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Isaac914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8월 1일 (토) 23:02 판

틀:학술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은 세계 제국
몽골 제국과 현대 몽골의 영토

몽골 제국(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예케 몽골 울루스)은 1206년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유목 제국이다. 1206년 칭기스 칸이 몽골리아를 통일한 후 1세기 가까이 이어진 정복전을 통하여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일대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몽골 제국은 세계사상 가장 거대한 육상 제국이었으며, 세력 판도는 서쪽으로는 레반트, 이란, 동유럽부터 동쪽으로는 중국, 몽골리아, 만주까지 미쳤다.

그 거대한 영역만큼 몽골이 세계사에 남긴 영향 역시 지대했다. 몽골의 지배 하에 지중해 세계와 동아시아 세계 양쪽이 연결되었으며, 상업과 기술, 문화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동아시아와 지중해 세계는 처음으로 서로를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전에 없이 활발해진 교류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가 탄생했다. 이 시기를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평화라고 부른다.

14세기까지 각 지역의 몽골 정권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나, 14세기 중반 이후 서서히 그 힘이 약화되어 몽골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몽골의 유산은 그 이후로도 정주민과 유목민 양쪽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칭기스 칸 이전의 초원 세계

몽골인의 몽골리아 이주

훌룬부이르 지역 (빨간 표시)

몽골리아 초원은 몽골인의 이름을 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지역이 항상 몽골인의 영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4세기 경 투르크계 유목민 고차가 유입된 이후 6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투르크계 유목 제국인 돌궐위구르가 몽골리아를 지배했다. 당시 몽골계 유목민 세력은 훌룬-부이르 지방을 경계로 몽골리아 초원 동쪽에 머무르며 투르크계 유목 제국들과 대립했다. 이들은 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에서 '실위(室韋)'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실위 내에 속하는 집단 중 몽올(蒙兀) 실위가 후에 "몽골"이라고 불리게 되는 집단이라고 추정된다. 몽올 외에도 달단(達靼) 실위 등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눈에 띄는데, 이들이 바로 타타르였다. 타타르는 돌궐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는 등 이 당시에도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 인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야 몽골계 유목민들은 서서히 몽골리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이동한 집단은 타타르였다. 이들은 10세기 후반 이미 몽골리아 중앙부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

요나라의 세력 판도

"몽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이주는 훨씬 늦어 12세기 중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인들의 특징적 매장 양식[2]의 분포를 살펴 보면 이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아르군 강 유역에 머물다 11세기 무렵에는 오논 강 하류에,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오는 강 중류 유역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3] 몽골인들의 이주가 늦은 것은 앞서 자리잡은 타타르가 위협을 가했을 뿐 아니라, 10세기 전반 몽골 초원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거란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주에서 몽골리아 동남부에 걸친 요나라를 건설한 거란인들은 장벽을 건설하고, 요새를 구축하는 등 타타르를 비롯한 몽골계 유목민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125년 요가 멸망하면서 몽골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막던 힘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11세기 이후 북방 고원의 기후가 한랭화되자 몽골인들은 유목 생활의 영위가 어렵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본격적으로 몽골리아 초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몽골리아의 정세

12세기 후반 각 울루스의 분포

11세기 초원 기후의 한랭화, 위구르 붕괴 이후 몽골리아 전체를 다스리는 강력한 유목 제국의 부재 등으로 12세기 초원의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였다. 전쟁과 약탈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좀 더 강한 집단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집단 간에도, 개인 간에도 좀 더 수직적인 질서가 들어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몽골리아는 몇 개의 거대 '울루스'의 세력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울루스는 몽골리아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울루스는 '오복'들의 연합체였다. 오복(Oboq)은 한 가문이 이끄는 유목민 사회의 단위로, 대체로 "씨족", "가문"으로 번역된다. 울루스의 지배층은 여러 오복들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통솔하며 국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단, 울루스는 영역 국가의 개념이라기보다 사람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녔다.[4]

북방에는 삼림 지역에 접한 오이라트와 메르키트 울루스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타타르 울루스가 자리했다. 타타르는 중국과 접한 위치에서 교역과 약탈을 수행하기 용이했으며, 철 산지를 장악하여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타타르 동북방에 몽골 울루스가 위치했다. 몽골인들은 몽골리아에 늦게 진출하였지만 전쟁을 통하여 서서히 영역을 확장시켜 부르칸 칼둔 산 부근에 근거지를 두었다. 타타르의 서쪽에는 케레이트 울루스가 있었다. 케레이트 울루스 서쪽, 알타이 산맥 부근에 나이만 울루스가 있었다. 나이만 울루스의 귀족층은 투르크 계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구르와 교류하며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5]

몽골 울루스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금의 건국 이후 초원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변경 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1135년부터 시작된 약탈전은 1139년 몽골군이 금 토벌군을 격파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몽골군은 금의 요새 20여 개를 점령하는 등 금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결국 1146년 금과 몽골 사이에 화평 조약이 체결되었다. 금이 몽골 지도자 올룬 베일레(카불)을 몽골 국왕으로 임명하고 매년 콩, 소, 양, 쌀을 보내겠다는 조건의 조약이었다. 카불은 몽골 전체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금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금나라는 각 울루스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몽골 울루스를 견제한다. 카불 칸의 뒤를 이은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인들에게 붙잡혀 금나라로 압송되었으며, 금나라에서 나무 나귀에 못박혀 처형된다. 그는"너희들의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다 빠지도록, 너희들의 열 손가락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나의 원수를 갚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6]

이처럼 당시 정세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약탈했다. 몽골비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7]

칭기스 칸의 등장

버려지다

예수게이 (상상도)

칭기스 칸은 보르지긴 오복 출신이며, 이름은 테무진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카불 칸, 암바가이 칸, 쿠툴라 칸 등 보르지긴 오복의 지도자들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칸을 칭했다. 그러나 쿠툴라 칸 사후 보르지긴 오복은 쪼개졌다. 암바가이 칸 가문인 타이치우드와 카불 칸 가문인 키야트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는 키야트, 암바가이 칸의 손자 타르쿠타이는 타이치우드를 각각 이끌었다. 두 가문[8]은 협력을 하기도 했지만 갈등하는 일도 많았다. 어느 한 쪽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어 보르지긴 오복 전체를 대표하며 몽골의 칸을 칭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인들에게 독살당하면서 보르지긴 오복의 주도권이 타이치우드로 넘어간다. 예수게이의 맏아들이었던 테무진의 일족은 순식간에 그들을 따르던 전사들과 친족 대부분에게 버림받게 된다. 테무진이 성장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친족들이 그의 일족을 공격하여 그를 포로로 잡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돌아온 그의 곁에는 동생들과 어머니 뿐, 지지 세력이라고는 없었다. 테무진은 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9]

그림자말고는 벗도 없고, 꼬리말고는 채찍도 없다

이족과의 연합

울란바토르에 있는 보오르추의 동상

테무진 일족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족(異族)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전에 정혼해준 보르테(ᠪᠥᠷᠲᠡ)와 결혼이 그 시작이었다. 혼인을 통해 두 가문이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을 "쿠다(Quda)"라고 불렀다. 보르테는 콩키라트(옹기라트라고도 불림)라는 집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력 세력은 아니었으나, 중국과의 교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부를 누렸다. 테무진은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를 맺은 토그릴(후에 옹 칸이라는 칭호를 받음)에게 찾아갈 때 혼수품으로 받은 모피 외투를 바쳤는데, 콩키라트와의 연합을 통하여 얻은 부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토그릴은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로, 예수게이와 의형제, 즉 '안다(Anda)'를 맺은 사이였다. 언급했듯 테무진은 모피 외투를 들고 그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안다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의미로, 안다를 맺은 사이에는 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안다는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 간의 매우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의미했다. 테무진 스스로도 여러 집단의 지도자들과 안다를 맺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자지라트의 지도자 자무카와의 관계였다. 보르테가 1184년 약탈당했을 때 자무카는 테무진을 도와 보르테를 되찾아왔으며,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한동안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망쿠트의 지도자 쿠일다르와도 안다를 맺었다. 쿠일다르는 케레이트와의 전투에서 테무진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

그 외에도 '친구, 벗' 등을 뜻하는 누케르(nöker)라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테무진과 처음으로 누케르가 된 사람은 보오르추였다. 보오르추는 말을 도둑맞은 테무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말을 빌려주었으며, 말 도둑을 함께 추적해 말을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누케르는 평등한 관계로,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 동맹의 성격 역시 지녔다. 테무진칭기스 칸으로 즉위한 후에는 누케르의 성격이 평등한 관계에서 주종관계로 변화하였다. 칭기스 칸의 누케르들은 칭기스 칸에게 충성하는 전사 집단으로 활약하며 신생 몽골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0]

초원의 지배자로

1182년, 테무진은 생존을 위해서 아버지와 안다를 맺었던 토그릴(ᠲᠥᠥᠷᠢᠯ)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옹 칸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였다. 케레이트와의 연합으로 테무진 일가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허덕이지는 않게 되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테무진 일가에 다시 고난이 닥친 것은 1184년이었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메르키트로부터 약탈하여 결혼했는데, 이 일 이후로 메르키트는 예수게이의 일족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1184년, 메르키트는 테무진 일가를 습격하여 그의 아내 보르테를 약탈한다.

아직도 이렇다 할 지지 세력이 없던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때 테무진은 혼수품으로 받았던 모피 외투를 옹 칸에게 바치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토그릴테무진에게 2만의 병력을 주었으며, 자무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11] 자무카(ᠵᠠᠮᠤᠭ ᠠ)는 테무진과 어릴 적 안다를 맺은 사이로, 당시 막 자지라트 (쟈다란이라고도 불림)의 군주로 올라선 상태였다. 자무카는 흔쾌히 테무진을 도와 메르키트를 공격했다. 토그릴과 자무카의 협력으로 테무진은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보르테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테무진은 곧 보르테가 임신을 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보르테는 메르키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칠게르라는 인물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보르테가 밴 아이가 칠게르의 아이인지, 테무진의 아이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보르테가 아이를 낳자 테무진은 이름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Jöchi)'로 짓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이로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주치의 혈통 문제는 칭기스 일족 내에서 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같이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차 악화된다. 테무진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가면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결국 테무진1186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친족들만으로 구성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즉위한다 (1차 즉위). 그러나 이는 이름 뿐인 즉위였다.

1187년, 테무진은 자무카와 타이치우드 세력 연합군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를 달란-발주트 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투에서 테무진은 대패를 당한다. 케레이트 울루스의 토그릴 역시 실각하여 서요(카라키타이)로 쫓겨났다. 테무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까지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196년, 금나라 군대는 케레이트와 몽골 일부 세력과 연합하여 타타르를 정벌하였다. 테무진과 토그릴은 각각 몽골군과 케레이트군을 이끌었다. 승전 이후 토그릴은 케레이트 칸의 자리를 되찾았으며, 금으로부터 옹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테무진 역시 몽골 울루스를 지배하는 위치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이후 테무진1198년 케레이트와 연합하여 몽골을 견제하던 나이만 울루스를 공격하는 등 몽골 울루스의 세를 빠르게 불려나갔다.

테무진에게 복종하지 않은 나이만 집단들과 타이치우드 세력은 자무카와 연맹했다. 자무카는 이들 사이에서 쿠릴타이를 통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뜻인 구르 칸으로 추대되었다. 1201년, 자무카와 테무진은 쿠이텐에서 맡붙게 된다. 쿠이텐에서 테무진은 천운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쿠이텐 전투 이후 자무카는 다시는 테무진과 필적할 만한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 시기 이후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바로 타타르 원정의 시작이었다. 테무진에게 타타르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타타르를 정복한 몽골인들은 수레 굴대보다 키가 큰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몽골 울루스 안으로 흡수하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몽골 울루스의 남성들과 결혼시켰으며, 아이들은 몽골 울루스에서 양육하도록 한 것이다.

칭기스 칸과 옹 칸

토그릴 (옹 칸)은 테무진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이 시기부터 테무진과 옹 칸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옹칸의 아들 셍굼은 초원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던 테무진이 아버지 옹 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시기하여 테무진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옹 칸은 수 차례 거절하다가 결국 아들의 말에 따라 테무진과의 협력을 중지하였다. 테무진은 이를 알고 셍굼을 격파하였다. 이 기록만을 보면 관계 악화의 주범은 옹 칸이 아니라 셍굼이지만, 관계 악화에는 아마도 무섭게 불어나는 테무진의 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옹 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쿠이텐 전투 당시부터 옹 칸은 테무진을 견제하기 위해 자무카와 연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2]

옹 칸과 테무진 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둘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옹 칸은 단독으로 나이만 원정을 떠났다가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서요, 천산 위구르 등을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결국 그는 테무진에게 손을 벌렸고, 테무진은 옹 칸을 도와 왕위를 되찾게 해 준다. 이후 테무진은 자신의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결혼시키기를 청한다. 그러나 옹 칸은 테무진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는 초원의 사회에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로서 둘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치닫게 된다. 결국 옹 칸은 자무카와 연합하여 1203년부터 테무진과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 초반에는 테무진열세에 몰려 퇴각하였으나, 1204년 케레이트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어서 테무진은 메르키트와 나이만에 대한 정벌을 시작하여 1206년 둘을 정복한다.

1205년 자무카가 수하들의 배신으로 잡혀와 처형된 후, 칭기스 칸1206년 다시금 쿠릴타이를 열고 칭기스 칸으로 등극한다. 이를 2차 즉위라고 부르며, 이는 1206년을 유목민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 된 해로 만들었다. 1206년은 칭기스 칸 휘하에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이 통일되어 밖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해였다.

초원 사회의 재편

칭기스 칸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진행되던 초원 사회에 대한 개혁은 그가 몽골리아를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등극한 1206년부터 가속화된다. 초원 사회는 봉건적인 구조를 띠었다. 유력 가문들이 각 오복, 나아가 각 울루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며, 울루스, 즉 국가의 조직 역시 분권적이었다. 군주가 직접 다스리는 영역이 있고, 나머지 영역은 휘하의 수령들이 분봉하여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칭기스 칸은 분봉의 구조는 따르면서도 가문 중심의 질서는 파괴하는 노선을 택했다.

만호의 배치

테무진은 새로이 천호제를 마련했다. 천호는 1천명의 전사를 배출하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에게 충성했던 자들 가운데 88명의 천호장을 뽑아 95개의 천호를 맡겼다. 천호 휘하에는 백호, 십호 등의 하위 조직들이 구성되었으며, 백호장과 십호장 역시 칭기스 칸에게 충성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천호는 무칼리가 이끄는 좌익 만호, 보오르추가 이끄는 우익 만호, 그리고 보로굴이 이끄는 중앙 만호 세 개 만호로 나뉘어 배속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천호제는 신생 몽골 제국의 기초가 된 사회, 군사 조직이었다. 이들은 몽골 제국이 정복전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 군사력의 중추를 담당하였다.[13]이는 유력 가문 중심의 질서를 타파하고 칭기스 칸에 대한 충성으로 짜인 새로운 질서를 마련한 것이었다.

동시에 칭기스 칸은 자신의 친위대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시작했다. 이전 시대 몽골 수령들 역시 친위 부대를 조직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칭기스 칸이 조직한 1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친위대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를 케식(Keshig)이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의 케식의 지도부를 맡은 것은 칭기스 칸의 누케르들과 보골(Boghol)들이었다. 보골이란 '집의 아이들'(ev oghlan)으로도 불리던 노예들이었다. 주인과 직접적으로 혈연관계가 없지만 한 익, 혹은 한 가문 내에서 세습의 대상으로 여겨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보통 노예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려 주인을 도와 전쟁에서, 혹은 평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집의 아이들'이라는 명칭은 이들의 이 같은 지위를 명확히 보여준다. 칭기스 칸 가의 보골들은 정복전에서도, 국가 경영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했다.[14]

케식의 1만 병력을 채운 것은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들의 아들들이었다. 새로 임명된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들은 아들을 "투르칵(turqaq, 인질)"로 보내고, 아들의 수행원(종자 從子)를 보낼 것을 요구받았다. 각 수령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3~10명의 종자를 같이 보냈기에, 케식의 실제 병력은 1만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고 한다. 케식은 4개 반으로 나뉘어 3일 단위로 교대해여 칭기스 칸을 호위했다. 각 반의 수장은 보오르추, 무칼리, 보로쿨, 칠라운이 맡았으며 그들의 사후에는 그들의 자손들이 맡도록 하였다.[15] 케식은 호위병이었을 뿐 아니라 요리, 양떼 감독, 통역, 문서 작성 등 여러 직책으로 나뉘어 칭기스 칸의 일상적 업무를 보조했다.

케식은 "은총", 혹은 "당번"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는 케식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칭이다. 케식의 탄생은 칭기스 칸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그와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한, 칭기스 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대규모 전사 집단의 탄생이었다. 그들은 제국 전체를 다스려 나가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엘리트 전사, 정치 집단이었던 것이다.[16]

또한 칭기스 칸은 "자삭 (Jasaq)"혹은 "야사 (yasa)"라고 불리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서 칭기스 칸이 주도하는 초원의 질서는 좀 더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어 안정화되었다. 자삭은 칭기스 칸 사후 우구데이 대에 책자 형태로 정리되어 예케 자삭, 즉 대자삭으로 불리게 된다. 현재에는 자삭의 일부만 전하나, 사회법, 군율 등을 포괄한 법이었음은 분명하다.

분봉

몽골리아 통일 이후 칭기스 칸은 자신의 동생들과 아들들에게 분봉을 실시한다. 천호를 분배하여 아들들과 동생들이 각자 맡은 영역을 나눈 것이다. 우익, 즉 서쪽에는 아들 4명의 울루스를, 몽골리아 본토에는 자신이 직접 장관하는 중앙 울루스(ghol-un-ulus)를, 동쪽에는 4명의 동생과 어머니의 울루스를 두었다. 후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 테무게가 어머니의 울루스를 같이 맡게 되면서 4제자(諸子) 울루스와 중앙 울루스, 4제제(諸弟) 울루스로 이루어진 체제가 성립되었다. 몽골 제국은 여러 울루스의 연합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17] 이로서 몽골 제국은 유목 제국으로서 완비된 체제를 지니게 되었으며, 밖으로 뻗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정벌과 회유

이후 칭기스 칸 휘하의 몽골 울루스는 밖으로 그 칼날을 돌리기 시작한다. 1207년 키르기즈, 오이라트 등 삼림민(森林民, 수렵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복속시켰으며, 1209년에는 몽골은 탕구트를 시작으로 정벌의 길에 오른다. 3 세대에 걸쳐 이루어질 정복전의 시작이었다. 아직 몽골 울루스의 깃발 아래 몽골리아가 통일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왜 몽골인들은 그렇게 급히 바깥으로 뻗어나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유목민 경제의 낮은 생산성에 있다. 통일된 유목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화가 소모된다. 전사 집단을 유지하고 군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포상과 의례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유목민은 서로를 약탈하며 필요한 물자를 취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상호 약탈이 금지된 새로운 체제가 탄생한 이상,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 물자를 끌어와야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칭기스 칸 대의 전쟁의 목적은 상대를 굴복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주민 지대를 직접 지배한다는 개념은 아직은 미약했다. 수 세기에 걸친 상호 전쟁으로 단련된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은 칭기스 칸의 지휘 하에 그 저력을 세계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몽골 주변 국가들의 판도

칭기스 칸은 정복자, 전쟁 군주로 유명하지만, 스스로 복속해오는 상대에게는 매우 너그러웠다. 1209년에 천산위구르가, 1211년에는 카를루크가 스스로 복속을 청하자 칭기스 칸은 크게 기뻐하며 그들의 군주에게 딸을 시집보내 우대하였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몽골 정권의 두뇌 집단으로 활약하며 제국에 반드시 필요했던 정치적 지식을 전수했다. 위구르 문자가 몽골 문자로 채택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뛰어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몽골 시대 동안 이란인들과 쌍벽을 이루는 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18] 한편 카를루크 인들의 언어는 후에 차가타이 울루스의 공용어가 되어 차가타이어로 불리게 된다. 몽골인들은 스스로 복속해오는 집단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배신 행위를 하는 집단은 가차없이 짓밟았다. 이는 약탈에 익숙한 유목민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었으나 주변국에 몽골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자발적인 복속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209년 서하 (탕구트 정권) 정벌은 위구르와 카를루크가 스스로 복속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렇게 몽골리아 서방의 세력들을 정리한 후, 칭기스 칸의 눈길은 동방을 향했다. 몽골의 오래된 원수, 금나라에 대한 정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금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우구데이 카안의 치세

칭기스 칸의 사망

즉위 배경

통치 기구의 정비

뭉케 대칸의 치세

구육의 즉위와 사망

뭉케의 즉위

동방 정벌

서방 정벌

쿠빌라이의 즉위

후계자 다툼

"4칸국"의 성립

팍스 몽골리카

몽골 제국의 붕괴

영향

각주

  1.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 79, ISBN 978-89-7199-404-7
  2. 북두위신전장(北頭位伸展葬)
  3. 김호동, op. cit., pp. 80~82.
  4.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저,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소나무, 2005, p.192, ISBN 89-7139-325-4
  5. 김호동, op. cit., p. 87.
  6. 몽골비사
  7. 몽골비사, 무당 쿠쿠추가 보르테를 변호하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c7U5&articleno=970 에서 인용.
  8. yasun, '뼈'라는 뜻이다.
  9. 몽골비사
  10. 김호동, op. cit., p. 99.
  11. 몽골비사. 실제로 2만이나 되는 병력을 주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12. 딴 산 블로그 참고.
  13. 김호동, op. cit., p. 104.
  14. 김호동, op. cit., p. 99.
  15. 고마츠 하사오 외, op. cit., p.198.
  16. 김호동, op. cit., p. 109.
  17. 김호동, op. cit., pp 111~113.
  18. 고마츠 하사오 외, op. cit., pp 162~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