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쿠르고스

Alsom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7월 31일 (일) 01:36 판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立法者), 신화적인 인물

개요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교육, 정치제도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 인물에 대한 기록은 서로 상이하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도 실존인물인가 의심했었다. 플루타르고스 영웅전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실존 가능성이 낮게 점쳐지는 인물이다.

스파르타의 등장

스파르타 지역은 과거 라케다이몬 왕국 지역이었다. 라케다이몬 왕국은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가 통치했던 국가였다. 메넬라오스는 자식이 없어 자신의 형인 아가멤논의 손자인 테이사메노스에게 라케다이몬 왕국을 넘겼다. 이후 라케다이몬 왕국은 번성하다가 도리아인들의 침공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때 도리아인들을 이끈 사람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 알려져있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삼등분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그 중 스파르타의 땅이 된 라코니아 지역은 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가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B.C. 1000년경 다른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침공해 들어왔고, 그 중 일부가 라코니아를 두두두두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건국하게 된다.

리쿠르고스의 개혁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성립한 스파르타는 양왕제를 채택하였다. 이는 과거 라코니아 지역의 통치가 이원화(에우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된 결과라 카더라. 스파르타의 양왕제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후 스파르타 사회는 안정을 찾고 인구가 증가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변 지역을 정복했는데, 그 중 가장 비옥한 메세니아 지역을 침공했다고 한다. 이 메세니아 침공 또는 메세니아 전쟁을 통해 스파르타는 그 세력이 커졌고, 페리오이코이라는 중간층과 헤일로타이라는 노예층이 형성되었다.

스파르타가 메세니아를 얻고 팽창하게 되자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특히 페리오이코이나 헤일로타이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다양한 사회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인물이 리쿠르고스라고 한다.

리쿠르고스는 기원전 7세기(다른 문헌에는 기원전 8세기라 적혀 있다.) 리쿠르고스 개혁을 도모한다.

리쿠르고스는 먼저 정치제를 개혁했는데 왕과 장로회는 행정과 입법의 발의권을 주었고, 민회에는 결정권을 주었다. 즉 민회, 시민들은 발의권은 없었으나 결정권이 있었다. 그러나 민회가 중우정치로 갈 경우를 대비하여 민회의 결정이 부당하다면 왕과 장로회는 민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었다.

또한 에포로이(Ephoroi)라는 감독관 직책을 신설하였다. 기존에 있었다는 설과 새로 생겼다는 설이 공존하고 있다. 이 에포로이는 시민들이 선출하며 정원은 5인 임기는 1년이었다. 초기에는 감사권과 일정한 정도의 행정권만 지녔지만 시간이 흘러 이들은 행정전반을 총괄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안을 결정하였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다.

그 다음으로 개혁한 것이 공동식사제를 통해 사치를 금지한 것이었다. 시시티온, 안드레이온, 피디티온 등 다양한 정의가 있는 공동식사제는 15명 내외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여기서 음식은 가장 맛없게 만들어져서 미각을 상실시켜 전투나 기타 행위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영국이 그래서 세계를 정복한 것인가?

리쿠르고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마련하였다. 스파르타인들은 아고게(agoge, 훈련)이라 불린 것으로 철저히 살인무기를 만들기 위한 교육제도이다. 만6세부터 공동체 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고 만12세부터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머리는 삭발시키고 신발은 주지 않으며, 옷은 오로지 한 겹만 입고 생활하도록 했다.[1] 또한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고 알아서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으며, 배고플 경우 '서리'와 같은 도둑질을 허용했다.[2] 이후 만 18세가 되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어린 유소년들을 통솔하는 소대장이 된다. 본격적인 전사는 만 23세부터이다. 그리고 만 30세가 되면 시민권을 받고 공동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즉 6살부터 30살까지 군대내무반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게이 부대가.....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시민들이 전쟁만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시민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토지와 노예가 분배된다. 각자 할당된 토지와 노예는 시민들의 생존을 유지시켜주었고, 그들이 이런 고압적인 체제 속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요인이다.

리쿠르고스는 상업의 발달은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타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철제화폐를 사용하였다. 당연히 이는 타 폴리스와 교역하는데 장애가 되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나 다른 몇몇 폴리스와 다르게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리쿠르고스의 죽음

리쿠르고스의 죽음도 상당히 신비롭게 서술되어 있다.

리쿠르고스는 모든 제도를 정비한 다음 이 제도가 좋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델포이 향하기로 했다. 그래서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자신이 신탁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이 제도를 바꾸지 않기로 서약을 받았다. 이후 델포이에 간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제도가 좋은 제도임을 인정받게된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 제도가 영원이 지속되는 것이 스파르타가 영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니 자신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단식하여 죽었다(칼로 할복, 또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진다.

평가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제도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제도가 옳다는 확신에 빠져 스파르타에게 변화의 기회도 제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는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기고 얼마 안 있어 몰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스파르타의 문화를 사장시켜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게 하였다.


각주

  1. 우리는 겨울이 있기에 옷을 한 겹만 있고 생활하라고 하는 것은 지옥이다. 그런데 그리스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의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이는 고통의 삶이라기보다는 검소함을 내면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물론 걸리면 겁나게 맞는다. 여기서 혼나는 이유는 도덕적 이유가 아니라 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