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4월의사랑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8월 19일 (수) 21: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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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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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대한민국의 작가, 언론인, 대학교수, 강단사학자인 척하는 유사역사학자이다. 그리고 떡밥제조인과 독살매니아이다. 고대사의 김대령으로 부른다.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정설이지만,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어왔던 이슈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관련 사료를 제시한 30여 권의 유사역사비평서를 집필하였다.

이력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 출신으로,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여, 숭실대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간(月刊)중앙 WIN 기자, 월간(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의 객원필진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현재는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다양한 쟁점들을 대중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유사역사를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환빠들에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역사왜곡에도 악명이 높다. 5.18등 굴직한 현대사에 김대령이 있다면, 고대사조선사엔 이덕일이 있다. 그 만큼 악질적인데 가장 악명 높은 건 김현구 교수에 대한 왜곡이다. 임나일본부설 반박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사람은 임나일본부설 주장학자로 왜곡했다.[1]

이덕일의 떡밥인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을 폈던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를 저술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사도세자가 꿈꾸던 나라 등이 있다.

행적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주장

이덕일은 한사군이 한반도안에 있었다는 설은 식민사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패수가 압록강에 있었다는 주장도 식민사관이라 주장한다.

식민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은 일종의 메시아다. 요즘은 한사군 대신에 한군현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배 찬양 논리를 극복한 것 처럼 말 장난을 한다. (……)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한다[2]
실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 일대이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논리는 헛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관을 지배하신다'는 교리와 '식민사학은 우리의 영원한 신앙'이라는 도그마에 따라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이라는 둥 대동강 남쪽의 대동면 토성리라는 둥 우기는 것이다.[3]
이나바 이와키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하고, 이병도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한 패수가 왜 압록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 뿐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쓰다 소치키가 이병도의 와사다대 스승이기 때문이다.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키치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4]

진실

그러나 사실 이 설을 학문적으로 시작하고 실제로 영향을 미쳤던 건 한백겸과 정약용이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사실 추구 성향을 띤 역사지리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의 시작은 한백겸 선생이 쓴 『동국지리지』[5]이다. 이 책 뒤로 역사 지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서들이 나왔으며 그것은 "근대역사학과 지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6]

한백겸은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 고증을 하는 방법으로 연구했다. 한백겸 선생은, 삼국 이전시대에는 한반도가 한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역사를 전개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한 나라와 있는 경계인 패수는 청천강, 왕검성이 있는 열수는 한강으로 비정했다. 한백겸은 패수가 조선의 북계이며 대동강은 아닐 것이고, 또 마자수가 있는데 이 강은 서개마를 나와 서안평으로 들어간 것, 압록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청천강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있으니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송호정 박사는 이런 입론을 "패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봐도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한백겸 선생은 낙랑군의 위치는 이렇게 판단했다. 낙랑군은 평양으로, 현도군은 함흥지방, 임둔군은 강릉 일대, 진번의 경우만 불명하여 조선, 임둔, 진국 사이에 비정하고 있다. 송호정 박사가 평하길 "이러한 연구 내용은 이후 한사군 위치에 대한 대체적인 틀을 세웠다"고 하였다. [7]

또한 정약용 선생도 고대사 연구를 했는데 그걸 책으로 낸게 『아방강역고』이며 이런 연구는 "조선 후기에 상고시기의 역사 · 지리 연구는 정약용에 의해 한 단계 진전하게 된다." 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기존 역사책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아방강역고』-『조선고』 에서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이며 한사군도 진번을 빼면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8]. 또한 이『조선고』에서 말하길 "지금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최초에 조선이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하기도 하나, 원래 『사기』소진열전, 화식열전 및 기타에서 다 조선, 요동, 진번등을 처음부터 갈라서 써 놓은 즉 이것들을 혼돈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9] 실제로 학계에서도 『사기』소진열전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요동지역이 조선과 병렬되어있고, 요동지역이 연나라에 속하지않고 조선하고도 구분되어 나오며 이 때의 "조선요동"은 정약용이 본 것처럼과 '조선'과 '요동'을 병렬된 것으로 본다.[10]

정약용은 조선과 요동군은 처음부터 다른 것이며 조선의 중심은 평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선왕 만의 국도였던 왕검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었다고 한 후안인 응소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11]

다산은 고조선을 처음부터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 생각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하고 고조선도 처음에는 일정한 좁은 지역(정약용 선생은 그것을 현재 우리나라 서북부라고 생각)에서 출발하여 점점 광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2]

다산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원래 기자가 도읍한 바 있는 평양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위략』에는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의 서방 2천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경에서부터 의주까지는 2천리 1백리가 되니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서한 초에 국경으로 정해진 패수는 압록강일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했으니, 이미 요하를 건넜는데 어찌 다시 요수로 경계를 삼는단 말인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다시 큰 강이 없다면 패수가 곧 압록강이다"고 봤다. [13]


다산은 역사에서 패수로 인식된 강이 4개(대동강, 압록강, 요동의 헌우락, 평산 저탄수)가 있다고 하며 "하나하나 사엣한 고증을 통해 설명"했다. 또한 패수를 뜻매김하길 『수경』에서는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으로 인식했는데 역도원이 『수경주』를 쓰면서 스승의 말을 근거 없이 바꿔서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고 비판했으며 『사기』『조선열전』 내용에서 패수는 압록강을 잘못 인식한 것으라 주장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서는 압록강을 마자수로, 대동강을 패수로 구분지어 혼동되지 않게 되었다고 봤다. [14]

정약용은 한사군이 진번을 제외하고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낙랑이 평양이며, 현토는 함경도, 임둔은 평양 서남부 임진강 일대로 해석했다. 대방군도 요동이 아니라 임진강 하류 지방으로 비정했다. [15]

한사군에서 진번군은 만주의 동가강 이북지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진번 관련 단편적인 기사가 한군현 설치 이전시기 자료에도 나오고, 일부 기록이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것으로 봤기에 그렇다. [16]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와 황해도로 봤고 낙랑군의 이러한 위치 비정은 낙랑이 요동에도 있었다고 하는 당시 조선의 유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낙랑은 압록강 이서 지역에는 없었다고 하며, 조선 유자들이 낙랑이 요동에 있다고한 주장을 비판했다. 현토군의 경우는 다산은 함병남도 남부 지역으로 봤다. 그러면서 현토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사료에 나오는 것을 면밀히 검토하며 두번이나 이동하였다고 보았다. 송호정 박사는 다산이 "제2현도군과 제3현도군의 존재를 파악"해냈다고 평가하였다. 정약용 박사는 임둔은 강원도 지역으로 봤다. [17]

이런 정약용의 연구는 현대한국의 한국사학자들한테도 영향을 끼쳤다. 송호정 박사의 증언이다.

조선 역사는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고 실학자들의 문헌 고증에 바탕을 둔 역사 연구 흐름 또한 단절되고 말았다. 다만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일제시기와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18]

예로 패수에 대한 논리도 정약용이 완성한 것이다. 다시, 송호정 박사의 증언.

최근 우리학계의 이동성도 논의도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있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위만이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에 거주했다고고 하므로, 진말과 한초에 연 · 제 의 유이민과 위만이 거주하던 진고공지는 요동고새와 패수 이서에 있어야한다. 그러나 그 지역을 청천강 - 대동강으로 보기에는 너무 좁다. 그리고 『사기』기사를 보면 한과의 경계인 패수는 한 초에 진대의 고조선과 경계가 멀고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서쪽으로 그 경계선을 후퇴하여 고조선과 경계로 삼았던 강이다. 그런 만큼 청천강의 그 경계라면 후퇴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수 압록강설은 정약용에 의해 논리적으로 완성된 것이다[19]

패수 압록강설은 쓰다 소치키기 아닌 정약용이 완성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증언도 하였다.

무엇보다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실증에 입각한 문헌고증과 비판정신이이다. 오늘날 고조선사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은 실학자들이 실증한 문헌자료 외의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방대한 문헌 고증은 고조선사를 연구하려는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20]

그런데 이덕일은 정약용이 만든 학설조차 쓰다 소치키 라고 선동한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위키백과 이덕일 문서
  •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2015
  •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주석

  1.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215847928
  2. 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8쪽
  3.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9쪽
  4.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51~152쪽
  5. ("『동국지리는』한백겸(1552~1615)이 광해군 연간(1614~1615)에 저술한 책으로, 각 국가의 종족, 국가별 강역 변동 등을 문헌을 통해 고증하는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쪽 주석 8
  6.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쪽
  7.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24쪽
  8.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0~32쪽
  9.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5쪽.
  10.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11.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
  12.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13.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
  14.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38
  15.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쪽
  16.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17.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18.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47쪽
  19.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8쪽
  20.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