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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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ia tōn Rhōmaiōn


한국어 : 비잔티움 제국, 비잔틴 제국


영어 : Empire of the Romans, Byzantine Empire


비잔티움 제국(330~1453)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비잔티움 제국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27년 성립된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정된다. 과거에는 로마 제국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정치체로 간주되었으나 현 시점에 이르러서는 문화적, 시대적 차이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명칭

황제의 명칭은 남자의 경우 바실렙스(Basilleus). 여자인 경우 바실리사(Basillisa)라고 한다.

수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보랏빛 출생

콘스탄티노플의 황궁 높은 곳에는 온통 보라색으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 방은 콘스탄티노플과 그에 인접한 해안 전체가 보이는 전망좋은 곳이었으며, 황후는 이 곳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이 방에서 태어난 아이는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아이로 불리며 후에 황위 계승 시 더 큰 정통성이 부여되는 비잔티움의 독특한 전통이다.

역사

불분명한 시점

구체적으로 비잔티움 시대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하느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상기에서 언급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항목을 참고 바람. 보통은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의 로마 재통일(324), 콘스탄티노플 착공 또는 니케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천도(330), 동서로마 분열(395) 등을 제시하기 때문에, 4세기로 통틀어서 일컫는 경우가 많다.[1]

시대구분의 문제

시대구분의 문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항목을 참고 바람.

초기: 4~7세기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1세의 3분할 통치 내내 적지 않은 혼란이 이어졌으며 율리아누스(361-363)의 시대에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이교부흥정책이 전개되었으나 이미 '상호부조'(Diakonia)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적극 전개하여 2세기 이래로 제국 하류 계층의 민심을 끌어안았기 때문에[2] 그리스-로마 다신교는 뒷받침해줄 세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제국의 기독교화는 더욱 분명한 흐름이 되었다.[3]

이후 제국에는 고트족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훈족의 침공에 쫓겨 동로마 지역인 트라키아 지방으로 망명해 온 고트족들과 지역 로마 정부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378년, 고트족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인근에서 발렌스 황제가 지휘하는 로마군을 궤멸시켰다. 그 직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의 적극적인 수습 덕분에 양자는 화해하고 한동안 고트족은 제국 동부 지역에 정착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 직후부터 점점 기독교 신앙, 특히 정통 교리 아래 제국을 통일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380년부터 아리우스파는 물론, 기존 다신교의 공식적인 제사 등의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게 되었으며 392년까지는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금지하게 되었다.[4](올림픽 경기 역시 이러한 와중에 폐지되었다. 비슷한 시점에 알렉산드리아 이교 신전에 속한 신전도서관도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자체가 아니며, 신전도서관도 이 시기에 이르면 사실상 소장 중인 도서가 없다는 언급도 발견된다.[5])

중기 8~12세기

위기의 극복

674~678년 사이 이슬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5차례 공격하였으나 672년에 개발된 그리스의 불과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적 입지, 로마 해군의 존재로 말미암아 7세기 말의 위기는 그것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분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슬람 제국이 70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차 공격을 준비하는 가운데 비잔티움 내부에서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폭압정책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되고 찬탈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위험신호가 연달아 나타났다. 특히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의 폭동이 중요한 문제를 야기하곤 했다. 713년, 바르다네스 필리피코스(Bardanes Philipikos, 711-713) 황제를 폐위시키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Anastasios II, 713-715)를 등위시킨 이 군대는 715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로도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재차 반란을 일으켜 테오도시오스 3세(Theodosios III, 715-717)를 앉히기에 이르렀다. 비잔티움의 방어가 흐트러지는 사이, 이슬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재차 준비하기 시작했다. 717년, 마슬라마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의 대군이 아나톨리아로 진격해오자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이던 레온(Leon)이 반란을 일으켜 마슬라마의 군과 함께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니코메데이아(Nikomedeia) 인근에서 정부군은 레온의 군대에 패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시오스 3세는 레온과 협상하여 황제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이 레온이 레온 3세(Leon III, 717-741)이다.

애당초 마슬라마의 군대에 협력할 생각은 딱히 없었던 레온은 이슬람 제국과 순식간에 적대관계로 돌아섰으며, 마침내 717년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을 맞아, 적의 종심 깊숙이 들어와 보급선 유지도 힘들던 이슬람 제국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강력한 육로성벽을 뚫을 수 없었고, 해로에서도 그리스의 불을 적재한 비잔티움 함대에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718년 초, 본국의 지원 함대를 얻어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선원 다수를 이루던 기독교인들이 탈주하면서 그 역시 실패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군대가 마슬라마의 군을 공격함에 따라 피해가 누적되어, 칼리프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 군대는 철수하였다. 이로써 674년 이후로 계속되었던 생존의 위기는 지나가게 되었으며 이슬람 제국의 침공 역시 소아시아에 한정되었다. 또한 740년, 아크로이논(니코폴리)에서 레온 3세의 군대가 이슬람군을 재차 대파하면서 이슬람의 위기는 일단 이것으로 소아시아 서부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종교정체성 논쟁: 성화상숭배 논쟁

체제개편

이사우리아 황실의 몰락

니키포로스 1세의 개혁: 내정과 유럽질서의 변혁

불가리아의 위협

반격의 시작

섭정통치 시대(913-944)

공세적 팽창(920-1045)

복잡계 사회의 위기(1045-1081)

콤니노스 체제(1081-1180)

대안적 체제의 부재(1180-1204)

후기 13~15세기

제국들의 잔치(1204-1263)

4중전선의 악몽(1263-1329)

체제개혁과 시민전쟁(1328-1354)

무력감의 시기(1354-1384)

생존투쟁(1384-1453)

경제

초기: 4~6세기

중기: 7~12세기

후기: 13~15세기

군대

초기: 4~6세기

중기: 7~12세기

후기: 13~15세기

사회

정치체제

비잔티움 공화정 문제

병원

연구자/연구사

  1. 심지어 늦으면 서로마 멸망(476년)을 기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Anthony Millier, The Birth of Hospital of the Byzantine Empi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pp.70-72
  3. 존 노리치, 남경태 역,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06, 145-154쪽
  4. 앞의 책, 162-187쪽.
  5.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_%EB%8F%84%EC%84%9C%EA%B4%80#.EC.BD.A5.ED.8A.B8_.EC.A3.BC.EA.B5.90_.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_.EB.B2.95.EB.A0.B9.2C_.EC.84.B8.EB.9D.BC.ED.8E.98.EC.9D.B4.EC.98.A8.EC.9D.98_.ED.8C.8C.EA.B4.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