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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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지중해 세계란?[편집 | 원본 편집]

고대 지중해 세계는 미케네 문명(B.C.1600년대)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A.D. 476년)까지를 지칭하는 시대를 말한다.[1] 이 시기 그리스에선 아테네를 대표로 하는 독특한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구현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크게 영국지역부터 인도지역까지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 세계를 이룩했다. 또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이기고 갈리아와 각 주변지역을 장악해나가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다.

에게 문명의 발견[편집 | 원본 편집]

19세기만 하더라도 에게문명은 환단고기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에게문명이 있다고 주장하면 지금의 환빠보다 더 심각한 대접을 받았다. 그랬는데 일리아드 덕후였던 고졸의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사업으로 벌었던 돈들을 몽땅 트로이를 찾는데 들이부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돈지랄을 한다며 말렸지만, 슐레이만은 주변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강행했다. 당시 기성학계에서는 덕후가 돈지랄한다고 판단했으며, 무슨 놈의 유적이냐고 치부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트로이 유적이 등장해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슐레이만은 투자금의 대부분을 회수했으며, 고고학의 대부가 되었다.(그러나 발굴 과정상에서 개인적 욕심 때문에 다른 수많은 유적, 유물들을 훼손시킨 과오 역시 유명하다.) 이후 그 주변에서 유적들이 계속 발견되면서 에게문명, 즉 일리아드와 율리시즈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고, 소아시아는 수많은 고고학자들로 붐비게 되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의 공헌으로 시작된 에게문명 발굴은 가속화되었고, 이윽고 에게문명 외에도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역시 발견될 수 있었다.

미노아 문명[편집 | 원본 편집]

미노아 문명은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전하였는데 오리엔트 문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미노아 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된 선상A문자석판에서 오리엔트 문명의 석판과 유사한 문양이나 글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섬이나 에게 해의 섬에서 발전했기에 성벽을 건축하지 않았다. 대신 항해술이 발달했고, 따라서 상공업이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미노타우루스의 미궁(Labyrinth)은 미노아 문명이 고도의 건축기술을 보유했음을 증명한다. 현재까지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에서 미케아 문명 유적지처럼 대규모 노예전용 거주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미노아 문명이 노예제가 없었다는 주장과, 노예와 일반시민이 같이 생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노아 문명은 제정일치사회였을 것으로 보이긴 하는데 아직끼지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 참고로 미노아 문명은 미케네 문명과 달리 문자(선상A문자)가 해독되지 않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미케네 문명[편집 | 원본 편집]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의 선조이다.[2] 펠로폰네소스 대륙에 위치한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을 통해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대륙 전역에 걸쳐 수많은 소국가를 형성하였고,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에 의해 제압되었고, 아가멤논 왕은 그리스 전역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아가멤논은 그리스보다 발전되고 부유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역을 장악하려 했으며, 따라서 이오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트로이를 침공하여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

미케네 문명의 계급체제는 피라미드 형태로, 왕을 정점으로 하여 촌장인 파시레우(pasireu), 촌민인 다모(damo), 그리고 노예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미케네 시대 왕국들의 특징은 오리엔트 국가의 형태와 유사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였던 기르수나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의 내용과 미케네 일대에서 발견된 점토판 내용에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는 산악지역이라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할 관개 농경의 필요성이 없었고, 당연히 이는 오리엔트 국가들에 비해 미약한 국가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3]

미케네의 원형무덤과 거석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귀족들의 권한이 컸음을 증명하고 있다.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과 달리 상무적(尙武的)이어서 문화예술의 중심은 전쟁과 사냥이 되었다. 또한 이 문명은 뱀여신을 숭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문명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바다에서 이주민이 몰려와서인지, 아니면 발칸 지역의 도리아 인들의 남하로 인한 것인지, 또는 화산이나 지진 등 천재지변에 의한 것인지 등등 온갖 추측과 가설들 뿐이지만 아무튼 미케네 문명은 멸망했다. 이는 사회조직의 소멸과 전쟁의 생활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소아시아 서안으로 미케네 인들, 즉 선대 그리스 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란 속에서 지배층이 사라져버리고 전쟁의 지속으로 인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암흑시대'가 시작된 점이다. 이 시기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 것이 바로 호메로스오디세이아일리아드이다.[3]

그리스 세계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편집 | 원본 편집]

식민지 영토. 녹색이 그리스계, 청색이 페니키아계다.

그리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폴리스의 등장은 앞서 말한 암흑시기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이다. 이 시기 이민족의 이주는 마무리되고 그리스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전보다 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된다. 사회적 안정과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곧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리스라는 지역이 산악지대가 많고 척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곧 그리스 사회는 지속적인 인구증가와 만성적 토지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된 방법은 바로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는 것이다. 약탈이 빈번히 일어나자 방어자 측에선 자신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 방비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 되었다. [4]

폴리스 형성 이후 점차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기 어려워지자 그리스인들은 잉여인구를 방출하는 정책을 펼친다. 즉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5]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리스는 잉여 인구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귀족층들의 권한은 강대해졌다. 그 이유는 이 시기의 전쟁이 1:1의 일기토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1:1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장비빨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무장을 더 충실히 갖춘 사람이 이긴다. 그러니 이 당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말과 중장비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귀족 뿐이었다. 전장에서 귀족의 역할이 중요했으므로 이들이 정치적 권한을 독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폴리스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폴리스의 발전(아테네)[편집 | 원본 편집]

폴리스의 발전(스파르타)[편집 | 원본 편집]

페르시아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우리 모두 페르시아가 내 편이라 생각하며 글을 읽도록 하자. 포기를 모르는 노력하는 멋진 나라, 페르시아

토크멘터리 전쟁사 18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편

페르시아 전쟁은 최초의 동양과 서양 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올림픽 종목인 마라톤의 유래가 되는 전쟁이다. 동시에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페르시아는 B.C. 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는 서부로 진출하였는데 그 중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식민지들로 이루어진 지역이었고, 당연히 폴리스 간의 알력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사회는 가장 큰 폴리스였던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하자(B.C. 548) 곧 몰락해 버렸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한 이후 곧바로 그리스 지역으로의 진출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대신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 지역을 노렸다.[6]

페르시아가 척박한 그리스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오니아 반란(B.C. 499-494)에 의한 것이었다. 이오니아 주민들의 반란은 페르시아 입장에선 갑작스러운 것이었다.[7]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약 5년의 시간이 걸려 진압할 수 있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이후, 이 반란이 아테네와 그리스 폴리스들의 사주 및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라는 소식을 알게 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정벌할 생각을 구상하게 된다. 이로서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올라갔다. 다리우스는 대군을 동원했기에 쉽게 전쟁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토스 곶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대파되어 수십 척이 파손되고 2만 명의 병사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페르시아군은 전투도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B.C. 492)

이후 2년이 흘러 B.C. 490년 다리우스는 다시금 그리스 원정을 감행한다. 이를 제1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한다. 페르시아 군은 지난 원정 때 함대가 폭풍우로 붕괴된 경험을 상기하며 사모스 섬을 지나 우회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페르시아 군은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신전을 불태우는 등 초반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팔랑크스)로 6400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하여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군에 의해 마라톤에서의 전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자 전투 중간에 병력의 상당수를 정박해 놨던 배에 탑승시켜 아테네로 향했다. 이 작전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전투로 인해 기진맥진한 그리스 군대가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하루 만에 올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마라톤에서 싸웠던 전 부대가 고스란히 아테네 시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본 페르시아 해군은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였다. 당시 아테네 군은 약 33kg의 완전무장 상태로 30km의 산악지형을 단 3시간 만에 주파했던 터라 싸울 기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더욱이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병들을 동원했던 것이기에 아테네에서는 더이상의 예비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조금이라도 아테네군이 늦게 도착했거나 페르시아가 그냥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면 아테네는 불타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왕인 다리우스는 원정 준비에 몰두하였지만,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그리스 원정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측근들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조언하자 그리스 원정을 결심하게 된다. 10년 간의 공백기 동안 그리스 역시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아테네의 신임 스트라테고스(장군 겸 관료)가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배 만들어 주세요.’’를 주구장창 시전하여 결국 수많은 반대 속에서도 대함대를 건조하였다.

B.C. 480년 마침내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에 원정했다. 이를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말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번엔 미리 군대가 지나갈 길도 닦은 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육해병진작전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리스 원정은 금방 끝이 날 것이라 보았다.(벌써 3번째 설레발이다.) 그러나 육군이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 왕의 스파르타군 및 테스피아, 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하는 바람에 육해병진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300 (영화) 그러나 여전히 페르시아 군대는 막강했다.

아테네에서는 이 곳으로 페르시아 대군이 몰려오고 있고, 스파르타는 겨우 300명만 보내주는 이런 상황[8]에서 육전은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전 시민을 살라미스로 이주시켰다. 공백지가 된 아테네를 장악한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라미스로 도망친 아테네인들을 격퇴하기 위해 대함대를 그곳으로 파견시켰다. 페르시아 해군은 페니키아 최정예 해군이었기에 듣보잡의 그리스 해군에게 질 일은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네군은 10년간 열심히 준비했던 정예부대였다. 방심한 페르시아 해군 지휘관들은 아테네 군의 기습을 당해 크게 패배하였고, 해군이 패배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겨울마저 다가오자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물리게 되었다.

B.C. 479년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병력을 모아 침공하였다. 페르시아의 제3차 그리스원정이다. 이번에는 해전보다는 철저히 육전을 택해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작년에 털린 아티카와 아테네는 쉽게 뚫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다시 살라미스 섬으로 돌아가 스파르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번엔 스파르타도 4만에 이르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또한 각 폴리스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10만의 군세를 유지하였다. 마침내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과 테베 근처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맞붙게 되었다. 이 플라타이아 전투 역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에게 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아테네는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한 막대한 부를 모으게 되었고, 그리스 사회는 이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학관계가 형성되었다.

아테네 제국의 등장과 그리스 세계의 분열[편집 | 원본 편집]

토크멘터리 전쟁사 19부 펠로폰네소스 전쟁편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동맹을 맺게된다. 이 동맹의 맹주국으로는 아테네가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1,2,3차 원정에 모두 참전하여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물론 스파르타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비해 명분이 약했다. 2차에서는 겨우 300명만 파견했고, 3차에서야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테네를 맹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탄생하였다. 델로스 섬에 동맹본부를 마련하여 델로스 동맹이라고 불린다.

델로스 동맹의 운영은 맹주국인 아테네가 위임받았다. 초기 델로스 동맹의 운영은 나름 건전하게 운영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반페르시아 투쟁을 지속하여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이오니아 지방을 그리스 세계로 다시 편입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종식된 이후였다.

델로스 동맹의 목적인 페르시아 위협이 해결된 상황에서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맹주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속을 외쳤고, 이를 각 도시국가들에게 설파했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조용한 페르시아가 다시 올 수 있으니 항상 준비해 두자는 것이다. 이 의견에 동의한 도시국가들에 의해 델로스 동맹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횡령하기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나 기타 외부세력에 맞서기 위해 모은 델로스 동맹 자금을 아테네 시에 투입했다. 그야말로 횡령한 것이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자금을 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선박의 건조와 병력의 모집, 군수품 구입이 모두 아테네에서 이루어졌기에 아테네에서는 많은 물자와 자금이 모여들었고, 이런 물적집적지 역할로 인해 아테네는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럼에도 아테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델로스 동맹 자금을 이젠 눈치도 안보고 마음대로 횡령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비용을 모두 델로스 동맹 자금에서 융통하였다. 공직자 임금, 회의 거마비, 각 시민생활지원금 등등.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아테네는 커다란 번영을 이루었다. 특히 민주정치는 이 시기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B.C. 462년 에피알테스는 귀족회의기구인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명예기관으로 남겨버렸다. 그래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에피알테스는 그 다음에 원인 모르게 살해당했다. 에피알테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페리클레스였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의 권한을 대폭 상승시켰다. 과거 500인회에서 관할하던 외교, 전쟁, 민사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제는 민회가 총괄하게 되었고,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한 의안의 준비와 민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10인 스트라테고스 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제 스트라테고스 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내각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스트라테고스의 특징은 무제한적인 연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30년 넘게 아테네의 지도자로 계속 남을 수 있었다.[9] 또한 모든 관리들은 추첨제였으며, 임기는 1년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사법제도에 있어서 배심원 6000명으로 된 시민법정이 존재했다. 이들이 모두 모여서 재판심리를 진행하지는 않고, 500명 내외 위원회로 나누어져서 재판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관직에 추첨제와 순환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수당을 제공했기 때문이었고, 그 수당은 당연히 델로스 동맹 자금에서 지급되었다.[10]

제국으로 변모한 아테네 시의 통치는 당연히 다른 폴리스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스파르타의 불만이 가장 강려크했다. 그러나 이미 델로스 동맹 자금으로 빵빵해진 아테네를 견제하기에는 스파르타 자체 힘만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스파르타 역시 자신들을 따르는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었다. 이렇게 두 동맹 세력 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가 불꽃을 튀기고 있을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이었던 해상 2인자 급의 폴리스였던 코린토스와 그 식민지였으나 독립을 원하는 코르푸가 도화선이 되었다. 코르푸가 아테네의 지원을 받게 되자 자연스럽게 코린스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서부진출을 방어하고, 그리스 사회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페르시아에 원조를 요청한 뒤 [11] 아테네를 침공했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전쟁은 막강한 해상력을 가졌던 아테네의 승리로 쉽게 끝나리라 예상되었다.(스파르타가 도시를 포위하더라도 해상무역으로 생필품을 공급받으면 그만이므로)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아테네에 흑사병이 돌았고,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사망했다. 위대한 리더를 잃어버린 아테네 민주주의는 곧바로 중우정치에 빠져 혼란을 거듭했다. 대표적인 예는 알키비아데스가 이탈리아 원정 중에 그를 규탄하여 파면시킨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생존하기 위해서 스파르타로 넘어갔고, 가서 자신의 원정계획을 다 불었다. 당연히 아테네의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여기서 아테네는 많은 병력과 함선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스파르타 해외식민지를 접수하면서 스파르타를 궁지에 몰아갔다.

B.C. 406년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를 에게 해에서 격퇴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전투 중 만난 폭풍우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이에 격분한 익사자의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의 구조작업이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규탄하였고 6명의 장군들이 집단 처형되었다. 결국 해전에 능숙한 지휘관을 다 죽인 결과는 B.C. 405년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스파르타 함대에 의한 패배였다. 이로써 식량공급지인 흑해연안을 잃어버린 아테네는 쉽게 스파르타에 의해 함락당했다. 이것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끝났으나 그리스는 그 대가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얻었던 소아시아 지역 이오니아 지방 폴리스들을 다시 페르시아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원조의 대가)

스파르타에 함락된 아테네는 30인의 독재를 거쳐 다시 민주정으로 복귀하였지만 이미 이 때의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민주정이었다.[12] 아테네를 물리치고 그리스 세계의 주인이 된 스파르타는 아테네보다 더 심하게 동맹시들을 쥐어짰고 당연히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테베와 아테네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반스파르타 연맹 2개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한 동맹 도시들의 지지는 미약했고, 결국 아테네 해상동맹은 테베 중심의 보이오티아 동맹으로 편입되었다. 스파르타는 1만 대군을 파견하여 보이오티아 동맹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이에 테베는 6000명의 군사를 내보냈다. 병력 상으로는 부족했지만 테베군의 지휘관인 에파미논다스는 사선진으로 스파르타군을 씹어 먹었다. 이후 전쟁의 주도권은 테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되는 분쟁 속에 누구 하나가 주도적인 세력이 되진 못하였다. 이렇듯 그리스 세계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북쪽에서 성장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편집 | 원본 편집]

그리스 문화는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리스 세계의 독특성으로 인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철학은 서양철학의 원류를 형성하였고,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가 다수 등장하였다.

그리스 역사는 새로운 역사서술을 탄생시켰다. 그리스의 역사서술은 오리엔트의 연대기적 서술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서술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저술인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하였지만 그 내용은 두 문명 간의 충돌로 설명하였다. 다만 그는 그리스 중심적인 서술로써 페르시아를 전제적인 국가로, 그리스를 자유로운 국가로 설명하였고, 그리스를 선, 페르시아를 악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사적인 배경과 유래를 넓게 고찰한 점에선 지금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 다른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여 이를 전체적 서술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그의 서술을 과학적 비판적 역사서술의 시조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전쟁의 경과에만 초점을 맞춰, 그 당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그리스 문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기원으로 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영웅과 신에 대한 서사시이다.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성경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의 교육에 필수적인 교재였다. 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그리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7세기 보이오티아의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농민들의 삶과 노동의 귀중함을 주제로 시를 불렀고, 또한 『신통기』를 통해 신의 계보를 정리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에게 해의 레스보스 섬 출신 사포라는 여류시인과 보이오티아의 핀다로스 등의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정시가 등장하였다.[13]

기원전 5세기경에는 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극은 기원전 6세기 말에 등장하였다. 최초의 비극작가는 아이스퀼로스이다. 그는 총 90편을 작성하였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7편이다. 그의 작품인 『페르시아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교만과 신에 대한 도전이 받는 응징의 무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작인 『오레스테스 3부작』은 트로이 전쟁영웅 아가멤논 왕가의 비극을 그렸다.[14][15]

소포클레스도 128개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안티고네』[16]와 『오이디푸스 왕[17]이 있다. 에우리피데스도 70여 편을 썼다고 하나, 19편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히폴리토스』, 『메데이아』가 있다.[18]

비극 다음에 등장한 것이 바로 희극이다. 현재 알려진 희극작가는 아테네 출신인 아리스토파네스 한 명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스토파네스도 42편의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남아있는 것은 14편이 전부다. 희극은 주로 풍자와 조롱을 주제로 했기에 그 당시 유명한 인물을 상대로 한 조롱이 주제다. 『구름』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야유했고, 『개구리』에서는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를 에우유리피데스로 바꾸어서 조롱하였다.[19]

그리스의 미술은 풍부한 대리석을 기본으로 하여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단순하면서도 고귀하고 잔잔하면서도 위대함을 표현하였다. 특히 기중에 대한 형식으로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20]이 전해지고 있고,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점이라 표현되는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도리아식으로 지어졌다. (델로스 동맹 맹주 시절의 부패한 아테네가 아닌 검소했던 시절의 아테네 사람들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21]

조각의 경우 페리클레스 시대 제일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의 아테네 여신상이 최고라 전해지지만 남아있지는 않다. 기원전 4세기 스코파스나 프락시텔레스 등의 작품을 볼 때, 그리스 조각은 인체의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각은 현존하는 것이 없고, 대부분 모조품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22]

그리스 회화는 별로 없으나 아테네 도자기를 통해서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기원전 7 ~ 6세기부터 아테네인들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그림은 일상생활에 쓰인 도자기에 그려졌기에, 이를 통해서 당시 그리스인들이 생활 속에서 예술을 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23]

헬레니즘 세계[편집 | 원본 편집]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기원전 323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기원전 30년까지를 헬레니즘 시대라 부른다.[24] 헬레니즘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을 바탕으로 세워진 세계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성공은 너무나도 경이적이었다. 저 서방의 조그만 나라가 거대한 페르시아를 이수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이겨 제국을 무너뜨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거기에 페르시아 제국 너머 인도까지 도달한 그의 업적은 신화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굉장한 업적이었기에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그를 신격화하였다.[25]

알렉산드로스의 거대한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휘하 장군들과 후계자들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찢겨졌다. 이 권력다툼 속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3개의 주요 가문으로 분열되었다. 오리엔트와 소아시아 일부를 장악하는 시리아의 셀레우쿠스 가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가문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가문이었다. 3개 국가로 정립된 이후에도 이들은 서로 전쟁을 지속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헬레니즘 세계는 지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점점 축소되었다. 먼저 가장 이질적인 중앙아시아 지역이 떨어져나갔고, 소아시아에서는 다양한 소규모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헬레니즘 세계가 분열과 전쟁을 거듭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면서, 당시 서지중해의 지배자였던 카르타고에 도전하였다.

헬레니즘 세계의 사회[편집 | 원본 편집]

헬레니즘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동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였다. 이 경제적 통합은 이후 제국이 분열되어도 그 명맥은 유지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제국 시절 통용되던 주화와 언어를 사용하였고, 이는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상업의 발전 속에서 신용거래와 금융이 발전하였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금괴를 얻은 뒤, 이 금괴를 부하들에게 상여금으로 주거나 건물을 짓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면서 많은 소비가 발생했고, 이는 도시 발전을 촉진시켰다. 헬레니즘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알렉산드리아(당시 인구 50만), 페르가뭄, 비잔티움, 로도스 섬, 안티오크가 있었다. 이 지역 모두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상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도시의 발전은 도시민들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곧 식량부족으로 이어졌다.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헬레니즘 세계의 국가들은 국유지를 분배했으며, 노예로 경영하는 대농장이 등장하였다.[26]

헬레니즘 사회는 중산층인 그리스인들이 하층민인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구조였고, 이 구조는 이 둘 사이의 소요와 분쟁을 야기시켰다. 이런 분쟁이 점차 많아지고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지만 당시 헬레니즘 국가들은 이런 분쟁을 제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였고,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편집 | 원본 편집]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 과거의 설명은 동서문화의 융합이었다. 그러나 최근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아티카 지방어인 코이네가 공용어로 쓰였고, 아티카 지역의 화폐가 공용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인 문화이다.

그리스 문화에서 특히 철학부분에서는 키프로스의 제노가 창시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가 창시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시민론을 주창하였지만 이는 이상적인 의견이었고, 현실적 행복을 추구하였다. 또 스토아 학파는 이러한 현실적 행복은 금욕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금욕주의를 주창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즐거움(pleasure)을 좋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의 즐거움은 정신적인 즐거움을 의미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향락주의로 변질되었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모두 개인주의를 강조하였고, 이는 과거 철학과는 다른 특징이다.

헬레니즘 미술은 현실적이고 개성적인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라오콘군상이 있다. 또한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엔 70만권에 이르는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다양한 학문이 발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27] 천문학에서는 아리스타르코스(B.C. 310–230)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측정방식의 한계로 인해 지동설은 맞지 않았고, 이에 서기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는 힙파르코스(B.C. 190-126)의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채택하여 천문학총론(Almagest)를 제작하였다.

수학의 분야에서는 에우클레이테스 또는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아폴리니우스가 삼각법을 고안하였다. 과학에서는 아르키메데스(B.C. 297-212)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지리학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어 에라토스테네스(B.C. 275-174)는 지구의 지름을 계산하였는데 이는 오차가 200마일(321km)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28]

로마 세계[편집 | 원본 편집]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 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박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더 읽어볼 거리[편집 | 원본 편집]

  •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 한울. 2007.
  •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김주경 옮김. 『알렉산더』. 서울: 해냄출판사. 2004.
  • 민석홍 · 나종일 · 윤세철 지음. 『세계문화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각주

  1. 즉 대략 2000년 정도.
  2. 미케네 문명의 문자인 선상B문자가 해독되었고, 그 문자가 그리스어와 유사하며 그리스어의 기원으로 추정되기에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의 선조로 본다. 미노아는 아니다.
  3. 3.0 3.1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p.29-32.
  4. 이 시기 폴리스는 성벽이 없는 그냥 언덕이었다.
  5. 참고로 여기서의 식민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 시기 그리스의 식민은 어떤 타지역에 가서 현지인과 어울리는 것이고, 19세기의 식민은 다른 지역을 장악하여 착취하는 것(이른바 원료의 공급처이자 상품의 판매처)이다.
  6. 그리스 지역은 척박할 대로 척박한 지역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기후도 개판인데다 평지도 없다. 그렇다고 광물이 많이 나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잠깐 눈물 좀 닦고) 그에 비해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은 충분한 평지와 광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7. 페르시아의 점령정책은 상당히 온건하다. 괜히 오랫동안 대제국을 유지한 게 아니다.
  8. 스파르타가 치사해 보이지만 변명해 주자면 당시 그리스 폴리스들은 제각기 다른 기념일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 기념일 동안만큼은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아테네에선 운이 없게도 1, 2차 그리스 원정 모두 스파르타의 기념일이 끼어 있었을 뿐이다.
  9. 사실상 독재
  10. 이는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타인들의 희생을 담보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1. 당연하지만 페르시아는 흔쾌히 요청을 수락했다.
  12. 이 민주정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정이다.
  13.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3
  14. 아가멤논이 전쟁에 이기려고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고 이에 분노한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아가멤논을 죽인다. 이후 아들 오레스테스는 누이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그 애인을 죽인다는 이야기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원래 막장 드라마가 재밌는 법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유서깊은 이야기 구조.
  15.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p. 83-84.
  16. 숙부인 테베 참주(왕)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죽는 안티고네의 이야기.
  17. 자기도 모르게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
  18.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4
  19.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5
  20. 순서대로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복잡하고 화려한 양식을 지닌다.
  21.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5
  22.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6
  23.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6
  24.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52
  25. 예를 들어 피르다우시가 쓴 『왕들의 서』에 따르면, 죽어가는 다리우스가 알렉산드로스를 보면서 ‘‘I'm your fatherbrother.’’라 말했다고 전한다. 즉,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이복동생이고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마케도니아로 가 왕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프랑수아 슈아르의 『알렉산더』 p.102 참조
  26. 이집트는 제외한다. 이집트는 당시 모든 경제를 국가가 통제하는 나라였다.
  27. 그러나 로마의 침략과정에서 소실되어 정확히 어떤 분야가 발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28. 이는 지구가 둥글었다는 것을 그리스시대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