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Sohyun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0월 24일 (화) 01:34 판 (→‎국제적)

윤봉길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0대 시절

윤봉길은 17살이 되던 1924년에 서당의 훈장이 되어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울러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고향 시량리에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시작으로 점차 농촌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는 등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운동의 교재를 저술하고. 월진회나 독서회 등을 운영하며 고향의 청년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 하였다. 이런 활동은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었고, 식민지 조국 의 현실을 고민하던 중 마침내 1930년 3월 농민운동의 결실을 보 려면 먼저 조국의 독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업적

이봉창 열사의 의거가 실패하자 아쉽다고 생각한 나머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느며 상하이에 머물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지고 있던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제의 중국침략에 일격을 가하고, 한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방책으로 홍코우공원 의거를 결행하였다. 이 의거는 한국의 독립• 자유를 위한 항일투쟁으로서 김구와 윤봉길에 의해 기획 단계부터 한중 공동항전이란 대의를 가지고 시작되었고, 중국측의 협조를 얻어 실행되었다. 의거준비단계에서 중국인이 한인애국단에 거사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의거의 기획. 준비, 실행, 사후 처리 등 전 과정이 김구와 윤봉길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윤봉길은 물통폭탄과 도시락폭탄을 들고 훙커우 공원에서의 상하이 사변의 승전을 기념하는 식장에 참석,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이하 대다수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윤봉길의거는 그동안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활성화 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의거로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을 다시 인식하여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재개하였다. 그뿐 아니라, 난징정부와 각 민간단체의 재정 지원과 편의 제공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임시정부는 새로운 부흥 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위상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이 투척한 폭탄은 '민족의식의 초월'이자,'동합연합전선'을 드러내며 '동방 약소민족의 상호 동정과 조력'의 표현이었다.

국제적

국제적으로도 윤봉길의거는 한국인의 항일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사변을 열강이 주시하는 가운데 외국인 공동조계 내의 홍코우공원에서 열린 전승기념행사에 한인청년의 의거로 일본침략군 수뇌들이 지명상을 입었다. 이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세상에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윤봉길의거 이후 소원해진 한중관계가 곧바로 회복되고 김구와 장제스 사이에 공동항전의 실질적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장제스

우리 군사 백만 명이 못해낸 일을 한 명의 조선인이 이루어냈다.
— 장제스

라며 그의 의거를 극찬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