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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8일 (월) 21:06 판

패트릭 도슨.jpg

Patrick Dawson. 한국식 이름은 전솜(全솜). 아일랜드가톨릭 신부.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1905년 8월 18일 아일랜드 더니골 주 레터케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성공회 신자였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1924년 아일랜드 시민권을 취득하고 1929년 로마 가톨릭 사제서품을 받았다. 1933년 조선을 첫 내방하여 제주 천주교회 사제로 사목했으며, 1935년 2월 20일에 전도표(全道彪)라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평소 '일본중일전쟁에서 승리하면 동양에서 가톨릭 포교는 불가능할 것이며, 일본이 패배하면 한국은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양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도슨은 1939년 가을부터 1941년 9월 사이에 여러 차례 신자들에게 또는 신자들의 질문에 답하여 당시 신문과 라디오 방송의 중일전쟁 관련 허위보도를 비판하였으며, "일본군은 물자가 부족하여 장기전에서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등 일본의 패배를 예언하여 신자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 1939년 4월경 목포천주교회에서 열린 전라남도 천주교 선교사 집회에서 “일본 신문에 의하면 일본군은 창사(長沙)까지 진격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상하이(上海)의 라디오에서는 창사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전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신문 보도는 허위이다”라고 중일전쟁 관련 허위보도를 비판하였다. 10월경 제주읍에 사는 청년 신자인 허봉학에게 “이번 중국사변에서 일본도 많은 군대를 상실하여 특별지원병이라는 명목하에 한국인을 군인으로 보충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1941년 8월경 자신의 집에 놀러온 초등학생에게 “우리 천주님은 천황보다 위대하다. 진무 천황은 처를 두 사람이나 두고 있었다”며 천황을 비꼬았다. 9월 14일경 허봉학이 자신의 집 벽에 걸어둔 이른바 ‘일본 황실 사진’을 설명하자 그에게 “너도 쇼와 천황이 되려는가?” 하고 야유하였다. 이 일로 그는 재판을 받을 때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2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일본 육군형법 및 일본 해군형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8.15 광복이 도래하면서 석방되었다.

도슨은 광복 후 1946년 5월에서 1959년 1월까지 한국독립당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으로서 일했고, 이후로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48년 2월 29일에는 미군정청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해군 출신자들의 순 한글 이름을 허용하자 한국어 이름을 전도표에서 전솜(全솜)으로 개명했다. 1959년 5월 20일 한국을 떠나 스페인, 영국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사목하다가 1962년 6월 15일 아일랜드에 귀국했고, 1989년 2월 9일 더블린에서 선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패트릭 도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