 팔케의 창립자들은 2005년, 미국인 기업가 말콤 글레이저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할 당시 그 반대자들이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FC United of Manchester)를 창단했던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ref> 그러나 짧은 준비 기간 탓에 아직 선수단도 갖추지 못했던 HFC 팔케는 한 시즌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2015-16 시즌, 9부 리그에 해당하는 함부르크 크라이스클라세 5(Kreisklasse 5)에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HFC 팔케라는 구단명은 HSV의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의 약자인 HFC와 FC 팔케(FC Falke 1906)의 명칭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엠블럼 및 유니폼 색깔은 또 하나의 전신 구단인 SC 게르마니아 (SC Germania 1887)를 연상케 한다. 비록 창단 이후 HFC 팔케는 빠르게 상부 리그로 치고 올라오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워낙 소속 리그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인지 서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2014년 5월 25일의 총회 표결 결과에 따라 프로축구 분과의 스핀오프가 최종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타락한 HSV를 대체하여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고, 2014년 7월 17일, HFC 팔케(HFC Falke)라는 새로운 구단이 공식 등록 절차를 마쳤다.<ref>HFC 팔케의 창립자들은 2005년, 미국인 기업가 말콤 글레이저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할 당시 그 반대자들이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FC United of Manchester)를 창단했던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ref> 그러나 짧은 준비 기간 탓에 아직 선수단도 갖추지 못했던 HFC 팔케는 한 시즌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2015-16 시즌, 9부 리그에 해당하는 함부르크 크라이스클라세 5(Kreisklasse 5)에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HFC 팔케라는 구단명은 HSV의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의 약자인 HFC와 FC 팔케(FC Falke 1906)의 명칭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엠블럼 및 유니폼 색깔은 또 하나의 전신 구단인 SC 게르마니아 (SC Germania 1887)를 연상케 한다. 비록 창단 이후 HFC 팔케는 빠르게 상부 리그로 치고 올라오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워낙 소속 리그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인지 서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 인물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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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16 - 2014/07/07 || 칼-에드가 야르호프 (Carl-Edgar Jarchow) || 운영이사회장  
| 2011/03/16 - 2014/07/07 || 칼-에드가 야르호프 (Carl-Edgar Jarchow) || 운영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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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9 - 2016/12/13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운영이사회장
| 2014/07/09 -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운영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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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4 -  || 헤리베어트 부르흐하겐 (Heribert Bruchhagen) || 운영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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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3번째 줄: 445번째 줄:
| 2014/10/01 - 2016/05/09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프로축구 디렉터  
| 2014/10/01 - 2016/05/09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프로축구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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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2016/12/13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프로축구 디렉터
| 2015/05/09 -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프로축구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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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6 -  || 옌스 토트 (Jens Todt) || 프로축구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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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직은 1976년부터 도입되었다.
단장직은 1976년부터 도입되었다.


=== 역대 감독 ===
===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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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07/01 - 1973/06/30 || 클라우스 옥스 (Klaus Ochs) || ||  
| 1970/07/01 - 1973/06/30 || 클라우스 옥스 (Klaus Och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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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07/01 - 1977/06/30 ||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 1976 [[DFB-포칼]] 우승<br />1977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  
| 1973/07/01 - 1977/06/30 ||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 1976 [[DFB-포칼]] 우승<br>1977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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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07/01 - 1977/10/27 || 루디 구텐도르프 (Rudi Gutendorf) || ||  
| 1977/07/01 - 1977/10/27 || 루디 구텐도르프 (Rudi Gutendorf) || ||  
522번째 줄: 543번째 줄:
| 1980/12/19 - 1981/06/30 || 알렉산다르 리스티치 (Aleksandar Ristic) || ||  
| 1980/12/19 - 1981/06/30 || 알렉산다르 리스티치 (Aleksandar Risti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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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07/01 - 1987/06/30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1982 [[분데스리가]] 우승<br />1983 [[분데스리가]] 우승<br />1983 [[유러피언 컵]] 우승<br />1987 [[DFB-포칼]] 우승 ||
| 1981/07/01 - 1987/06/30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1982 [[분데스리가]] 우승<br>1983 [[분데스리가]] 우승<br>1983 [[유러피언 컵]] 우승<br>1987 [[DFB-포칼]]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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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07/01 - 1987/11/09 || 요십 스코블라르 (Josip Skoblar) || ||  
| 1987/07/01 - 1987/11/09 || 요십 스코블라르 (Josip Skoblar) || ||  
576번째 줄: 597번째 줄:
| 2015/03/22 - 2015/04/14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 임시 감독
| 2015/03/22 - 2015/04/14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 임시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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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5 - 2016/09/25 ||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 ||
| 2015/04/15 -  ||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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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6 -  || 마르쿠스 기스돌 (Markus Gisdo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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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번째 줄: 644번째 줄:
| 프리츠 라반트 (Fritz Laband) || 1950-1956 || 선수(수비수)
| 프리츠 라반트 (Fritz Laband) || 1950-1956 || 선수(수비수)
|-
|-
|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 1976-1986<br />1995-1997 || 선수(미드필더)<br />감독
|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 1976-1986<br>1995-1997 || 선수(미드필더)<br>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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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 1956-1962 || 감독
|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 1956-1962 || 감독
641번째 줄: 660번째 줄:
|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 1949-1958 || 선수(리베로)
|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 1949-1958 || 선수(리베로)
|-
|-
|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 1974-1981<br />1987-1990 || 선수<br />감독
|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 1974-1981<br>1987-1990 || 선수<br>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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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 1978-2004 || 마사지사
|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 1978-2004 || 마사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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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 1971-1978 || 선수(공격수)
|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 1971-1978 || 선수(공격수)
|-
|-
|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 1978-1985<br />1995-1998 || 선수(수비수)<br />단장
|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 1978-1985<br>1995-1998 || 선수(수비수)<br>단장
|-
|-
| 위르겐 베르너 (Jürgen Werner) || 1955-1963 || 선수(미드필더)
| 위르겐 베르너 (Jürgen Werner) || 1955-1963 || 선수(미드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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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선수단 ===
=== 현재 선수단 ===
{{축구단 선수 명단/|함부르크 SV|16-17|
 
<div style{{=}}"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축구단 선수 명단/시작|함부르크 SV|16-17}}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
|등번호=1
749번째 줄: 770번째 줄:
|생월=12
|생월=12
|생일=5
|생일=5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FC 산토스]](FC Santos)로 이적</ref>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
|이름=메르김 마브라이
|로마자 이름=Mergim Mavraj
|포지션=수비수
|국적=알바니아
|생년=1986
|생월=6
|생일=9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1. FC 쾰른]](1. FC Köln)에서 영입</ref>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771번째 줄: 780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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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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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18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방출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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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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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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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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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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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1,034번째 줄: 1,042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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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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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틀 끝}}
</div>




1,059번째 줄: 1,068번째 줄:
! 직책 !! 성명 !! 로마자 이름 !! 생년월일
! 직책 !! 성명 !! 로마자 이름 !! 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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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마르쿠스 기스돌 || Markus Gisdol || 1969/08/17
| 감독 || 브루노 라바디아 || Bruno Labbadia || 196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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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치 || 프랑크 프뢸링 || Frank Fröhling || 1978/02/15
| 코치 || 에르딘취 쇠제르 || Erdinç Sözer || 196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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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치 || 프랑크 카스파리 || Frank Kaspari || 1970/11/03
| 코치 || 베른하르트 트라레스 || Bernhard Trares || 196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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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키퍼 코치 || 슈테판 배흐터 || Stefan Wächter || 1978/04/20
| 골키퍼 코치 || 슈테판 배흐터 || Stefan Wächter || 1978/04/20
1,138번째 줄: 1,147번째 줄:
* '''피스 컵''' (1) : 2012
* '''피스 컵''' (1) : 2012
* '''노르트 컵''' (1) : 2013
* '''노르트 컵''' (1) : 2013


=== 선수 기록 ===
=== 선수 기록 ===
1,169번째 줄: 1,177번째 줄:
{{각주}}
{{각주}}
{{독일축구 둘러보기}}
{{독일축구 둘러보기}}
[[분류:분데스리가]]
[[분류:축구팀]]
[[분류:함부르크 SV| ]]
[[분류:함부르크 SV| ]]
[[분류:1887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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