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주


나석주
羅錫疇
나석주 초상.jpg
인물 정보
본명 羅錫疇
다른이름 나석주羅石柱, 마중덕馬中德
출생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
사망 1926년 12월 28일 15시 30분 (향년 34세)
경성 조선총독부 병원
국적 조선
학력 보명학교 졸업, 신흥무관학교 수료
직업 의열단원
가족 아버지 | 나병헌羅秉獻
어머니 | 김해 김씨(金海金氏, 이름은 전하지 않음)
아들 | 나응섭羅應爕, 나응선羅應善?
딸 | 미상, 나응서羅應瑞
손자 | 나효복羅孝福, 나효수羅孝壽
독립투사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소개[편집 | 원본 편집]


나석주는 조선의 독립투사이다. 한인애국단과 의열단으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의 아래 경무원과 의정원으로 일했다. 한국노병회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부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의열단 가입 전[편집 | 원본 편집]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에서 나병헌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둘 있었다. 아버지 나병헌이 서북학회의 평의원이었던 것으로 볼 때 유년기가 빈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미뤄진다. 14세에 네 살 위인 이문성과 혼인하며 다음해 아들 나응섭을 낳았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나석주는 16세가 되던 해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普明學敎가 설립되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농사를 지었다. 20세에는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김구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주권이 강탈당한 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 독립투쟁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1913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동휘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8개월 동안 정례 군사훈련을 수료하였다. 이때 어머니가 중환에 걸려 나석주의 귀향을 요청하셨기에 그는 1915년에 다시 귀향했다. 마음을 접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뜻을 굳혔으나 집안 대대로 경작하던 농토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겼다. 1923년 기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에서 몰수한 토지는 2억6천만 평에 달했다고 하는데, 황해도 재령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대부분의 토지 소유권이 넘어간 지역이었다. 나석주 또한 처음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가 소작료 인상에 항의하자 아예 소작농지마저 박탈당했다. 이후 의사의 의거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해 겸이포로 이주하여 쌀가게를 경영하였으나 생활이 안정되자 다시 뜻있는 동지들과 연락하며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나석주는 동지들과 밤새워 태극기를 제작하고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 때문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일경의 감시인물이 된 나석주는 사리원으로 이주하여 이듬해 결사대를 조직하고, 국외에서 권총과 탄약을 밀입하여 본격적인 항일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결사대에는 김덕영金德永·최호준崔皓俊·최세욱崔世郁·박정손朴正孫·이시태李時泰 등이 함께했고, 임시정부의 지시 아래 주비단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짓을 벌였다. 1920년 1월 부친과 면식이 있던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炳恒으로 부터 군자금을 징수 한 것이 탄로나 동지 최호준과 최세욱은 일경에 체포되었고 나석주는 추격을 받게 됨. 평남 대동군에서 일경과 면장을 사살하였으며 친일파인 은류군수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동지 최세욱과 최호준은 밀고당해 장연에서 일제에 체포된다. 같은 해 4월에는 추적을 피해 구월산[1]으로 은거했으며, 동지 김덕영·한대홍과 함께 황해도 안악군의 친일파 부호인 김응석金應石·원형락元炯洛 등으로부터 자금을 강탈했다. 1920년 9월에 추적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다.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나석주는 황해도 일대에서 벌인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동안 나석주를 체포하기 위해서 동원된 일경은 약 1만 명에 달한다.


의열단 가입[편집 | 원본 편집]


나석주는 동지 김영덕과 함께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요원이 되어 스스로 임정요인들의 경호를 담당하였고 1922년에 김구·손정도·여운형 등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노병회에 가입하였고, 간부 양성을 위해 육군 군관단 강습소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다.[2] 1923년엔 군사교육을 마친 후, 보정에 있는 중국군 공병단철도대에 배속되어 기관사 역무, 철도파괴, 수리 등의 훈련을 받았으며 1926년 천진에서 김원봉의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거[편집 | 원본 편집]


의열단에 가입한 해 4월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 김창숙과 김구에게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해달라는 권유를 받고 이를 수락했다.

저는 꼭 陰來 16일에 倭船21號 共同丸을 타고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携帶金이라고는 金貨 20원 뿐입니다. 炸彈 3발, 단총 1정입니다. 외형은 穿中眼이라 잠간 中國人 행세를 하려합니다.

不然하면 發露 동시에 必也 최후가 되겠지요. 別告事 無하니다. 餘祝[3].
— 같은 의열단원인 유지명에게 보낸 편지

망명 전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나석주는 거물 독립투사였고 일제 또한 그의 행보를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7월 나석주의 입국 정보를 습득했다며 보도하였고 동아일보는 11월 나석주의 입국은 헛소문이었다며 헛소문을 보도하였다. 역시 오보의 대명사 좋은 오보다 당시 범죄수배 중이었던 나석주를 모험적인 청년이라고 보도한 패기가 깨알같다.

1926년 12월 24일, 나석주는 홀로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하여 중국인 20여 명과 같이 저녁을 먹은 후 열차편을 이용하여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는 중국인 마중덕으로 위장하고 유창한 중국어로 일본경찰의 검문을 피했으며 서울에 도착한 후 중국인이 경영하는 동춘잔에서 하루 저녁을 숙박한 후 28일 오전에 곧 실행에 착수하였다. 거사 예정 장소인 식산은행과 동척주변에 대한 면밀한 사전 탐사를 마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거사 대상으로 삼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 때가 28일 오후 2시 5분경이었다. 중국옷을 차려입고 수위에게 ‘이 아무개’라는 이름을 써서 보인 후 면회를 왔다고 말했지만 정문수위는 회사 사원중 그런 사람은 없다고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자 나석주는 되돌아나와 식산은행으로 향했다. 연말이었기에 은행은 혼잡했고, 수위도 다른 일에 바빴기에 그 틈을 타 나석주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남쪽에 있는 대부계를 향하여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폭탄은 대부계 뒤 담벽 기둥에 맞다 아래로 떨어져 불행히도 불발이었고, 손님 중 한명이 수위에게 누가 돌을 던졌다고 알렸다. 하지만 수위는 폭탄을 주워 살펴봐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서무과로 가져갔는데 마침 서무과에 있던 일본군 중좌 출신 오다(小田)라는 자가 폭탄을 보고 즉시 폭발물이란 것을 알고 이를 본정경찰에 신고함으로 수 명의 경찰이 달려왔다. 하지만 나석주는 이때 이미 은행을 빠져나와 동척으로 향하고 있었고 폭탄이 불발되어 크게 실망한 나석주는 이번에는 권총을 빼어들고 동척정문을 향해 뛰었다. 마침 책상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쓰고있던 조선부업협회 일본인 잡지기자 다카키高木가 먼저 총에 맞아 쓰러졌고 당연히 그 다카키와는 다른 사람이다 이 순간을 이용해 나석주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때 나석주는 총소리에 놀라 아래층 식당에서 나오며 본인을 따라오는 동척사원 다께지를 보자 그를 향하여 2발을 발사해 그를 쓰러뜨렸다. 2층으로 올라간 후 나석주는 남쪽의 토지개량부로 뛰어들어가 바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기술주임 오ː모리大森를 쏘았고 그 옆에 있던 기술과장 아야다를 향해 1발을 발사했으나 탄환이 책상을 맞고 빗나가던 순간 놀란 아야다가 달아나려하자 뒤쫓아가며 그를 쏘아 쓰러뜨린 후 그 옆에 토지개량과로 들어서 폭탄 1개를 꺼내 투척한 뒤 재빨리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온 이후 나석주는 같은 구내에 있던 조선철도주식회사 정문쪽으로 뛰어들어가며 정문을 지키고 있던 수위 마츠모토松本와 마침 그곳에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木村를 향하여 각 1발씩 발사하여 그들을 쓰러뜨린 후 밖으로 나갔다. 동척사원들은 나석주가 의거하는 동안 저마다 책상 밑으로 숨기에 급급해서 나석주는 동척을 공포속으로 몰아넣고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폭탄이 불발됨으로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은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권총을 쏘아서 동척사원과 경찰 등 일본인 7명을 사살할 수 있었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나석주가 동척 구내를 빠져나간 직후 경찰이 황급히 출동했으나, 나석주는 이미 황금정(현재의 을지로 입구)를 달리고 있었다. 나석주는 한 손에 권총을 든채 전차길을 건너 동쪽을 향해 달렸으며 이때 때마침 그곳을 지나다 나석주와 마주친 경기도 경찰부 경무경감 다하타가 나석주의 가슴을 향해 한발을 쏘았고 나석주는 고꾸라졌다. 총을 맞은 상태로 도주를 시도했지만 이때 이미 나석주를 쫓아오던 경찰엔 기마대가 포함되었고, 4~5명이었기에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황금정 2정목(을지로 2가)의 한건재약국 앞에 이르러 전신주에 몸을 피하는 체하다 쓰러지며 추격해오는 경찰에게 두세 발을 쏜 후[4] 자기 가슴에 권총 세 발을 쏘아 의사의 의거는 최후를 맞았다. 쓰러지기 전 운집한 군중에게 유언을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이후 경기도 경찰부 소속 차량에 실려 총독부 병원 서일외과 수술실에 내려 놓아졌고, 경찰관이 나석주에게 모르핀을 놓아 정신이 들게 한 후 취조를 하는데 “기왕 죽을것이니 성명이나 말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하며 말하는 경찰의 물음에 “나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도리에 사는 나석주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경찰이 비로소 생각난 듯 달려들어 입을 벌리게 한 다음 이빨을 검사하던 중 금니가 몇 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 전에 나석주에 대한 정보를 경기도 경찰부에서 받은 일이 있다고 말한 후 계속하여 의열단이냐는 질문을 했고 나석주는 상해에서 왔냐는 질문에 “응” 이라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대답 한 후 아무 말도 없이 사경을 헤매다 그날 오후 세 시가 조금 지나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일제의 보도관제로 의거는 다음해 1월 11일에 조선일보에서 최초 보도되었다. 장남 나응섭은 주검을 수습하러 친척 형과 총독부 병원으로 찾아갔으나 일경은 시체를 내주지 않고 두 사람을 구금한 후 나석주와 사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대라며 경찰서로 끌려가 여드레간 고문을 함. 이후 두 사람은 풀려난 뒤 미아리 공동묘지를 뒤져 새 매장지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했다. 장례도 봉분도 허가받지 못해 평토장에 묻혔다. 이후 나응섭의 행방은 불분명한데 고문 끝에 숨진 것만이 확실하다. 아버지의 의거를 알리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 가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구가 나응섭의 망명계획을 짰고 백운학이라는 이름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탈출이 실패하여 압송당한 후 고문 끝에 숨졌는지, 임시정부에 아버지의 의거 사실을 전한 뒤 귀국하자 이를 빌미로 체포하여 고문하여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공적을 기려 사후 1962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나석주 의사 동상;서울 중구 을지로 66;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jpg


1999년 11월에는 거사장소인 서울 중구 을지로 66,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옛 외환은행 본점, 현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귀퉁이에 의사를 기리는 동상[6]이 세워졌다.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파 시도는 20년대 말에 내분으로 해산하는 의열단의 (조직적인) 마지막 무력투사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아까운 젊은 동지의 죽음을 초래하는 개별적인 테러·암살에 회의를 느끼고 군대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단원들과 함께 황포무관학교로 입학하고, 의열단은 1929년에 독립에 필요한 것은 협동전선이지만 단원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주축이 되는 의열단은 그 취지에 부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자진 해산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구의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지는 개별적인 테러·암살 등의 무력투사는 계속되었고, 1920년대의 의열단 투쟁부터 의열단 해산 후 1930년대의 한인애국단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항일무장투쟁은 동·후대 비판론자들의 비판과는 달리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얻고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 역시 지속적인 테러와 암살을 겪으며 강압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훈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전종합DB 유방집遺芳集 열전 8 나석주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전
『열사의 노래』, 김정민 엮음, 비단길 출판, 2003, 89-90482-01-1
『김상옥·나석주 열사 항일실록』, 김상옥·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 1986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위키백과


각주

  1. 임꺽정이 최후를 맞이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다
  2. 간부 양성을 위해 최초로 파견된 10명의 요인 중 한 명이다
  3. 총총, 모쪼록 정도의 뜻이다
  4. 이 사격에 경무보 다하타가 맞아 죽었다
  5. ‘의사’가 바르다
  6. 나석주 열사[5]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