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이봉창은 1900년 8월 10일 출생,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청년 이봉창은 당시 일본을 무척 좋아해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한국계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식민지 사회에서 차별( 용산역에서 근무할 당시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느린 승진 속도와 봉급 차이 등)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결국 박탈감을 느껴 철도국 사직)

일본의 천왕을 보고 싶어 갔던 즉위식 행사에서도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있었다.


경시청 의거(1932년 1월 8일)때 쇼와 천황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일제 헌병들이 죄없는 일본 청년에게 죄를 묻는 것을 보고 자백하였다. 후에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같은 해 9월 30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대역죄로 교수형이 집행 되었다


(이봉창 의거의 영향) 이봉창 의거는 다양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먼저 인간주의적 번뇌와 의지적 결단이 어떤 것인가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탄생을 구체화시키고 김구의 의열 투쟁 구상이 이봉창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였다 이정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는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이어져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와 국제적 지원 싸지 얻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국민적 기반을 회복했다는 말이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 中 의거 전 마지막 사진을 찍을때 김구에게 이봉창이 했던 말-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