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SV

함부르크 SV
Hamburger SV
Hamburger SV logo.svg
스포츠 팀 정보
종목 축구
리그 2. 분데스리가
설립 1887년 9월 29일
연고지 독일 함부르크
경기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회장 마르셀 얀젠
감독 팀 발터
웹사이트 www.hsv.de

함부르거 슈포어트-페어아인(Hamburger Sport‑Verein e. V.), 즉 함부르크 SV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축구팀이다. 한국에서는 함부르크, 함북, 햄버거 등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Hamburger SV를 줄여서 HSV라고 부른다.[1] 그 밖에 붉은 바지를 의미하는 '롯호젠(Rothosen)', 공룡을 뜻하는 '디노(Dino)' 등 다양한 별칭으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HSV로 통일하기로 한다.

HSV는 원래 축구를 포함하여 총 33개의 분과로 구성된 종합 스포츠 법인으로서 독일 내에서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스포츠 클럽이다. 물론 핸드볼, 아이스하키,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이 소속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HSV라고 하면 남자 축구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프로 데뷔한 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2010년 이후 팀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탓에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전성기에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전력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문이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이제껏 단 한 번도 2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서 막대한 자부심을 지닌 구단이다. [2]

역사[3][편집 | 원본 편집]

구단 설립기 (1887-1933)[편집 | 원본 편집]

함부르크 FC와 SC 게르마니아의 유니폼 및 엠블럼

HSV의 창단일은 공식적으로 1887년 9월 29일이고 이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HSV는 SC 게르마니아(SC Germania von 1887),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 FC 팔케(FC Falke 1906), 세 팀이 합병하여 탄생한 클럽인데, 1887년 9월 29일은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SC 게르마니아의 창단일이며, 정식으로 HSV가 탄생한 날은 1919년 6월 2일이다.[4] 참고로 함부르크 FC는 1914년 2월 26일, 구단명을 함부르크 SV로 바꾸었으며, 그 명칭을 물려받아 지금의 HSV가 탄생했다. 그러나 SC 게르마니아와 FC 팔케가 함부르크 FC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세 전신 구단들 가운데 SC 게르마니아와 함부르크 FC는 합병 이전에도 이미 막강한 팀들이었다. 먼저 SC 게르마니아는 함부르크 지역 리그인 함부르크-알토나 챔피언십(Hamburg-Altonaer Meisterschaft)를 5회 제패했고, 1904년에는 독일 챔피언십(Deutsche Meisterschaft) 최종 라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함부르크 FC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SC 빅토리아(SC Victoria)와 빅토리아-함부르크 88(Victoria-Hamburg 88)이라는 이름으로 임시 전시합병을 하여 한때 북독일 챔피언에 등극한 바 있었다.[5] 반면에 FC 팔케는 위의 두 팀과 비교하자면 별로 주목할 만한 클럽은 아니었고 주로 하부 리그에 머물렀다.

비록 창단 첫 해인 1919-20 시즌에는 SC 빅토리아에 밀려 함부르크 리그(Hamburger Liga)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듬해 북독일 축구연맹의 주도로 창설된 북부 크라이스리가(Norddeutsche Liga Nordkreis)에서는 무패 우승을 거두었고, 이후 남부 크라이스리가 챔피언 하노버 96마저도 제압하면서 마침내 1920-21 시즌, HSV는 첫 북독일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21-22 독일 챔피언십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2년 연속 북독일 챔피언에 등극한 HSV는 독일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여 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1. FC 뉘른베르크와의 결승에서 90분 동안 두 팀은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연장전에서도 골든골이 터지지 않자 결국 심판은 어둠을 이유로 경기 시작 189분만에 게임을 취소하였다. 비슷한 상황은 이어진 재경기에서도 반복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양팀은 다시 한 번 1:1로 정규 시간을 마무리하였고, 연장전이 이어지게 되는데, 뉘른베르크 선수들이 계속된 부상과 퇴장으로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심판은 다시 한 번 경기를 취소하였다. 결국 그해 독일 챔피언 자리는 1922년 11월, 협회의 연방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뉘른베르크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협회가 HSV를 챔피언으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후에 HSV 측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자격 미달이라며 챔피언 자리를 거부한 것이다. 줘도 못 먹냐! 그 결과 1922년 독일 챔피언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22-23 시즌에 HSV는 함부르크 지역의 알스터 크라이스리가(Alsterkreisliga)는 물론이고 북독일 챔피언십마저 제패했으며, 이어서 독일 챔피언십까지 우승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독일 챔피언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리고 5년 뒤인 1927-28에 HSV는 다시 한 번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서 헤르타 BSC를 상대로 시작 20분만에 세 골을 넣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자랑한 끝에 5:2 승리를 거두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요컨대 HSV는 창단 초기부터 북독일의 맹주로서 군림했던 것이다.

그 밖에 이 시기에 짚고 넘어갈 만한 사건은 1928년에 있었던 "축구 혁명"(Fußball-Revolution)이었다. 당시 함부르크 지역의 강팀 9곳과 홀슈타인 킬(Holstein Kiel)은 리그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북독일 축구 연맹에 맞서 "10구단의 라운드"(Runde der Zehn)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운영했고, 결국 최상위 리그의 개수를 11개에서 6개로 축소한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특수한 리그에서도 우승은 당연히 9전 8승 1무를 거둔 HSV의 몫이었다.

나치 집권기부터 분데스리가 출범기까지 (1933-1973)[편집 | 원본 편집]

나치 집권 이후에도 HSV는 여전히 북독일을 대표하는 팀으로 위용을 떨쳤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떳떳하지 못했다. 다수의 클럽 관계자 및 선수들은 나치당, 나치 돌격대, 혹은 나치 친위대에 가입하였으며, 유대계 인사들은 점차적으로 팀 운영에서 배제되었다. 일부 유대계 구성원들이 기부를 통해 1935년에 구단을 파산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명예회장으로 기리고 있는 고(故) 에밀 마르텐스(Emil Martens) 역시 이 시기 동성애를 이유로 거세당한 바 있었다.[6]

한편, 이 시기 도입된 가우리가(Gauliga) 시스템 하에서 HSV는 함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메클렌부르크 지방을 아우르는 노르트마르크 가우리가(Gauliga Nordmark)에 속했다. 이 시기 HSV의 주요 맞수는 함부르크 지역 라이벌인 아임스뷔텔 TV(Eimsbütteler TV)였다. 첫 세 시즌 동안에 HSV는 아임스뷔텔에 밀려 있어야 했고, 1936-37 시즌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다음 시즌에도 HSV가 우승을 거두며 2연패에 성공했지만, 이 시즌에 HSV는 아임스뷔텔과 경기당 득점률까지 따져야 할 만큼 접전을 벌였다.

한편, 노르트마르크 가우리가는 1942년에 함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메클렌부르크 각각의 가우리가로 나누어졌고, 1944-45 시즌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우리가가 폐지되었다. 단, 함부르크에서는 예외적으로 이 때에도 가우리가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HSV는 무패 우승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 축구계에는 오버리가(Oberliga) 체제가 도입되었고, HSV는 1947년 출범한 북부 오버리가(Oberliga Nord)에 속했다.[7] 오버리가 체제 하에서 HSV는 리그가 운영된 11번의 시즌 중 10번을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오랜 기간 북독일의 독보적인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우승을 놓친 1953-54 시즌은 HSV 입장에서 매우 쓰라린 실패의 시간이었다. 당시 HSV는 빌리 슈뢰더(Willi Schröder) 영입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승점 4점을 삭감당했고, 심지어 내부의 불화까지 겹치면서 16개 구단 가운데 11위에 그쳤다.[8] 특히 이때 아르미니아 하노버(Arminia Hannover)를 상대로 당한 2:10의 패배는 아직까지도 HSV 역사에 유일한 두 자리 수 실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9]

HSV의 전설, 우베 젤러

그러나 자고로 최악은 항상 최고와 함께 오는 법이다. 구단에게는 악몽으로 남아 있는 이 시즌에 공교롭게도 HSV는 불과 16세의 어린 유망주를 발굴하게 되는데, 바로 그가 이후 HSV의 상징이자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우베 젤러(Uwe Seeler)였다. 마르틴 빌케(Martin Wilke)와 귄터 말만(Günther Mahlmann)이 팀을 맡아 세대교체를 단행했던 이듬해 1954-55 시즌, 젤러는 이미 팀 동료 귄터 슐레겔(Günther Schlegel)과 함께 28골로 북부 오버리가 득점왕에 오르면서 팀에게 또 한 번의 우승 타이틀을 선물하였다. 이후 그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까지 북부 오버리가에서 9시즌 동안 7차례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1959-60 시즌에는 1. FC 쾰른과의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서 동점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팀에 세 번째 독일 챔피언 자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1963년에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이후 HSV는 한동안 오버리가 시절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베 젤러가 30경기 30골로 분데스리가 초대 득점왕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팀은 대체로 리그 중위권 이하에 머물렀고, 심지어 SV 베르더 브레멘(SV Werder Bremen)과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Eintracht Braunschweig)가 1965년과 1967년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더 이상 북독일의 맹주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지경에 놓였다. 심지어 1966-67 시즌에는 14위라는 굴욕적인 순위를 기록하였고, 그나마 1967-68 시즌에는 전년도 DFB-포칼 준우승에 힘입어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이마저도 AC밀란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또 1968-69 시즌에는 UEFA 컵의 전신인 인터 시티 페어스 컵(Inter-Cities Fairs Cup) 4강에 올랐으나 리그 일정 탓에 경기를 포기하여 탈락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1972-73 시즌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고 리가포칼(DFB-Ligapokal) 초대 우승팀이 된 것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반에 팀은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72년에는 레전드 우베 젤러가 은퇴했고 또 한 명의 레전드 게르트 되르펠(Gert Dörfel)이 팀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빌리 슐츠(Willi Schulz)마저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될 화려한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베테랑들이 팀을 떠났으나, 또 그만큼 많은 젊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페터 노글리(Peter Nogly), 만프레트 칼츠(Manfred Kaltz), 루디 카르구스(Rudi Kargus) 등은 이후 세계적인 선수들로 성장하였다.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편집 | 원본 편집]

HSV의 전성기는 1973년, 페터 크론(Peter Krohn) 당시 신임 회장의 개혁과 함께 시작한다.[10][11] 크론은 음료 회사인 캄파리(Campari)를 팀 최초의 유니폼 스폰서로 유치하였고, 더 많은 관중 유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팀 매출을 전년도 290만 마르크에서 570만 마르크로 끌어올렸는데, 이러한 개혁은 이후 HSV가 이적 시장에서 계속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1974년에 팀은 호어스트 베르틀(Horst Bertl)과 빌리 라이만(Willi Reimann)을 영입하였는데, 당시 크론 회장은 베르틀의 영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팬들이 선수를 산다"(Fans kaufen Spieler)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티켓 값에 소액의 기부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어디서 더러운 상술을...

1975년, 회장직은 크론에게서 파울 벤티엔(Paul Benthien)으로 넘어갔으나, 1973년부터 감독직을 맡은 쿠노 클뢰처(Kuno Klötzer)는 계속해서 팀을 이끌며 탄탄히 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특히 1975-76 시즌 FC 바이언 뮌헨과의 DFB-포칼 4강 경기는 아직까지도 역사적인 명경기로 남아 있다. 당시 연장전에서 HSV는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게 실점을 기록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종료를 불과 5분 남기고 페터 노글리가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홈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뮌헨에서 열린 재경기 또한 극장이었다. 0:0이 지속되던 82분에 바이언은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냈으나 루디 카르구스 골키퍼가 게르트 뮐러(Gerd Müller)의 슛을 막아냈고, 반대로 후반 추가시간에 쿠어트 아이글(Kurt Eigl)이 결승골을 터뜨리며 HSV는 1:0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어진 결승전에서 HSV는 1. FC 카이저슬라우턴(1. FC Kaiserslautern)을 2:0으로 꺾고 DFB-포칼 우승을 차지했고, 펠릭스 마가트(Felix Magath)가 영입된 이듬해에는 벨기에의 RSC 안드레흐트를 꺾고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리며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HSV 시절의 케빈 키건

그러나 1977년, 쿠노 클뢰처 감독이 물러나면서 팀은 잠시 위기를 겪게 된다. 비록 케빈 키건(Kevin Keegan)이 영입되기는 하였으나, 1977-78 시즌에 팀은 대외컵과 DFB-포칼에서는 물론이고 리그에서도 10위에 그쳤고, 신임 단장으로 부임한 귄터 네처(Günter Netzer)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진단 하에 악명 높은 브랑코 제베츠(Branko Zebec)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더욱이 그는 팀 내 문제아였던 스트라이커 게오르크 폴커트(Georg Volkert)를 과감하게 내쳤으며, 전 시즌 2부 리그 득점왕 호어스트 흐루베쉬(Horst Hrubesch)를 비롯하여 지미 하트비히(Jimmy Hartwig), 베른트 베마이어(Bernd Wehmeyer) 등을 영입하였는데, 이러한 네처의 판단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1978-79 시즌에 HSV는 VfB 슈투트가르트를 단 승점 1점 차이로 제치고 역대 네 번째이자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첫 번째로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마지막 경기가 끝난 이후 그야말로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팀의 간판 스타였던 키건은 1978년과 1979년에 각각 오스트리아의 한스 크랑클(Hans Krankl)과 바이언 뮌헨 소속의 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를 꺾고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어 1977년 2위의 한을 풀었는데, 그 중에서도 1978-79 시즌의 키건은 그야말로 비길 자가 없을 만큼 넘사벽의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네처 체제는 시작부터 화끈했다. 특히 1979년에 파울 벤티엔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취임한 볼프강 클라인(Wolfgang Klein)은 네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는데, 이에 힘입어 네처는 1986년까지 단장으로 재직하며 HSV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어진 1979-80 시즌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이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해 준우승을 거두었고, 사흘 뒤에는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승격팀 바이어 04 레버쿠젠(Bayer 04 Leverkusen)에 덜미를 잡히며 단 승점 2점 차이로 바이언 뮌헨에 리그 우승을 내주어야 했다. 그야말로 더블 콩을 삶은 것이었고, 이에 실망한 케빈 키건은 쓸쓸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해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었던 유러피언 컵 준결승은 오늘날까지도 팀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HSV는 0:2의 완패를 당했으나,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 팀은 만프레트 칼츠와 호어스트 흐루베쉬가 각각 2골씩을 터뜨리며 5:1의 대승을 거두었고, 이로써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하였다.[12] 이 경기를 두고 네처 단장은 "내가 HSV에서 본 가장 멋지고 훌륭했던 경기"라고 추켜세웠으며,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수상 또한 경기 직후 HSV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한편, 이어진 1980-81 시즌에는 제베츠 감독이 알콜 중독을 이유로 12월에 불명예 퇴진하였으며, 팀도 2년 연속으로 바이언 뮌헨에 밀려 리그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 시즌이 종료된 후에 팀이 지금까지 구단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에른스트 하펠(Ernst Happel)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HSV는 하펠의 지도 하에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국내적으로 2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2번의 준우승, 그리고 DFB-포칼 1회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UEFA 컵과 유러피언 컵에서 각각 준우승과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니까 1970년대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FC 바이언 뮌헨의 적수로 활약했다면, 1980년대에는 에른스트 하펠이 이끄는 HSV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분데스리가의 양강 체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유러피언 컵을 제패하고 함부르크에 돌아온 호어스트 흐루베쉬와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 함께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하펠의 첫 해였던 1981-82 시즌에 팀은 1978-79 시즌에 이어 두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동시에 UEFA 컵에서 준우승을 거두었다. 특히 비록 UEFA 컵 결승에서 IFK 괴테보리(FK Göteborg)에 1·2차전을 모두 내주며 무너졌지만, 리그에서는 1982년 1월 16일 이후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으며 1. FC 쾰른을 꺾고 왕좌에 올랐고, 이 무패 기록은 1982-83 시즌까지 이어져 1983년 1월 29일까지 팀은 총 36경기 연속 무패의 대기록을 수립하였다.[13] 그리하여 HSV는 1982-83 시즌에 브레멘을 골득실 차이로 밀어내고 리그 2연패를 일구어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미셸 플라티니와 다수의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 멤버들로 포진한 유벤투스 FC를 1:0으로 꺾고 마침내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이는 아직까지도 구단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성취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에 우주의 기운을 몽땅 끌어다 쓴 탓인지 이후 HSV는 두 번 다시는 이때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3-84 시즌에 팀은 인터컨티넨탈 컵과 UEFA 슈퍼컵을 포함하여 총 5개 대회에 나갔으나, 벨기에로 떠난 간판 스트라이커 호어스트 흐루베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무관에 그쳤다.[14] 그리고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고, 1986-87 시즌 DFB-포칼 우승을 끝으로 HSV의 화려했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무관의 시대와 중흥을 위한 노력 (1987-2009)[편집 | 원본 편집]

1986년 귄터 네처 단장에 이어 1987년에 볼프강 클라인 회장과 에른스트 하펠 감독마저 떠나면서 HSV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7명의 회장과 8명의 감독들이 팀을 거쳐갔다. 안정감이 부족하기는 선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활을 위해 팀은 계속해서 이적시장을 두드렸지만, 그 결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가령 1987년에는 골키퍼 믈라덴 프랄리야(Mladen Pralija)를 영입했으나 불과 1년만에 다시 팀을 떠났고, 1988년에는 11명의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얀 푸르톡(Jan Furtok) 정도만이 성공적인 영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구단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성적 또한 당연히 바닥을 쳤다. 1986-87 시즌에 팀은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곧바로 6위로 추락했고, 이듬해 잠시 4위로 반등하기도 했지만 1989-90 시즌에는 11위로 추락했다. 1990-91 시즌에는 신입생 토마스 돌(Thomas Doll)과 프랑크 로데(Frank Rohde)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5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때를 제외하면 1989-90 시즌부터 6년 동안 팀은 매년 10위권 바깥을 맴돌았다.[15] 마찬가지로도 대외적으로도 1989-90 시즌 UEFA 컵 8강이 이 기간 동안에 그나마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신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레전드 우베 젤러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팀은 채무를 청산하고 5백만 마르크의 예비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10월 베노 묄만(Benno Möhlmann)의 후임으로 취임한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팀을 리그 5위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수년 만에 UEFA 컵 출전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HSV가 긍정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어진 1996-97 시즌에 마가트는 UEFA 컵 8강과 DFB-포칼 4강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절치부심한 HSV는 1997년 여름, 프랑크 파겔스도르프(Frank Pagelsdorf)를 새로 감독으로 선임하고 이적 시장에서 7백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 21라운드까지 팀은 5승 5무 11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한때 리그 꼴찌까지 추락했다가 막판 뒷심으로 간신히 9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1999-2000 시즌에 13년 만의 최고 성적인 리그 3위를 기록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그때를 제외하면 파겔스도르프와 함께한 4년 동안 팀은 전반적으로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쿠어트 야라(Kurt Jara) 역시 별다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좌)와 베른트 호프만(우)

HSV의 중흥은 2002-03 시즌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즌에 팀은 분데스리가를 4위라는 호성적으로 마무리지었으며, 이어진 DFB-리가포칼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4:2로 꺾고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때 있었던 운영진의 변화였는데, 2002년 8월, 1986-87 DFB-포칼 우승 멤버였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Dietmar Beiersdorfer)가 단장으로 팀에 돌아왔으며, 2003년 2월에는 베른트 호프만(Bernd Hoffmann)이 새로 운영이사회장에 선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이 함께 일했던 2009년까지를 HSV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먼저 호프만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HSV의 재정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바이어스도르퍼는 그 돈으로 다수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이 다시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 토프묄러(Klaus Toppmöller) 감독이 팀을 이끈 2003-04 시즌에 이어 토마스 돌(Thomas Doll)이 지휘봉을 잡은 2004-05 시즌에도 HSV는 8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에 그쳤다. 당시 수비 쪽에서는 새로 영입된 다니엘 반 바이텐(Daniel van Buyten)과 칼리트 불라루즈(Khalid Boulahrouz)가 눈부신 활약을 펼쳐주었으나, 반대로 공격 쪽에서는 야심차게 데려온 벤야민 라우트(Benjamin Lauth)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면서 아쉬움을 남겼다.[16] 함께 영입된 에밀 음펜자(Emile Mpenza)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이어진 2005년 여름, HSV는 AFC 아약스의 영스타 라파엘 반 더 바르트(Rafael van der Vaart)와 흥부자 티모시 아투바(Thimothée Atouba), 그리고 만능 수비 자원 기 데멜(Guy Demel) 등을 영입하며 탄탄한 전력 보강을 이루었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UEFA 인터토토 컵 우승자 자격으로 UEFA 컵에 진출한 HSV는 오랜만에 8강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고, 분데스리가에서는 6년 만의 최고 성적인 3위에 올랐다. 특히 반 바이텐불라루즈가 중심이 되고 라이트백으로 변신한 메흐디 마다비키아(Mehdi Mahdavikia)와 왼쪽의 아투바가 버티는 포백 라인은 리그 최소 실점인 30골만 허용하며 최고의 짠물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 뒤에는 위기가 따라오는 법이다. 시즌이 끝나자 수비의 버팀목이었던 반 바이텐불라루즈가 나란히 바이언첼시 FC로 이적했고, 공격진을 먹여 살리던 노장 세르게이 바르바레스(Sergej Barbarez) 또한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났다. 물론 거액의 이적료를 챙긴 팀은 곧바로 당대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손뽑히던 뱅상 콤파니(Vincent Kompany)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후안 파블로 소린(Juan Pablo Sorin)을 비롯하여 공수에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였으나, 요리스 마타이센(Joris Mathijsen)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팀은 챔스 광탈과 더불어 리그에서도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감독 교체였다. 19라운드를 끝으로 토마스 돌 감독은 경질되었고, 네덜란드 출신의 휩 스테벤스(Huub Stevens)가 선임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적적인 반전이 시작되었다. 단 1승 12무 6패로 꼴찌던 달리던 HSV는 15경기에서 9승을 챙기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7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고, 반전의 주역 반 더 바르트는 곧 강팀들의 위시 리스트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징징거림 또한 본격화되기에 이르는데...

이랬던 반 더 바르트는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어진 2007-08 시즌에도 스테벤스 감독의 지도력은 빛을 발했다. 반 더 바르트가 여전히 폭발적인 활약을 이어가는 가운데, 4-4-2에서 4-2-3-1로 포메이션을 바꾼 이후 다비트 야롤림(David Jarolim)과 나이젤 데 용(Nigel de Jong)이 3선에서 피를로-가투소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였고 팀은 한때 리그 2위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17] 그러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팀은 4위로 밀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만료된 스테벤스 감독은 크론병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고자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말았다.

스테벤스 감독이 떠나고, 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 주장 반 더 바르트마저도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스테벤스의 후임으로 취임한 마틴 욜(Martin Jol)은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기존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팀은 리그와 UEFA 컵, 그리고 DFB-포칼까지 세 개 대회에서 모두 쾌조의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단, 신입생 중 치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UEFA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HSV의 몰락과 HSVPlus (2009-2014)[편집 | 원본 편집]

HSV의 몰락은 지도부의 내분과 함께 시작하였다.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의 독단적인 구단 운영에 불만을 품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단장과 마틴 욜 감독이 나란히 팀을 떠난 것이다. 결국 단장 자리는 한 시즌 내내 공석으로 남았고, 감독으로는 브루노 라바디아(Bruno Labbadia)가 선임되었으나, 라바디아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젊은 감독에 불과했으며, 특히 바로 전 시즌에도 레버쿠젠에서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경질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10 시즌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공격의 핵인 이비차 올리치(Ivica Olić)가 바이언으로 이적하기는 했으나, 여름 동안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한 HSV의 선수층은 여전히 화려했고, 그러나 마커스 베리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7라운드까지 팀은 무패로 리그 선두를 질주했다. 그러나 전반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헤어날 수 없는 부진이 시작되었고, 결국 HSV는 시즌을 7위로 마감하며 6년 만에 대외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결승전이 홈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만큼 많은 팬들의 기대를 끌어모았으나, 4강에서 풀럼 FC(Fulham FC)에 패하며 탈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스러운 행보 속에서 당연하게도 라바디아는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이처럼 실망스런 한 해를 보낸 HSV에서는 이사진에서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독단적 판단과 투명성 부족한 경영으로 팀의 위기를 초래한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은 거센 내부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석이던 단장 자리에는 바스티안 라인하르트(Bastian Reinhard)가 새로 부임했으며, 감독으로는 2006-07 시즌 VfB 슈투트가르트의 우승을 견인했던 아어민 페(Armin Veh)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이제 막 선수 생활을 마친 초짜였으며, 페 역시 최근 두 시즌 동안 슈투트가르트볼프스부르크에서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한편, 동시에 이 무렵은 세계적인 운송회사 퀴네+나겔(Kühne + Nagel)의 회장인 억만장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Klaus-Michael Kühne)가 본격적으로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HSV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HSV의 팬이었던 그는 2010년, 총 1,250만 유로의 금액을 투자하여 마르첼 얀젠(Marcell Jansen), 파올로 게레로(Paolo Guerrero), 데니스 아오고(Dennis Aogo), 하이코 베스터만(Heiko Westermann), 데니스 디크마이어(Dennis Diekmeier) 등 일부 선수들의 지분 1/3을 사들였다. 비록 당시 퀴네는 자신은 그저 팀을 도우려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훗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게 된다.

성적 부진은 2010-11 시즌에도 이어졌다.[18] 전술한 베스터만디크마이어에 강등된 헤르타 BSC의 주축이었던 야로슬라프 드로브니(Jaroslav Drobný)와 고이코 카차르(Gojko Kacar) 등에 이르기까지 착실한 선수 보강을 이루었으나, 정작 성적은 여전히 중위권을 맴돌았고, 특히 수비 쪽에서는 줄부상이 이어지며 중앙 미드필더인 카차르가 센터백으로 출전하는 상황까지도 자주 연출되었다. 결국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하에서 아어민 페는 2011년 3월 13일, 바이언에 0:6으로 참패한 후 조기 경질되었고, 수석코치였던 미하엘 외닝(Michael Oenning)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또한 3일 뒤에는 맹렬한 비판에 시달리던 베른트 호프만이 퇴진하고 감독위원회 소속이던 칼-에드가 야르호프(Carl-Edgar Jarchow)가 신임 운영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리하자면, 2010-11 시즌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HSV는 8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또 다시 대외컵 진출에 실패했다. 그해 재정 손실은 거의 5백만 유로에 근접했다.

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다.[19]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만시엔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20] 이후 소방수로 선임된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 감독 하에서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했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2012-13 시즌에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에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시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였다. 팀은 그의 투자에 힘입어 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또 너냐...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을 하고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성적이 추락하면서 결국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사실 이마저도 골키퍼 레네 아들러(René Adler)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단순 투자자로 남겠다던 퀴네는 2012년 여름에 이미 독자적으로 반 더 바르트 영입을 추진했던 데 이어 2013년에도 핑크 감독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이사회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펠릭스 마가트와 접촉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구단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가 이끄는 운영이사회는 그런 퀴네의 입김에 끌려다니며 우왕좌왕했고, 신중한 재정 관리와 장기적인 관점을 모토로 내걸었으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아르네센의 후임으로는 올리버 크로이처(Oliver Kreuzer)가 새로운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족한 경력 탓에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2013-14 시즌은 출반부터 삐걱거렸다. 시즌 5라운드가 종료된 상황에서 구단은 15위까지 떨어졌고, 핑크 감독은 야심차게 데려온 애재자 자크 주아(Jacques Zoua)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퀴네가 염원하던 대로 경질되었으며, 약 일주일 뒤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에 올려놓았던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Bert van Marwijk)가 새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다. 반 마르바이크의 지도 하에 HSV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U-19 팀에서 콜업된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단숨에 주전 센터백으로 발돋움했으며, 신입생 피에르-미헬 라조가(Pierre-Michel Lasogga)와 임대에서 복귀한 하칸 찰하놀루(Hakan Çalhanoğlu)가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는 전반기 이후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고, 막시밀리안 바이스터(Maximilian Beister)와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ć)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등 스쿼드 전체에 부상이 들끓은 결과 성적은 수직하락했다. 특히 20라운드 헤르타 BSC와의 홈 경기에서는 0:3의 스코어로 역사적인 6연패를 기록하자 분노한 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주차장에 모인 300여명의 팬들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야르호프 운영이사회장과 크로이처 단장, 그리고 선수들이 직접 나서서 팬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계란과 쓰레기만 날아올 뿐이었다.[21] 이에 감독이사회는 이튿날 비공개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현 운영이사회와 감독의 신임 여부에 대해 토의를 벌였고, 비록 당장에는 재신임이 결정되었으나, 이어진 바이언과의 DFB-포칼 4강전과 리그 21라운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원정에서 모두 패하자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감독은 마침내 경질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때를 구단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일컬었다.

반 마르바이크 경질 직후 HSV는 발 빠르게 하노버 96에서 해임된 미르코 슬롬카(Mirko Slomka)를 그 후임으로 선임하였다. 비록 첫 경기에서 슬롬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지만, 30라운드부터는 선수단의 줄부상 속에 마지막 다섯 경기를 모두 패하며 27점으로 16위를 기록했고, 팀은 가까스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22] 다행히 여기에서 라조가의 득점에 힘입어 팀은 원정 팀 다득점 원칙에 따라 SpVgg 그로이터 퓌어트(SpVgg Greuther Fürth)를 꺾고 분데스리가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그 시즌 HSV의 승점이었던 27점은 승리팀이 승점 3점을 차지하는 규정이 도입된 이래 분데스리가에서 잔류한 구단이 확보했던 가장 낮은 점수에 해당했다.

HSVPlus를 발의한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

이처럼 HSV에게 2013-14 시즌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개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2013년 9월,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Ernst-Otto Rickhoff) 전 감독이사회장은 HSVPlus라는 급진적인 개혁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프로 축구 분과를 전체 법인에서 독립된 주식회사로 스핀오프함으로써 구단 운영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고, 동시에 총회의 동의 없이도 25% 미만에 해당하는 주식회사의 지분을 판매함으로써 부족한 자금을 유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물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 전 회장, 레전드 만프레트 칼츠 등 구단 내외의 일부 저명인사들은 이를 전통을 무시하고 영혼을 파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는데, 사실 이와 같은 비판에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 HSVPlus 그 자체는 상당히 획기적인 대안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있었고, 이들 반대자들은 바로 이 퀴네에 의해 구단이 좌지우지되는 비극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 1월 기준으로 법인의 부채가 무려 1억 유로에 육박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수는 HSVPlus를 지지하였다. 못 먹어도 일단 고! 결국 7,134명이 참가한 2014년 1월 19일의 정기 총회 표결에서 79.4%의 동의를 받아 운영이사회는 향후 HSVPlus의 실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이어진 5월 25일의 총회에서 HSVPlus는 9,702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86.9%의 지지를 받아 최종 통과되었다. [23]

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퀴네+나겔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HSVPlus 이후의 HSV (2014-현재)[편집 | 원본 편집]

바이어스도르퍼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린 HSV는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비록 찰하놀루의 이적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팀은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러한 빅사이닝을 토대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슬롬카는 조기에 경질되었고, 여러 유명한 이름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팀은 결국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24][25]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화시키며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팀은 전반기 단 19골을 내주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해놓고도 득점에서 9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26] 이에 팀은 겨울에 노장 공격수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 만에 재영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거기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20라운드 바이언 원정에서 0:8이라는 재앙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초짜 감독은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HSV는 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부진하였고, 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27]

잔류의 기쁨에 미쳐 날뛰는 HSV 선수 및 관계자들

친바우어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HSV 행이 유력했던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감독이 막판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행선지를 바꾸면서 2009-10 시즌에 이미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라바디아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친분에 힘입어 다시 소방수로 HSV에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팬들의 머릿속에는 2009-10 시즌의 악몽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라바디아는 VfB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감독으로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면서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 고이코 카차르의 부활에 힘입어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친 결과 팀은 꼴찌에서 16위로 올라서며 극적으로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칼스루헤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데 이어 원정에서의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며 팀은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i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서 시즌 내내 계륵이었던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가 역전골 혹은 속죄골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한 것이다.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첫 해에 쓰라린 실패를 겪자 팀은 대대적으로 선수단 체질 개선에 나섰다. 노쇠화가 두드러진 그 놈의 지긋지긋한 반 더 바르트베스터만을 비롯하여 고액 주급자들이 대거 방출되었고, 그 자리는 유망주와 알짜 영입으로 채워졌다. 대형 영입이라고는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아론 헌트(Aaron Hunt)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2015-16 시즌은 적어도 초반에는 긍정적이었다. 레네 아들러 골키퍼의 선방과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센터백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의 안정된 수비, 나아가 살아난 라조가의 득점력에 힘입어 팀은 한때 대외컵 진출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안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라바디아 감독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사람만 좋아서 선수단 관리자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고,[28] 전술가로서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Matthias Ostrzolek)으로 대변되는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무색무취의 롱볼 축구로 비난을 받았다. 거기다가 최전방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진까지 겹치면서 시즌 막판에는 한때 다시 잔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드디어 각성한 초사이언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의 활약에 힘입어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내용적으로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축구 외적인 문제는 보다 명확했다. 야심차게 시작된 HSVPlus는 그 발의자였던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가 스스로 "HSVPlus는 죽었다"(HSVPlus ist tot)라고 선언할 만큼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29] 리크호프가 바랐던 HSVPlus의 목적은 지분 판매로 확보한 자금으로 빚을 갚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면서 유망주에 투자하여 팀을 장기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이상은 철저히 실패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그 자금을 빚을 갚거나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이적시장에 투자함으로써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성적을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은 대부분 기대 이하였고, 성적은 여전히 강등을 걱정해야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은 또 다시 부채를 끌어와 이적시장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구단은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이후 무려 약 6천만 유로를 선수영입에 사용했음에도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악순환 속에서 퀴네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질 뿐이었다.[30]

결국 그 책임은 페터 크내벨 단장의 해임으로 이어졌다.[31] 그리고 단장직을 겸임하게 된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퀴네의 후원과 왕년의 감각으로 2016년 여름 대대적인 선수 보강에 나섰다. 비록 총 지출은 3천만 유로를 상회했으나, 필립 코스티치(Filip Kostić), 알렌 할릴로비치(Alen Halilović)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점에서 일단 팬과 언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17 시즌, 팀은 1라운드 잉골슈타트 전 무승부 이후 4연패를 당하면서 2011-12 시즌 이후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다. 그 결과 라바디아 감독은 경질되었고, 과거 TSG 1899 호펜하임을 이끌었던 마르쿠스 기스돌(Markus Gisdol)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32]

상징물[편집 | 원본 편집]

엠블럼[편집 | 원본 편집]

HSV의 엠블럼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디자인의 자체는 '전원 승선'을 알리는 깃발 신호인 '파란 페터'(Blaue Peter)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파란 페터는 파란 바탕에 커다란 하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선박용 깃발 신호인데, 여기에 SC 게르마니아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징색이었던 파란색과 검은색을 디자인에 반영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지금의 엠블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으로 미루어 볼 때, HSV의 엠블럼은 항구도시로서 함부르크 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HSV는 원정 경기를 치르러 떠날 때 선수단이 출발했다는 의미로 이 '전원 승선'(Alle Mann an Bord)이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한편, 엠블럼 한가운데의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은 흔히 '라우테'(Raute)라고 일컬어지는데, 비록 시기에 따라 이 라우테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눈에 띄는 디자인 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HSV의 엠블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실질적으로 엠블럼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33] 한편,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는 2016년 4월 12일, 세계 최악의 엠블럼으로 HSV의 문장을 선정하였다.[34]


유니폼[편집 | 원본 편집]

HSV의 유니폼은 기본적으로 하얀 상의에 붉은 하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연고지인 함부르크 시를 기념하여 한자동맹의 색깔인 붉은색과 흰색을 디자인에 반영한 결과이다. 1973-74 시즌까지 팀은 스폰서 로고 없이 유니폼을 사용하였으나, 당시 회장이었던 페터 크론(Peter Krohn)이 개혁의 일환으로 음료 회사인 캄프리(Campri)와 계약을 맺어 1974-75 시즌부터 구단은 유니폼 스폰서를 유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대 HSV의 유니폼 스폰서 명단은 아래와 같다.

시즌 스폰서 비고
1974-76 Campri 음료회사
1976-79 Hitachi 전자기기
1979-87 BP 석유회사
1987-94 Sharp 전자기기
1994-95 TV Spielfilm 잡지회사
1995-00 Hyundai 현대자동차
2000-03 TV Spielfilm 잡지회사
2003-06 ADIG 금융투자
2006- Emirates 항공사


응원가[편집 | 원본 편집]

Hamburg, meine Perle : 현재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응원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함부르크, 나의 진주'라는 뜻인데, 홈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 시작 전에 음악가이자 구장 아나운서인 로토 킹 카를(Lotto King Karl)이 직접 크레인을 타고 홈 팬들 앞에서 이 곡을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HSV Forever & Ever : 이 곡 역시 HSV의 응원가들 가운데 투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Hamburg, meine Perle가 연주된 후에 고정적으로 흘러나온다.

Auf geht's Hamburg schießt ein Tor : 득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부르는 곡으로 우리말로 한다면 '함부르크 한 골 넣자' 정도의 의미이다. 이 역시 거의 매 경기 빠짐없이 불리는 곡이지만, 국가대표 및 다른 팀들 역시 Hamburg 자리만 바꾸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HSV만의 응원가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그밖에도 HSV의 응원가로는 무수히 많은 곡들이 있으나, 일단은 그 수가 너무 많고 오늘날 그다지 자주 불리지 않는 곡들이 대부분인 만큼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구호[편집 | 원본 편집]

HSV 팬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구호로는 Nur der HSVDie Raute im Herzen을 뽑을 수 있다. 전자는 '오직 HSV'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라우테는 가슴에'라는 뜻이다.

마스코트와 헤어만 리거[편집 | 원본 편집]

HSV의 마스코트, 디노 헤어만

디노 헤어만(Dino Herman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HSV의 마스코트는 2003년 8월 24일, 분데스리가 창설 40주년을 기념하여 FC 바이언 뮌헨과의 경기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마스코트가 공룡 형태로 디자인된 것은 단 한 번도 하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팀이라는 이유로 HSV가 분데스리가의 공룡(Dino)이라고 널리 일컬어지기 때문이며, 그 이름에 '헤어만'이 쓰인 것은 HSV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마사지사, 헤어만 리거(Hermann Rieger)를 기리기 위함이다. 한편, 디노 헤어만의 등번호는 87번인데, 이는 팀의 공식 창단연도가 1887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스코트가 탄생한 것은 물론 상업적인 이유, 특히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함이 컸으나, 오늘날 디노 헤어만은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HSV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구단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르면, 디노 헤어만은 키가 210cm에 몸무게는 비만이며, 취미는 HSV,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먹기, 자기 등이라고 한다.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세워진 헤어만 리거의 동상

한편, 2014년 2월 18일에 사망한 마사지사, 헤어만 리거는 HSV 팬들 사이에 진정한 HSV인으로서 추앙받는 존재이다. 1941년 10월 2일, 바이언 주의 미텐발트(Mittenwald)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FC 바이언 뮌헨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만프레트 칼츠의 소개로 1978년부터 HSV로 옮겨왔고, 이후 암 투병 때문에 2004년에 은퇴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오랜 기간 수많은 선수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큰 힘이 되었으며, 구단은 비(非)선수 출신으로는 예외적으로 그런 그를 위해 은퇴 경기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자,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는 2014년 3월 2일, 3천여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2015년 2월 18일, 그의 1주기를 기념하여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편, 고향 미텐발트(Mittenwald)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헤어만 리거 길'(Hermann-Rieger-Weg)이 있다.

분데스리가 시계[편집 | 원본 편집]

분데스리가 시계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홈 서포터석에 해당하는 북쪽 관중석(Nordtribüne) 중 22A 블럭 위, 즉 구장 북서쪽 방향 중앙 부근에는 '분데스리가 시계'(Bundesliga-Uhr)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계는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물렀던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데, 앞부터 차례대로 연, 일, 시, 분, 초 순으로 표기된다. 무엇보다도 이는 독일 내 분데스리가를 개근한 유일한 클럽으로서 HSV가 품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단이 강등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언론들은 이 시계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내용으로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한편,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분데스리가 시계와 마찬가지로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무른 시간을 보여주는 위젯을 찾아볼 수 있다.

시설[편집 | 원본 편집]

구장[편집 | 원본 편집]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Volksparkstadion)은 함부르크 서부 알토나(Altona)의 바렌펠트(Bahrenfeld) 지역 내 폴크스파크(Volkspark)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간단히 폴크스파크 공원에 있어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인 것이다. 방문하려면 지하철 S3 혹은 S21 노선을 타거나 혹은 22번 버스를 타고 슈텔링엔(Stellingen)에서 내린 후 통로를 지나 고가 육로를 따라 이정표를 잘 살펴 가며 지옥 끝까지 걸으면 된다. 워낙 한적한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지라 경기 없는 날은 휑하고 한산하기 짝이 없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을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아마도 경기장이 보일 것이다.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유럽 축구연맹의 분류 기준에 의거할 때 최고 등급인 네 번째 분류에 해당하는 축구 전용 구장으로서 A매치를 비롯하여 각종 국내외 축구대회 경기를 유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 및 2006 독일 월드컵, 1988년 유로 대회와 2010년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전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현재 구장 소유권은 HSV-슈타디온 HSV-자산관리 유한합자회사(HSV-Stadion HSV-Vermögensverwaltungs GmbH & Co. KG)가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이 HSV-아레나 유한합자회사(HSV-Arena GmbH & Co. KG)에 임대해 주는 형식으로 구장이 운영되고 있다.

1937년 증축 이후의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

그러나 처음부터 HSV의 홈구장이 이곳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었던 것은 아니며, 창단 당시에는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가 사용하던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Sportplatz am Rothenbaum)을 홈으로 삼았다.[35] 이후 1925년 9월 11일, 구스타프 욀스너(Gustav Oelsner)의 설계에 따라 현재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위치에 건축된 알토나 슈타디온(Altonaer Stadion)이 그 문을 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HSV는 관중이 많이 몰리는 큰 경기가 있을 경우에만 이곳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경기는 계속하여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에서 치르었다.

그러던 중 알토나 슈타디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에 함부르크 주정부와 시의회는 1951년 6월, 경기장의 신축을 결정하였다. 이번에도 구스타프 욀스너가 설계를 주도하였고, 시내의 폭격 잔해 일부가 건축자재로 활용되었다. 새 구장은 1953년 7월 12일, 마침내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당시 구장은 20,000석의 좌석을 포함하여 총 75,000석을 확보한, 서독에서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Olympiastadion)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으나, 그 시기 대부분의 구장들이 그랬듯 축구 전용 구장은 아니었고, 그라운드 바깥에는 육상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다.

재건 당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초기 모습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 HSV의 홈구장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그 후로도 10여년이 지난 1963년의 일이었다. 독일 축구협회가 낡은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 사용을 금지하면서 불가피하게 구단이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으로 이사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은 1974년 서독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차례 리모델링을 거쳤다.[36] 이를 통해 한쪽 측면에 새로 관중석이 추가되고 20,000석이 지붕에 덮였으며, 전자 전광판이 설치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관중 수용 규모 자체는 61,200명으로 다소 줄었으나, 그 중 좌석은 28,500석으로 다소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악명 높은 HSV 울트라스들은 서쪽 관중석, 특히 E 블럭 구역(Westkurve)을 차지하고 열렬한 응원전을 벌였다.

구장이 건축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점차 시설 낙후로 인한 안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다수의 팬들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한 팬이 추락사했으며, 1979년 리그 우승 당시에는 경기 종료 이후 천여 명의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려 시도하다가 71명이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결국 1998년 4월, 당시 회장이었던 우베 젤러는 대규모 리모델링 계획을 발표했으며, 구단은 형식적인 금액에 함부르크 시로부터 구장 소유권을 구입, 시즌 종료 후에 1억9천만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대대적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였다.[37]

독일 축구협회의 방침에 따라 구장은 철근 구조의 최첨단 기술로 건축되었으며, 그 각도도 90도 회전되었다. 관중 수용 규모는 총 55,400명으로 다시 한 번 감소하였으나, 좌석은 45,700석으로 크게 늘었고, 그 중 비즈니스석이 1,750석, 각각 10-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칸막이실이 50개였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그 규모가 이보다 다소 증가하여 총 57,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이 중 47,000석이 좌석이며 비즈니스석도 4,200석에 이른다.[38] 그리고 개축 이후 홈 팬들은 북쪽 관중석(Nordtribüne)을, 원정 팬들은 남쪽 관중석과 서쪽 관중석 사이의 모서리 부분을 각각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공사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은 완전한 축구 전용 구장이 되었다.[39]

오늘날의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공사는 2000-01 시즌의 개막과 함께 완료되었고, 이 시기부터 HSV는 구장의 명명권을 사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터넷 서비스 기업인 AOL이 3천만 마르크에 명명권을 매입하여 구장은 AOL 아레나(AOL Arena)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계약은 2005년에 2년 더 연장되었다. 이후 2007년 6월 4일부터 구장은 2013년까지 HSH 노르트방크 아레나(HSH Nordbank Arena)로 불리게 되었으나, HSH 노르트방크가 재정난을 겪으며 계약을 조기 해지, 2010년 7월부터는 임테흐 아레나(Imtech Aren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40] 그리고 2015년 1월 22일,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억만장자 후원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연 4백만 유로에 4년간 구장 명명권을 구입, 구장명을 원래 이름대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41] 이로써 HSV는 명명권을 판매한 분데스리가 구단들 가운데 최초로 옛 명칭을 회복한 팀이 되었으며, 2015년 7월부터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옛 구장이었던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1989년 8월 19일, MSV 뒤스부르크(MSV Duisburg)와의 DFB-포칼 1라운드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2군 이하 혹은 여자 축구 팀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함부르크 주정부는 마침내 결국 이 낡은 구장의 철거를 결정하였다. 비록 HSV와 팬들은 이곳을 기념물로서 보호 관리 하에 두고자 노력했으나, 1997년에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주거 시설과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상태다.

그밖에 HSV 구장 내에는 팬샵과 박물관, 그리고 '라우테'(Die Raut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42] 박물관 앞 매표소 직원에게서 박물관 입장 및 구장 투어 티켓을 구매할 수 있으며, 구장 투어를 신청하면 정해진 시간에 예쁜 누나, 아니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시설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다만, 독일어 서비스만 제공한다는 사실은 함정이다. 한편,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왼쪽, 즉 남쪽에는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경기가 없는 날에는 거의 매일 이곳에서 공개 훈련이 진행된다. 구단 홈페이지에 훈련 일정이 공지되니 해당 시간에 방문하면 무료로 팀 훈련을 구경할 수 있다. 특히 훈련 종료 이후에는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현재 유소년 시설인 HSV 캠퍼스(HSV-Campus)가 공사 중에 있는데, 2017년 완공 예정이다.

그리고 폴크스파크 공원에는 축구 경기장 외에도 HSV 법인 소속의 다른 스포츠 팀들을 위한 경기 시설도 함께 건축되어 있다. 구장 오른쪽, 즉 북쪽에는 2002년에 건설된 바클레이카드 아레나(Barclaycard Arena)가 있는데, 이곳은 법인 소속 아이스하키 팀 함부르크 프리저스(Hamburg Freezers)와 핸드볼 팀 HSV 함부르크(HSV Hamburg)의 홈구장으로 활용되며, 경기가 없을 때는 자주 콘서트 시설 등으로 활용되기도 한다.[43] 또한 그 너머에는 폴크스방크 아레나(Volksbank Arena)가 있는데, 이곳 역시 빙상 스포츠 및 구기 종목의 훈련장 및 경기장으로 활용쓰인다.

한편, U-17 팀부터 2군까지는 볼프강 마이어 운동장(Wolfgang-Meyer-Sportanlage)을, 나머지 U-16 이하 팀들은 노르더슈테트(Norderstedt) 소재 파울 하우젠쉴트 운동장(Paul-Hausenschild Anlage)을 각각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HSV 캠퍼스[편집 | 원본 편집]

구단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유소년 육성의 효율화를 위해 HSV 캠퍼스(HSV-Campus) 건설을 계획한 구단은 그해 9월 29일, 건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팬들을 상대로 2019년을 만기에 연이율을 6%로 하는 총 1,750만 유로의 채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 운영이사회는 이 금액을 당장의 부채 청산에 써 버렸고, 이후 캠퍼스 건축은 무기한 유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HSV 캠퍼스의 예상 조감도

그러나 2015년 1월 25일, 이대로 좌절될 것만 같았던 캠퍼스 건축 계획은 에른스트 오토(Ernst Otto) 전 감독이사회원이 1천만 유로를 지원하기로 약속하면서 다시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와 에른스트 오토가 각각 75%와 25%의 지분을 갖는 형태로 HSV 캠퍼스 유한회사(HSV-Campus GmbH)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가 HSV 축구 주식회사에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및 그 훈련장 앞 4,600 평방미터 규모의 부지를 임대해주는 형식으로 그해 8월, 2017년 여름 완공을 목표로 HSV 캠퍼스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HSV 캠퍼스는 U-15 팀부터 2군까지를 수용할 예정이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캠퍼스처럼 학업 교육, 각종 편의시설, 심지어 일부 선수들에게는 기숙사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HSV 캠퍼스의 운영은 오토 스포츠 재단 운영이사회장인 란도 아우스트(Rando Aust)와 HSV 축구 주식회사 운영이사회의 요아힘 힐케(Joachim Hilke)가 담당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HSV 축구 주식회사 (HSV Fußball AG)[편집 | 원본 편집]

HSV 축구 주식회사(Hamburger Sport-Verein Fußball AG)는 2014년 5월 총회의 결정에 따라 HSV 법인(Hamburger Sport-Verein e.V.)에서 독립하였으며, 그해 7월 7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HSV 축구 주식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라고 볼 수는 없다. 1990년대 초, 당시 회장이던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는 구단의 재정 개혁을 위해 6월 27일에 HSV 스포츠 주식회사(HSV Sport AG)를 설립하고 지분 판매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자 한 바 있었는데, 적당한 투자자를 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당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44] HSV 축구 주식회사는 바로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HSVPlus의 개혁안에 따라 5월 총회 이후 프로축구 분과가 기존의 HSV 스포츠 주식회사로 독립해 나가고,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가 HSV 축구 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 개혁에 따라 HSV 축구 주식회사는 25% 미만에 해당하는 지분을 법인 총회의 동의 없이 전략적 파트너에게 판매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HSV 축구 주식회사의 지분 구조는 다음과 같다.

지분 보유자 비고
85.25% HSV 법인 (Hamburger SV e.V.)
11.00%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Klaus-Michael Kühne) 운송회사 퀴네+나겔 사(Kühne + Nagel International AG) 회장
1.50% 헬무트 본호어스트 (Helmut Bohnhorst) 농업 거래 기업 본호어스트 사(Bohnhorst Agrarhandel GmbH) 前 회장[45]
1.50% J. 부어마이스터 사 (J. Burmeister GmbH) 과일 및 채소 회사
0.75% 알렉산더 마르가리토프 (Alexander Margaritoff)[46] 와인 회사 하베스코 사(Hawesko Holding AG) 前 회장

앞으로도 HSV 축구 주식회사는 계속해서 투자자를 확보하여 지분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분 판매가 25%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매각을 위해서는 법인 총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 지분이 50%를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독일 축구계의 50+1 원칙에 따른 것으로, HSV 법인은 항상 5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해야만 한다.

개혁의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는 또한 HSV 법인과는 별개의 운영이사회 및 감독이사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HSV 법인은 여전히 축구 주식회사의 제1주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 회장단은 주주 총회에 참여하여 여섯 명의 감독이사회원 중 다섯 명을 선출하게 되며, 남은 한 명 또한 법인 회장단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이러한 감독이사회는 운영이사회의 인원 수를 결정하고 구성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한을 갖는다. 단,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구단 운영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운영이사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팬 문화[47][편집 | 원본 편집]

친선관계[편집 | 원본 편집]

역사적으로 HSV와 가장 끈끈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클럽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도르트문트가 1부 리그로 승격한 1976년 이후 양팀 서포터들은 서로가 샬케 원정을 떠날 경우에 동행하며 함께 응원해 주었고, 경기장 바깥에서도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이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1987년, 도르트문트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는데, 셀틱의 라이벌 레인저스 FC와 친선관계에 있었던 HSV로서는 이 소식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88년, 도르트문트DFB-포칼 경기를 치르러 샬케 원정을 떠났을 때, 도르트문트 팬들은 HSV 팬들을 남겨둔 채 겔젠키르헨을 떠나 버렸고, 남겨진 HSV 팬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샬케 팬들과 신경전을 이어가다가 충돌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48]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양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더욱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HSV와 도르트문트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처럼 도르트문트와 HSV의 친선 관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드 팬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양팀이 맞대결을 펼칠 때면 팬들끼리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내 클럽으로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Arminia Bielefeld)와 하노버 96을 들 수 있다. 세 팀은 소위 '북부 동맹'(Nordallianz)으로 일컬어지는 친선 관계로 묶여 있는데, 빌레펠트와 HSV는 팀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은색·파란색·흰색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하노버 96은 약자가 'HSV'로 똑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49] 특히 1990년대 중반에는 토마스 폰 헤젠(Thomas von Heesen), 울리 슈타인(Uli Stein) 등 한때 HSV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 빌레펠트로 이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양팀의 친선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외에서는 전술하였듯이 레인저스 FC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1974년, HSV 팬들은 원정 응원을 온 레인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팀은 친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각자의 라이벌 때문이었는데, HSV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FC 장크트 파울리(FC St. Pauli)가 1987년에 셀틱과 친선을 맺게 되자 양팀은 더욱 서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1976년부터 1979년경까지 HSV와 도르트문트,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네 팀은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FC 바이언 뮌헨에 맞서 4자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외에서는 한때 잉글랜드의 리버풀 FC 등과 친선을 맺은 바 있었다.

라이벌[편집 | 원본 편집]

HSV의 최대 라이벌은 역시 FC 장크트 파울리SV 베르더 브레멘이다. 먼저 장크트 파울리와는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는 더비 관계인 만큼 오래 전부터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 또한 있었는데, 장크트 파울리 팬들이 좌파적인 성향이 강했던 데 비해 HSV 팬들은 1980년대 초 우파적인 성향을 보였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장크트 파울리가 몇 차례 1부 리그로 올라오자 양팀 팬들 사이에서는 잦은 충돌이 발생했으며, 가장 최근인 2010-11 시즌에도 장크트 파울리가 1부 리그에 올라오면서 양팀 팬들이 충돌, 거리에서는 살수차가 등장하고 경기장에서는 홍염이 타오르는 일이 있었다.

북독 더비 당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 내걸린 아드리안 말라이카 얼굴 그림의 현수막

한편, 북독 더비로 유명한 베르더 브레멘과의 관계는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점점 폭력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특히 1982년 10월 16일에 있었던 한 사건은 양팀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 당시 HSV 원정을 온 브레멘 팬들 중 일부가 실수로 지하철 역을 잘못 내리는 바람에 경찰의 호위 없이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들은 도중에 HSV 울트라스 가운데서도 가장 극우 집단인 사자들(Die Löwen)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패싸움 끝에 불과 만 16세에 불과했던 브레멘의 팬 아드리안 말라이카(Adrian Maleika)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더 큰 비극을 막고자 두 달 후에 200여명의 양팀 팬 대표들은 셰셀(Scheeßel)에서 만나 "셰셀의 평화"(Frieden von Scheeßel)를 약속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브레멘 팬들은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으며, 두 구단의 라이벌 관계는 지금까지 팽팽하게 지속되고 있다.[50]

그밖에 HSV는 과거 도르트문트와 친선 관계에 있던 시절, 샬케 04와도 서로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으나, 현재는 그 반감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다. 오히려 근래에 들어 하칸 찰하놀루의 이적을 계기로 하여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3-14 시즌에 HSV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찰하놀루아스날 FC를 비롯하여 다수의 강팀들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별다른 이적 옵션조차 넣지 않은 채 팀과 2018년까지 장기 재계약을 맺으며 충성심을 과시하여 팬들의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시즌 종료가 가까워지면서 레버쿠젠이 그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돌변하였고, 팀이 이적 불가를 선언하자 SNS까지 동원하며 구단을 비방, 이적을 극구 요구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온갖 종류의 요란한 패악질, 아니 작은 소동 끝에 그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낳았고, 이후 HSV 팬들은 한동안 찰하놀루의 이름에 유다를 합성하여 그를 유다놀루(Judanoglu)라고 부르고, 알약을 의미하는 명사 Pillen을 합성하여 레버쿠젠을 필렌쿠젠(Pillenkuse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51] 더욱이 한 시즌 뒤에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또 다시 아빠 찬스를 동원한 난동을 일으키며 레버쿠젠으로 떠나게 되자 HSV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HSV 팬들은 근 몇 년간 있었던 시드니 샘(Sidney Sam), 손흥민, 레빈 외즈투날리(Levin Öztunali)의 이적 건까지 싸잡아 HSV에 괜찮은 유망주가 나오기만 하면 레버쿠젠이 빼앗아 버린다며 공분을 터뜨렸고, 레버쿠젠과 그 단장 용서받지 못할 자 루디 푈러(Rudi Völler)는 HSV 팬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되었다.[52]


특수한 관계[편집 | 원본 편집]

HFC 팔케의 엠블럼

2014년 5월 25일의 총회 표결 결과에 따라 프로축구 분과의 스핀오프가 최종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타락한 HSV를 대체하여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고, 2014년 7월 17일, HFC 팔케(HFC Falke)라는 새로운 구단이 공식 등록 절차를 마쳤다.[53] 그러나 짧은 준비 기간 탓에 아직 선수단도 갖추지 못했던 HFC 팔케는 한 시즌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2015-16 시즌, 9부 리그에 해당하는 함부르크 크라이스클라세 5(Kreisklasse 5)에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HFC 팔케라는 구단명은 HSV의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의 약자인 HFC와 FC 팔케(FC Falke 1906)의 명칭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엠블럼 및 유니폼 색깔은 또 하나의 전신 구단인 SC 게르마니아 (SC Germania 1887)를 연상케 한다. 비록 창단 이후 HFC 팔케는 빠르게 상부 리그로 치고 올라오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워낙 소속 리그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인지 서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인물[편집 | 원본 편집]

역대 운영이사회장[54][편집 | 원본 편집]

재직기간 성명 직함
1919/06/03 - 1919/07/08 오토 볼프 (Dr. Otto Wolf) 제1운영이사회원
1919/07/08 - 1919/12/16 요하네스 렌첸 (Johannes Lenzen) 제1운영이사회원
1919/12/16 - 1920/04/13 헨리 바렐레트 (Henry Barrelet) 제1운영이사회원
1920/04/13 - 1920/06/08 오토 볼프 (Dr. Otto Wolf) 제1운영이사회원
1920/06/08 - 1920/12/17 발터 묄러 (Walter Möller) 제1운영이사회원
1920/12/17 - 1921/10/14 헨리 바렐레트 (Henry Barrelet) 제1운영이사회원
1921/10/14 - 1922/08/10 파울 하우젠쉴트 (Paul Hausenschild) 제1운영이사회원
1922/08/10 - 1924/10/10 칼 슈탤린 (Dr. Carl Staelin) 제1운영이사회원
1924/10/10 - 1925/11/12 아르투어 폰 제켄도르프 (Arthur von Seckendorff) 제1운영이사회원
1925/11/12 - 1927/01/11 칼 슈탤린 (Dr. Carl Staelin) 제1운영이사회원
1927/01/11 - 1927/10/28 아르투어 폰 제켄도르프 (Arthur von Seckendorff) 제1운영이사회원
1927/10/28 - 1928/02/04 파울 하우젠쉴트 (Paul Hausenschild) 제1운영이사회원
1928/02/04 - 1934/01/25 에밀 마르텐스 (Emil Martens) 제1운영이사회원
1934/01/25 - 1935/06/04 오토 슈바베 (Otto Schwabe) 구단 총통
1935/06/04 - 1937/09/02 칼 메흘렌 (Karl Mechlen) 구단 총통
1937/09/02 - 1941/07/01 헬무트 슈바르츠 (Hellmuth Schwarz) 구단 총통
1941/07/01 - 1949/04/08 칼 메흘렌 (Karl Mechlen) 구단 총통
1949/04/08 - 1950/01/27 파울 하우젠쉴트 (Paul Hausenschild) 제1운영이사회원
1950/01/27 - 1951/01/26 칼 콤파르트 (Karl Compart) 제1운영이사회원
1951/01/26 - 1965/11/07 칼-하인츠 말만 (Carl-Heinz Mahlmann) 회장
1966/01/10 - 1968/12/03 칼 메흘렌 (Karl Mechlen) 회장
1968/12/03 - 1973/11/26 호어스트 바렐레트 (Dr. Horst Barrelet) 회장
1973/11/26 - 1975/06/30 페터 크론 (Dr. Peter Krohn) 회장
1975/06/30 - 1979/12/18 파울 벤티엔 (Paul Benthien) 회장
1979/12/19 - 1987/11/02 볼프강 클라인 (Dr. Wolfgang Klein) 회장
1987/11/02 - 1990/01/22 에른스트 나우만 (Ernst Naumann) 회장
1990/01/22 - 1990/11/27 호어스트 베커 (Horst Becker) 회장
1990/11/27 - 1993/11/01 위르겐 훈케 (Jürgen Hunke) 회장
1993/11/01 - 1995/10/04 로날트 불프 (Ronald Wulf) 회장
1995/10/05 - 1998/06/30 우베 젤러 (Uwe Seeler) 회장
1998/07/31 - 1998/10/31 베르너 하크만 (Werner Hackmann) 운영이사회장
1998/10/26 - 1999/07/19 롤프 마레스 (Rolf Mares) 운영이사회장
1999/08/23 - 2002/10/31 베르너 하크만 (Werner Hackmann) 운영이사회장
2002/11/01 - 2003/01/31 로날트 불프 (Ronald Wulf) 운영이사회장
2003/02/01 - 2011/03/16 베른트 호프만 (Bernd Hoffmann) 운영이사회장
2011/03/16 - 2014/07/07 칼-에드가 야르호프 (Carl-Edgar Jarchow) 운영이사회장
2014/07/09 - 2016/12/13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운영이사회장
2016/12/14 - 헤리베어트 부르흐하겐 (Heribert Bruchhagen) 운영이사회장


역대 단장[편집 | 원본 편집]

재직기간 성명 직함
1976 - 1977 페터 크론 (Dr. Peter Krohn) 총단장
1978 - 1986 귄터 네처 (Günter Netzer) 단장
1986/07/01 - 1988/06/30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단장
1989/07/01 - 1990/06/30 에리히 리베크 (Erich Ribbeck) 단장
1990 - 1991 하트무트 디크호프 (Hartmut Diekhoff) 단장
1990/07/01 - 1991/06/31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단장
1991/07/01 - 1991/08/31 호어스트 에버슈타인 (Horst Eberstein) 단장
1991/09/01 - 1992/05/30 토어스텐 발터 (Torsten Walter) 단장
1992/07/01 - 1995/07/01 헤리베르트 브루흐하겐 (Heribert Bruchhagen) 단장
1995 - 1998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단장
1998/07/01 - 2002/08/31 홀거 히어로뮈누스 (Holger Hieronymus) 스포츠 디렉터
2002/09/01 - 2009/06/23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스포츠 디렉터
2010/05/25 - 2011/06/30 베른트 라인하르트 (Bernd Reinhard) 스포츠 디렉터
2011/07/01 - 2013/05/22 프랑크 아르네센 (Frank Arnesen) 스포츠 디렉터
2013/06/11 - 2014/07/14 올리버 크로이처 (Oliver Kreuzer) 스포츠 디렉터
2014/10/01 - 2016/05/09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프로축구 디렉터
2015/05/09 - 2016/12/13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프로축구 디렉터
2017/01/06 - 옌스 토트 (Jens Todt) 프로축구 디렉터

단장직은 1976년부터 도입되었다.

역대 감독[편집 | 원본 편집]

재직기간 성명 메이저 대회 우승경력 비고
1919 - 1920 루돌프 악테 (Rudolf Agte)
1920 - 1921/04 A.W. 터너 (A.W. Turner)
1921/04 - 1921/12 리하르트 기룰라티스 (Richard Girulatis)
1922/01 - 1922/04 라요쉬 바냐이 (Lajos Bányai)
1922/05 - 1923 A.W. 터너 (A.W. Turner) 1923 독일 챔피언십 우승
1923 윌리엄 타운리(William Townley)
1923 - 1925 루돌프 악테 (Rudolf Agte)
1925 - 1925/11 잭 버튼 (Jack Burton)
1925/12 - 1926 A.W. 터너 (A.W. Turner)
1926 - 1927 아돌프 리베 (Adolf Riebe)
1927 - 1929/01 루돌프 악테 (Rudolf Agte) 1928 독일 챔피언십 우승
1929/02 - 1929 에른스트 모스 (Ernst Moss) 공동 감독
1929/02 - 1929 테오 뤼트켄하우스 (Theo Lütkenhaus) 공동 감독
1929 - 1930 칼 마타이데스 (Carl Mattheides)
1930 H. 헤어메나우 (H. Hermenau)
1931/01 - 1932 귤라 케르테스 (Gyula Kertész)
1932 - 1933/04 A.W. 터너 (A.W. Turner)
1933/04 - 1933/09 아스뵈른 할보센 (Asbjørn Halvorsen)
1933/10 - 1934 헤어베르트 팀 (Herbert Timm)
1934/11 게오르크 호흐게장 (Georg Hochgesang)
1935/01 칼 마타이데스 (Carl Mattheides)
1935/06 - 1939/10 한스 랑 (Hans Lang)
1939 프리츠 토이펠 (Fritz Teufel)
1939 - 1942/04 요니 슐츠 (Jonny Schulz)
1942 - 1943/04 오토 로베더 (Otto Rohwedder)
1943/03 - 1943/06 칼 회거 (Karl Höger)
1943 - 1944 오토 로베더 (Otto Rohwedder)
1944/10 - 1945 칼 회거 (Karl Höger)
1945 - 1949/06/30 한스 타우헤르트 (Hans Tauchert)
1949/08/01 - 1954/06/30 게오르크 크뇌플레 (Georg Knöpfle)
1954/07/01 - 1956/06/30 마르틴 빌케 (Martin Wilke) 공동 감독
1954/07/01 - 1962/06/30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1960 독일 챔피언십 우승 공동 감독
1962/07/30 - 1964/05/07 마르틴 빌케 (Martin Wilke) 1963 DFB-포칼 우승
1964/07/01 - 1966/04/17 게오르크 가블리첵 (Georg Gawliczek)
1966/04/18 - 1967/06/30 유프 슈나이더 (Jupp Schneider) 1967 DFB-포칼 우승
1967/07/01 - 1969/05 쿠어트 코흐 (Kurt Koch)
1969/05 - 1970/06/30 게오르크 크뇌플레 (Georg Knöpfle)
1970/07/01 - 1973/06/30 클라우스 옥스 (Klaus Ochs)
1973/07/01 - 1977/06/30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1976 DFB-포칼 우승
1977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1977/07/01 - 1977/10/27 루디 구텐도르프 (Rudi Gutendorf)
1977/10/28 - 1978/06/30 외즈칸 아르콕 (Özcan Arkoc)
1978/07/01 - 1980/12/18 브랑코 제베츠 (Branko Zebec) 1979 분데스리가 우승
1980/12/19 - 1981/06/30 알렉산다르 리스티치 (Aleksandar Ristic)
1981/07/01 - 1987/06/30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1982 분데스리가 우승
1983 분데스리가 우승
1983 유러피언 컵 우승
1987 DFB-포칼 우승
1987/07/01 - 1987/11/09 요십 스코블라르 (Josip Skoblar)
1987/11/11 - 1990/01/04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1990/01/05 - 1992/03/10 게르트-폴커 쇼크 (Gerd-Volker Schock)
1992/03/12 - 1992/09/21 에곤 코르데스 (Egon Cordes)
1992/09/23 - 1995/10/05 베노 묄만 (Benno Möhlmann)
1995/10/06 - 1997/05/18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1997/05/19 - 1997/06/30 랄프 셰어 (Ralf Schehr) 임시 감독
1997/07/01 - 2001/09/17 프랑크 파겔스도르프 (Frank Pagelsdorf)
2001/09/18 - 2001/10/03 홀거 히어로뉘무스 (Holger Hieronymus) 임시 감독
2001/10/04 - 2003/10/22 쿠어트 야라 (Kurt Jara)
2003/10/23 - 2004/10/17 클라우스 토프묄러 (Klaus Toppmöller)
2004/10/18 - 2007/02/01 토마스 돌 (Thomas Doll)
2007/02/02 - 2008/06/30 휩 스테벤스 (Huub Stevens)
2008/07/01 - 2009/05/26 마틴 욜 (Martin Jol)
2009/07/01 - 2010/04/26 브루노 라바디아 (Brunno Labbadia)
2010/04/26 - 2010/06/30 리카르도 모니츠 (Ricardo Moniz) 임시 감독
2010/07/01 - 2011/03/13 아어민 페 (Armin Veh)
2011/03/13 - 2011/09/19 미하엘 외닝 (Michael Oenning)
2011/09/19 - 2011/10/10 로돌포 카르도소 (Rodolfo Cardoso) 임시 감독
2011/10/10 - 2011/10/16 프랑크 아르네센 (Frank Arnesen) 임시 감독
2011/10/17 - 2013/09/16 토어스텐 핑크 (Thorsten Fink)
2013/09/17 - 2013/09/22 로돌포 카르도소 (Rodolfo Cardoso) 임시 감독
2013/09/23 - 2014/12/15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Bert van Marwijk)
2014/02/17 - 2014/09/15 미르코 슬롬카 (Mirko Slomka)
2014/09/17 - 2015/03/22 요제프 친바우어 (Josef Zinnbauer)
2015/03/22 - 2015/04/14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임시 감독
2015/04/15 - 2016/09/25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2016/09/26 - 마르쿠스 기스돌 (Markus Gisdol)


명예의 전당[편집 | 원본 편집]

Walk of Fame

HSV는 2007년, 기업가 안드레아스 마스케(Andreas Maske)의 후원으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북동쪽 출입구 근처에 명예의 전당(Walk of Fame)을 설치하였다. 이는 구단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HSV 최고의 레전드인 우베 젤러의 발 모형이 초대형 크기로 중앙에 설치된 가운데 이를 둘러싸고 바닥에 여러 인물들의 발 도장과 그 업적이 새겨진 동판들이 원을 그리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골키퍼의 경우에 발 대신 손 도장이, 이미 사망한 사람의 경우 업적만 새겨져 있다). 이 명단은 지금도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다.

성명 HSV 활동 기간 비고
하리 배레 (Harry Bähre) 1960-1967 선수(미드필더)
우도 란도프 (Udo Bandow) 1996-2007 감독이사회
호어스트 덴 (Horst Dehn) 1958-1966 선수(미드필더)
게르트 되르펠 (Gert Dörfel) 1959-1972 선수(공격수)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1981-1987 감독
토마스 폰 헤젠 (Thomas von Heesen) 1980-1994 선수(미드필더)
호어스트 흐루베쉬 (Horst Hrubesch) 1978-1983 선수(공격수)
디트마 야콥스 (Ditmar Jakobs) 1979-1990 선수(수비수)
만프레트 칼츠 (Manfred Kaltz) 1971-1989, 1990-1991 선수(수비수)
루디 카르구스 (Rudi Kargus) 1971-1980 선수(골키퍼)
케빈 키건 (Kevin Keegan) 1977-1980 선수(공격수)
볼프강 클라인 (Wolfgang Klein) 1979-1987 회장
프란츠 클레파취 (Franz Klepacz) 1951-1960 선수(수비수)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1973-1977 감독
페터 크론 (Dr. Peter Krohn) 1973-1975 회장
게르트 크룩 (Gerd Krug) 1956-1966 선수(수비수)
프리츠 라반트 (Fritz Laband) 1950-1956 선수(수비수)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1976-1986
1995-1997
선수(미드필더)
감독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1956-1962 감독
요헨프리츠 마인케 (Jochenfritz Meinke) 1949-1963 선수(미드필더)
클라우스 나이스너 (Klaus Neisner) 1957-1963 선수(공격수)
귄터 네처 (Günter Netzer) 1978-1986 단장
페터 노글리 (Peter Nogly) 1969-1980 선수(수비수)
에르빈 피히오비악 (Erwin Piechowiak) 1957-1966 선수(수비수)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1949-1958 선수(리베로)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1974-1981
1987-1990
선수
감독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1978-2004 마사지사
우베 로이터 (Uwe Reuter) 1956-1960, 1961-1964 선수(공격수)
호어스트 슈노어 (Horst Schnoor) 1952-1967 선수(골키퍼)
빌리 슐츠 (Willi Schulz) 1965-1973 선수(수비수)
디터 젤러 (Dieter Seeler) 1955-1966 선수(미드필더)
우베 젤러 (Uwe Seeler) 1954-1972 선수(공격수), 회장
울리 슈타인 (Uli Stein) 1980-1987, 1994-1995 선수(골키퍼)
클라우스 슈튀어머 (Klaus Stürmer) 1954-1961 선수(공격수)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1971-1978 선수(공격수)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1978-1985
1995-1998
선수(수비수)
단장
위르겐 베르너 (Jürgen Werner) 1955-1963 선수(미드필더)
페터 불프 (Peter Wulf) 1958-1966 선수(공격수)
브랑코 제베츠 (Branko Zebec) 1978-1980 감독

[55]


125주년 기념 역대 베스트 팀[편집 | 원본 편집]

2012년 9월 29일, HSV는 구단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베스트 팀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포지션 성명 HSV 활동 기간
골키퍼 울리 슈타인 (Uli Stein) 1980-1987, 1994-1995
수비수 디트마 야콥스 (Ditmar Jakobs) 1979–1989
수비수 만프레트 칼츠 (Manfred Kaltz) 1970–1989, 1990-1991
수비수 페터 노글리 (Peter Nogly) 1969–1980
수비수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1949–1958
수비수 빌리 슐츠 (Willi Schulz) 1965–1973
미드필더 토마스 돌 (Thomas Doll) 1990–1991, 1998–2001
미드필더 토마스 폰 헤젠 (Thomas von Heesen) 1980–1994
미드필더 메흐디 마다비키아 (Mehdi Mahdavikia) 1999–2007
미드필더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1976–1986
미드필더 라파엘 반 더 바르트 (Rafael van der Vaart) 2005–2008, 2012–2015
공격수 카르스텐 배론 (Karsten Bäron) 1992–2000
공격수 게르트 되르펠 (Gert Dörfel) 1958–1971
공격수 호어스트 흐루베쉬 (Horst Hrubesch) 1978–1983
공격수 케빈 키건 (Kevin Keegan) 1977–1980
공격수 우베 젤러 (Uwe Seeler) 1946–1972
감독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1981–1987
마사지사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1978–2004


현재 선수단[편집 | 원본 편집]

함부르크 SV 16-17 시즌 선수 명단
등번호 이름 로마자 이름[56] 포지션 국적[57] 생년월일 비고
1 레네 아들러 René Adler 골키퍼 독일 1985년 1월 15일
2 데니스 디크마이어 Dennis Diekmeier 수비수 독일 1989년 10월 29일
3 클레베르 헤이스 Cléber Reis 수비수 브라질 1990년 12월 5일 [58]
3 메르김 마브라이 Mergim Mavraj 수비수 알바니아 1986년 6월 9일 [59]
4 에미르 스파히치 Emir Spahić 수비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980년 8월 18일 [60]
5 요한 주루 Johan Djourou 수비수 스위스 1987년 1월 18일
6 더글라스 산투스 Douglas Santos 수비수 브라질 1994년 3월 22일
7 바비 우드 Bobby Wood 공격수 미국 1992년 11월 15일
8 루이스 홀트비 Lewis Holtby 미드필더 독일 1990년 9월 18일
10 피에르-미헬 라조가 Pierre-Michel Lasogga 공격수 독일 1991년 12월 15일
11 미하엘 그레고리취 Michael Gregoritsch 미드필더 오스트리아 1994년 4월 18일
14 아론 헌트 Aaron Hunt 미드필더 독일 1986년 9월 4일
15 루카 발트슈미트 Luca Waldschmidt 공격수 독일 1996년 5월 19일
17 필립 코스티치 Filip Kostić 미드필더 세르비아 1992년 11월 01일
18 바커리 야타 Bakery Jatta 공격수 감비아 1998년 6월 6일
19 드렌 페카 Dren Feka 미드필더 독일 1997년 6월 9일
20 알빈 에크달 Albin Ekdal 미드필더 스웨덴 1989년 7월 28일
21 나빌 바후이 Nabil Bahoui 미드필더 스웨덴 1991년 2월 5일
22 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 Matthias Ostrzolek 수비수 독일 1990년 6월 5일
23 알렌 할릴로비치 Alen Halilović 미드필더 크로아티아 1996년 6월 18일
24 사카이 고토쿠 Gōtoku Sakai 수비수 일본 1991년 3월 14일 주장
25 마츠 쾰러트 Mats Köhlert 미드필더 독일 1998년 5월 2일
27 니콜라이 뮐러 Nicolai Müller 미드필더 독일 1987년 9월 25일
28 기데온 융 Gideon Jung 미드필더 독일 1994년 9월 12일
30 안드레아스 히어첼 Andreas Hirzel 골키퍼 스위스 1993년 3월 25일
31 크리스티안 마테니아 Christian Mathenia 골키퍼 독일 1992년 3월 31일
32 프랑크 론슈타트 Frank Ronstadt 미드필더 독일 1997년 7월 21일
34 핀 포라트 Finn Porath 미드필더 독일 1997년 2월 23일
36 톰 미켈 Tom Mickel 골키퍼 독일 1989년 4월 19일
37 서영재 Young-Jae Seo 수비수 대한민국 1995년 5월 23일
38 아쉬튼 괴츠 Ashton Götz 수비수 독일 1993년 7월 16일


임대 현황

성명 로마자 이름 포지션 생년월일 임대 구단 복귀일
바투한 알틴타쉬 Batuhan Altıntaş 공격수 1996/03/14 카심파사 2017/06/30
모하메드 과이다 Mohamed Gouaida 미드필더 1993/05/15 FC 장크트 갈렌 2017/06/30
아리아니트 페라티 Arianit Ferati 미드필더 1997/09/07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2017/06/30
스벤 쉬플록 Sven Schipplock 공격수 1988/11/08 SV 다름슈타트 98 2017/06/30


코치진

직책 성명 로마자 이름 생년월일
감독 마르쿠스 기스돌 Markus Gisdol 1969/08/17
코치 프랑크 프뢸링 Frank Fröhling 1978/02/15
코치 프랑크 카스파리 Frank Kaspari 1970/11/03
골키퍼 코치 슈테판 배흐터 Stefan Wächter 1978/04/20
선수 트레이너 다니엘 뮈시히 Daniel Müssig 1982/03/05
재활 트레이너 제바스티안 카펠 Sebastian Capel 1985/08/22

기록[61][편집 | 원본 편집]

우승 기록[편집 | 원본 편집]

1. 국내

  • 독일 챔피언십/분데스리가
우승 (6) : 1922-23, 1927-28, 1959-60(분데스리가 출범 이전), 1978-79, 1981-82, 1982-83
준우승 (8) : 1923-24, 1956-57, 1957-58(분데스리가 출범 이전), 1975-76, 1979-80, 1980-81, 1983-84, 1986-87
  • 챠머-포칼/DFB-포칼
우승 (3) : 1962-63, 1975-76, 1986-87
준우승 (3) : 1955-56, 1966-67, 1973-74
  • DFB-리가포칼
우승 (2) : 1972-73, 2003
  • DFB-슈퍼컵
준우승 (1) : 1986-87


2. 국제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
우승 (1) : 1982-83
준우승 (1) : 1979-80
  •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1) : 1976-77
준우승 (1) : 1967-68
  • UEFA 컵/유로파 리그
준우승 (1) : 1981-82
  • UEFA 슈퍼 컵
준우승 (2) : 1977, 1983
  • UEFA 인터토토 컵
우승 (2) : 2005, 2007
준우승 (1) : 1999
조별 리그 우승 (3) : 1970, 1974, 1994
  • 인터컨티넨탈 컵
준우승 (1) : 1983


3. 지역

  • 북독일 챔피언십
우승 (10) : 1920-21, 1921-22, 1922-23, 1923-24, 1924-25, 1927-28, 1928-29, 1930-31, 1931-32, 1932-33
준우승 (2) : 1925-26, 1926-27
  • 북부 오버리가
우승 (15) : 1947-48, 1948-49, 1949-50, 1950-51, 1951-52, 1952-53, 1954-55, 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59-60, 1960-61, 1961-62, 1962-63
  • 노르트마르크 가우리가
우승 (4) : 1936-37, 1937-38, 1938-39, 1940-41
준우승 (4) : 1933-34, 1934-35, 1939-40, 1941-42
  • 함부르크 가우리가
우승 (1) : 1944-45
준우승 (2) : 1942-43, 1943-44
  • 함부르크 리가
우승 (1) : 1945-46
준우승 (1) : 1946-47
  • 영국 점령 지역 리그[62]
우승 (2) : 1946-47, 1947-48
  • 북독일 포칼[63]
우승 (6) : 1925-26, 1952-53, 1955-56, 1956-57, 1958-59, 1959-60


4. 기타 우승 기록

  •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 : 1982
  • 페스타볼라 메르데카 (1) : 1988
  • 두바이 챌린지 컵 (2) : 2007, 2008
  • 에미레이츠 컵 (1) : 2008
  • T-Home 컵/텔레콤 컵 (2) : 2009, 2015
  • 피스 컵 (1) : 2012
  • 노르트 컵 (1) : 2013


선수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최다 출전(전체) 최다 출전(분데스리가) 최다 득점(전체) 최다 득점(분데스리가)
1. 만프레트 칼츠 (744) 1. 만프레트 칼츠 (581) 1. 우베 젤러 (507) 1. 우베 젤러 (137)
2. 우베 젤러 (587) 2. 토마스 폰 헤젠 (368) 2. 오토 하르더 (387) 2. 토마스 폰 헤젠 (99)
3. 호어스트 슈노어 (507) 3. 디트마 야콥스 (323) 3. 루디 노아크 (233) 3. 호어스트 흐루베쉬 (96)
4. 토마스 폰 헤젠 (443) 4. 하랄트 슈푀를 (321) 4. 헤어베르트 보이트코비악 (163) 4. 만프레트 칼츠 (76)
5. 게르트 되르펠 (423) 5. 페터 노글리 (320) 5. 에드문트 아담키비츠 (158) 5. 세르게이 바르바레스 (65)
6. 페터 노글리 (414) 6. 펠릭스 마가트 (306) 6. 게르트 되르펠 (144) 6. 프란츠-요제프 회니히 (62)
7. 위르겐 쿠어뷴 (406) 7. 카스파 메머링 (303) 7. 클라우스 슈튀어머 (140) 6. 게오르크 폴커트 (62)
8. 디트마 야콥스 (405) 8. 리하르트 골츠 (273) 8. 호어스트 흐루베쉬 (134) 8. 하랄트 슈푀를 (60)
9. 카스파 메머링 (402) 9. 클라우스 차취크 (262) 9. 프란츠 호른 (126) 9. 게르트 되르펠 (58)
10. 요헨프리츠 마인케 (400) 10. 다비트 야롤림 (257) 10. 토마스 폰 헤젠 (125) 10. 지미 하트비히 (52)

각주

  1. 독일어로는 '하-에스-파우'라고 읽는다.
  2. 바이언 뮌헨은 지역별 안배 원칙에 따라 같은 연고지의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창설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두 시즌이 지나서 비로소 승격에 성공하였다.
  3. 역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사이트들을 참고했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http://www.hsv.de/verein/geschichte
  4. 그런데 이런 이상한 논리를 적용할 거라면, SC 게르마니아 역시 1884년에 문을 연 호헨펠트 SC(Hohenfelder SC)와 반츠벡-마리엔탈 SC(Wandsbek-Marienthaler SC)의 합병으로 창립된 구단이니만큼 차라리 1884년을 창단연도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5. SC 게르마니아와 함부르크 FC는 독일 축구 협회의 창립 멤버에 속하기도 하였다.
  6. 나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정신병자, 동성애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또한 조직적으로 박해하였다.
  7. 오늘날에도 오버리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독일 축구에서 5부 리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오버리가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8. 협회의 징계로 인해 HSV는 빌리 슈뢰더를 단 한 경기에서도 기용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시즌 종료 후에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다.
  9. 1953-54 시즌 북부 오버리가 우승은 하노버 96에게 돌아갔고, 그해 하노버는 독일 챔피언에 올랐다.
  10. 페터 크론은 1922-23 시즌 독일 챔피언십 우승 멤버였던 한스 크론(Hans Krohn)의 아들이었다.
  11. 회장(Präsident)은 오늘날의 운영이사회장(Vorstandsvorsitzender)에 해당한다. '회장'이라는 명칭은 1953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
  12. 당시 결승전이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만큼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이날의 대패가 두고두고 아쉬웠을 것이다.
  13. 이 기록은 30년만인 2013년, 마침내 FC 바이언 뮌헨에 의해 경신되었다.
  14. 1983-84 시즌 분데스리가는 우승팀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 SV,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총 세 팀이 나란히 승점 48점을 거둘 만큼 박빙이었다. 더욱이 4위 FC 바이언 뮌헨은 47점, 5위 SV 베르더 브레멘은 45점이었으니 무려 다섯 팀이 불과 한 경기 안쪽의 승점 차이를 보이며 경쟁했던 셈이다.
  15.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토마스 돌은 한 시즌만인 1991년 여름에 AS 로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돌은 역대 레코드인 1,700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남겼는데, 이 거금은 팀이 경제적으로 회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6. 그해 DFB-포칼에서는 문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1라운드에서 HSV는 북부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Nord) 소속의 SC 파더보른 07(SC Paderborn 07)에 4:2로 충격패를 당했는데, 당시 심판이었던 로베르트 호이처(Robert Hoyzer)는 음펜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퇴장을 명령하고 파더보른에 두 차례 페널티킥을 주는 등 노골적으로 HSV에 불리한 편파 판정을 내렸다. 수사 결과 이 경기를 포함하여 DFB-포칼 및 하부 리그 일부 경기에서 크로아티아 마피아가 개입한 승부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이는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독일 축구계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한편, 독일 축구협회는 이후 사과의 의미로 HSV에 50만 유로의 보상금을 주었고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국가대표 경기를 치러주기로 약속하였다.
  17. 국내 팬들 사이에서 야롤림과 데 용은 야를로와 데축소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18. 이 시즌은 U-19 팀에서 활약하던 손흥민이 처음 1군에 올라와 프로 무대에 데뷔한 시즌이기도 하다.
  19. 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
  20. 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4년 반 동안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한 채 전설(?)로 남았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즉,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
  21. 빌트(Bild)지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아는 팬이 던진 무엇인가에 맞고 울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벤피카에서 임대되어 온 올라 존(Ola John)은 눈치 없이 차를 타고 유유히 떠나려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22. 29라운드가 끝난 상황에서 강등권인 17위 뉘른베르크는 26점, 브라운슈바이크는 25점으로 승점 차이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으나, 남은 다섯 경기를 세 팀이 나란히 모두 전패로 기록하면서 극적으로 HSV는 16위를 유지하였다.
  23. 1월 총회 당시 HSVPlus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보다 온건한 대안적 개혁 모델로서 "전통과 함께하는 미래"(Zukunft mit Tradition", "라우테의 심장"(Rautenherz) 등을 제안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월 총회를 앞두고는 이들 반(反) HSVPlus 세력들이 위르겐 훈케 전 회장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HSV 알리안츠"(HSV-Allianz)라는 또 다른 개혁안을 추진한 바 있었다.
  24. 이는 HSV 2군이 8전 8승을 거두며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한 결과였다.
  25. 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
  26. 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보다 거의 2배의 득점을 기록했다.
  27. 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28. 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에미르 스파히치는 여러 차례 동료 선수들에 대한 욕설 및 폭력 행사로 구설수에 올랐으나, 라바디아 감독과 구단 측은 그를 두둔하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스파히치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
  29. 리크호프의 HSVPlus 비판은 다음의 칼럼을 참고할 것. http://www.goal.com/de/news/1025/kolumne/2015/10/06/16057762/jovanovs-hsv-vom-kurs-abgekommen
  30. 특히 2016년 여름, 퀴네는 최대 5천만 유로의 추가적인 대부를 약속하는 대신 개인 고문으로 폴커 슈트루트(Volker Struth)를 두고 선수를 영입할 때 팀이 자신과 사전에 논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퀴네의 지인으로서 과거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단장이었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향후 HSV는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 겸 단장,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폴커 슈트루트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할 경우에만 선수영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31. 페터 크내벨의 해임은 지난 두 시즌 동안의 실망스러운 성과와 배낭 분실 사건, 그리고 퀴네의 입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배낭 분실 사건은 2015년 8월, 분실된 페터 크내벨의 배낭이 한 민간인 여성에게 발견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선수단 연봉 정보가 외부에 유출된 사고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http://www.mopo.de/sport/skandal-um-hsv-gehaelter-klaute-die--finderin--der-rucksack-von-sportdirektor-peter-knaebel--22461024
  32. 재미있는 점은 기스돌은 호펜하임에서 2015년 10월, HSV와의 패배 직후 해임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라바디아 감독의 HSV에 패해 경질된 기스돌이 그 라바디아의 후임으로 그 HSV의 감독이 된 셈이다. 자고로 인생이란 모르는 것..
  33. 물론 구단 역사가 짧은 FC 잉골슈타트 04(FC Ingolstadt 04) 등은 제외했을 때의 얘기다.
  34. 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534464/Wolfsburg-s-ugly-badge-seen-Champions-League-semi-finals-does-make-list-10-worst-football.html 그러나 이는 데일리 메일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최악의 엠블럼 10개 중 영국 팀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된 구단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독일 일간지 빌트(Bild)에서는 데일리 메일이 선정한 팀들에 잉글랜드 구단 4팀을 추가하여 진정한 세계 최악의 엠블럼을 가리는 인터넷 투표를 진행하였고, 37%의 득표를 받아 잉글랜드의 밀턴 케인스 돈스(Milton Keynes Dones)가 1위에 선정되었다. 그 와중에 HSV는 26%로 2등을 차지했다. http://www.bild.de/sport/fussball/fussball-international/wer-hat-das-schlimmste-logo-45374124.bild.html
  35. 굳이 우리말로 해석을 한다면 '로텐바움 인근의 운동장' 정도가 된다. 정확한 입지는 오늘날 로텐바움 쇼세(Rothenbaumchaussee)와 투엄벡(Turmweg) 사이, 즉 성 요하네스 교회(St. Johannes Kirche) 위쪽이었으며, 쉽게 얘기하자면 함부르크 시 중심부에서 알스터 호수보다 살짝 서쪽에 있었다.
  36. 공사 관계로 이 시기 동안에는 임시로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을 다시 이용하였다.
  37. 리모델링하는 동안에도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은 계속 운영되어 꾸준히 경기를 치렀으나, 관중 수용 규모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38. 이후에도 구단은 2010년 여름까지 총 1300만 유로를 더 투자하여 북쪽 관중석을 확장하고 남쪽 관중석에 17개의 칸막이실을 설치하는 등 관중 수용 규모를 61,322명까지 늘리고자 계획하였으나, 재정 및 인력 문제로 인해 이 결정은 유보된 상태다.
  39. 북쪽 홈 관중석 1층은 열성 팬들을 위해 스탠드 석 형태로 되어 있으나, 바닥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의자가 나오므로 앉아서 관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곳에 앉아서 경기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0. 그러나 공식 명칭만 바뀌었을 뿐,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옛 이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41. 물론 퀴네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건 당연히 아니고 처음에는 자기 이름을 붙이려다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이미지 세탁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42. 물론 음식 가격은 만만치 않다.
  43. 컬러 라인 아레나(Color Line Arena), 오투 월드(O2 World)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2015년부터는 바클레이카드 아레나가 되었다.
  44. 이런 점에서 보자면, 훈케가 HSVPlus 반대 세력의 구심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보일 수 있으나, 훈케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개혁 그 자체의 저지가 아니라 퀴네의 개입을 저지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45. 본호어스트 사는 2013년, 동종 업계의 바이바 사(BayWa AG)에 인수되었다.
  46. 2016년 5월 22일에 알렉산더 마르가리토프가 사망하면서 이 권리는 그 상속자들에게 돌아갔다.
  47. 팬 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였다. http://www.hsv1887.de/
  48. 다만, 이는 HSV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도르트문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
  49. 그러나 오늘날 하노버 96의 약자는 HSV보다는 보통 H96로 더 잘 알려져 있다.
  50. 베르더 브레멘의 홈 구장 베저 슈타디온 벽 한 구석에는 현재 아드리안 말라이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
  51.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어(Bayer)가 제약회사이기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다.
  52. 특히 레빈 외즈투날리는 HSV의 레전드, 우베 젤러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53. HFC 팔케의 창립자들은 2005년, 미국인 기업가 말콤 글레이저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할 당시 그 반대자들이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FC United of Manchester)를 창단했던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54. 역대 운영이사회장, 단장, 감독 정보는 다음의 두 사이트를 참조하였다. http://www.hsv1887.de https://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Namen_und_Zahlen
  55. http://www.hsv.de/arenawelt/volksparkstadion/der-walk-of-fame/ 참고
  56. 유니폼 백네임의 경우 굵은 글씨.
  57. 국가대표 기준
  58. 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FC 산토스(FC Santos)로 이적
  59. 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1. FC 쾰른(1. FC Köln)에서 영입
  60. 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방출됨
  61. 기록과 관련된 정보는 다음의 두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6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 체제 수립 이전까지 영국이 관할했던 지역에서 시행되었던 리그를 의미한다.
  63. 준우승 정보는 구하지 못해서 우승 기록만 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