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SV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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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팀 정보
{{분데스리가 구단정보
|이름    = 함부르크 SV
|정식명칭= 함부르크 SV
|원어이름 = Hamburger SV
|로마자명칭=Hamburger SV
|로고    = [[파일:Hamburger SV logo.svg]]
|엠블럼=HSV-Logo.png
|종목    = [[축구]]
|엠블럼크기=200px
|리그    = [[2. 분데스리가]]
|클럽명=Hamburger Sport-Verein e.V. <small>(법인)</small>
|지역연맹 =
Hamburger Sport-Verein Fußball AG <small>(축구 분과)</small>
|설립일  = 1887년 9월 29일
|소속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해산일  =
|연고지=독일 [[함부르크]]
|연고지   = [[독일]] [[함부르크]]
|창단일={{날짜/출력|1887-9-29}}
|경기장  =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홈구장=[[폴크스파크 슈타디온]] (Volksparkstadion)
|소유    =  
|운영이사회장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ref>독일의 기업들은 대개 경영을 책임지는 운영이사회(Vorstand)와 이를 감독하는 감독이사회(Aufsichtsrat)의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ref>
|회장    = [[마르셀 얀젠]]
|감독이사회장=옌스 마이어 (Jens Meier) <small>(법인)</small><ref>HSV 법인 전체의 대빵이라고 볼 수 있다.</ref>
|감독     = [[팀 발터]]
칼 게르난트 (Karl Gernandt) <small>(축구 분과)</small>
|웹사이트 = {{URL|https://www.hsv.de}}
|단장=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비고    =
|감독=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상징색=파란색, 흰색, 검정색
|홈페이지=http://www.hsv.de
}}
}}


'''함부르거 슈포어트-페어아인'''(Hamburger Sport‑Verein e. V.), 즉 '''함부르크 SV'''는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축구팀이다. 한국에서는 함부르크, 함북, 햄버거 등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Hamburger SV를 줄여서 '''HSV'''라고 부른다.<ref>독일어로는 '하-에스-파우'라고 읽는다.</ref> 그 밖에 붉은 바지를 의미하는 '롯호젠(Rothosen)', 공룡을 뜻하는 '디노(Dino)' 등 다양한 별칭으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HSV로 통일하기로 한다.
== 개요 ==
'''함부르거 슈포어트-페어아인''', 즉 '''함부르크 SV'''는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축구팀이다. 한국에서는 함부르크, 함북, 햄버거 등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에서는 주로 Hamburger SV를 줄여서 '''HSV'''라고 부른다.<ref>독일어로는 '하-에스-파우'라고 읽는다.</ref> 그 밖에 붉은 바지를 의미하는 '롯호젠(Rothosen)', 공룡을 뜻하는 '디노(Dino)' 등 다양한 별칭으로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HSV로 통일하기로 한다.


HSV는 원래 축구를 포함하여 총 33개의 분과로 구성된 종합 스포츠 법인으로서 독일 내에서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스포츠 클럽이다. 물론 핸드볼, 아이스하키,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이 소속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HSV라고 하면 남자 축구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HSV는 원래 축구를 포함하여 총 33개의 분과로 구성된 종합 스포츠 법인으로서 독일 내에서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스포츠 클럽이다. 물론 핸드볼, 아이스하키, 배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이 소속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HSV라고 하면 남자 축구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프로 데뷔한 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2010년 이후 팀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탓에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전성기에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전력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문이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이제껏 단 한 번도 2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서 막대한 자부심을 지닌 구단이다. <ref>바이언 뮌헨은 지역별 안배 원칙에 따라 같은 연고지의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창설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두 시즌이 지나서 비로소 승격에 성공하였다.</ref>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프로 데뷔한 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2010년 이후 팀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탓에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전성기에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전력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문이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이제껏 단 한 번도 2부 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클럽으로서 막대한 자부심을 지닌 구단이다. <ref>바이언 뮌헨은 지역별 안배 원칙에 따라 같은 연고지의 1860 뮌헨에 밀려 분데스리가 창설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두 시즌이 지나서 비로소 승격에 성공하였다.</ref>


== 역사<ref>역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사이트들을 참고했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http://www.hsv.de/verein/geschichte</ref> ==
== 역사<ref>역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의 사이트들을 참고했다. http://de.wikipedia.org/wiki/Hamburger_SV http://www.hsv1887.de http://www.hsv.de/verein/geschichte</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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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 ===
===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 ===


HSV의 전성기는 1973년, 페터 크론(Peter Krohn) 당시 신임 회장의 개혁과 함께 시작한다.<ref> 페터 크론은 1922-23 시즌 독일 챔피언십 우승 멤버였던 한스 크론(Hans Krohn)의 아들이었다.</ref><ref>회장(Präsident)은 오늘날의 운영이사회장(Vorstandsvorsitzender)에 해당한다. '회장'이라는 명칭은 1953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ref> 크론은 음료 회사인 캄파리(Campari)를 팀 최초의 유니폼 스폰서로 유치하였고, 더 많은 관중 유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팀 매출을 전년도 290만 마르크에서 570만 마르크로 끌어올렸는데, 이러한 개혁은 이후 HSV가 이적 시장에서 계속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1974년에 팀은 호어스트 베르틀(Horst Bertl)과 빌리 라이만(Willi Reimann)을 영입하였는데, 당시 크론 회장은 베르틀의 영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팬들이 선수를 산다"(Fans kaufen Spieler)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티켓 값에 소액의 기부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s>어디서 더러운 상술을...</s>  
HSV의 전성기는 1973년, 페터 크론(Peter Krohn) 당시 신임 회장의 개혁과 함께 시작한다.<ref> 페터 크론은 1922-23 시즌 독일 챔피언십 우승 멤버였던 한스 크론(Hans Krohn)의 아들이었다.</ref><ref>회장(Präsident)은 오늘날의 운영이사회장(Vorstandsvorsitzender)에 해당한다. '회장'이라는 명칭은 1953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ref> 크론은 음료 회사인 캄파리(Campari)를 팀 최초의 유니폼 스폰서로 유치하였고, 더 많은 관중 유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팀 매출을 전년도 290만 마르크에서 570만 마르크로 끌어올렸는데, 이러한 개혁은 이후 HSV가 이적 시장에서 계속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1974년에 팀은 호어스트 베르틀(Horst Bertl)과 빌리 라이만(Willi Reimann)을 영입하였는데, 당시 크론 회장은 베르틀의 영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팬들이 선수를 산다"(Fans kaufen Spieler)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티켓 값에 소액의 <s>사기</s> 기부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1975년, 회장직은 크론에게서 파울 벤티엔(Paul Benthien)으로 넘어갔으나, 1973년부터 감독직을 맡은 쿠노 클뢰처(Kuno Klötzer)는 계속해서 팀을 이끌며 탄탄히 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특히 1975-76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과의 DFB-포칼 4강 경기는 아직까지도 역사적인 명경기로 남아 있다. 당시 연장전에서 HSV는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게 실점을 기록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종료를 불과 5분 남기고 페터 노글리가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홈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뮌헨에서 열린 재경기 또한 극장이었다. 0:0이 지속되던 82분에 바이언은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냈으나 루디 카르구스 골키퍼가 [[게르트 뮐러]](Gerd Müller)의 슛을 막아냈고, 반대로 후반 추가시간에 쿠어트 아이글(Kurt Eigl)이 결승골을 터뜨리며 HSV는 1:0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어진 결승전에서 HSV는 [[1. FC 카이저슬라우턴]](1. FC Kaiserslautern)을 2:0으로 꺾고 DFB-포칼 우승을 차지했고, [[펠릭스 마가트]](Felix Magath)가 영입된 이듬해에는 벨기에의 [[RSC 안드레흐트]]를 꺾고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리며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75년, 회장직은 크론에게서 파울 벤티엔(Paul Benthien)으로 넘어갔으나, 1973년부터 감독직을 맡은 쿠노 클뢰처(Kuno Klötzer)는 계속해서 팀을 이끌며 탄탄히 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특히 1975-76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과의 DFB-포칼 4강 경기는 아직까지도 역사적인 명경기로 남아 있다. 당시 연장전에서 HSV는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게 실점을 기록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종료를 불과 5분 남기고 페터 노글리가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홈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뮌헨에서 열린 재경기 또한 극장이었다. 0:0이 지속되던 82분에 바이언은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냈으나 루디 카르구스 골키퍼가 [[게르트 뮐러]](Gerd Müller)의 슛을 막아냈고, 반대로 후반 추가시간에 쿠어트 아이글(Kurt Eigl)이 결승골을 터뜨리며 HSV는 1:0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어진 결승전에서 HSV는 [[1. FC 카이저슬라우턴]](1. FC Kaiserslautern)을 2:0으로 꺾고 DFB-포칼 우승을 차지했고, [[펠릭스 마가트]](Felix Magath)가 영입된 이듬해에는 벨기에의 [[RSC 안드레흐트]]를 꺾고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리며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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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귄터 네처 단장에 이어 1987년에 볼프강 클라인 회장과 에른스트 하펠 감독마저 떠나면서 HSV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7명의 회장과 8명의 감독들이 팀을 거쳐갔다. 안정감이 부족하기는 선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활을 위해 팀은 계속해서 이적시장을 두드렸지만, 그 결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가령 1987년에는 골키퍼 믈라덴 프랄리야(Mladen Pralija)를 영입했으나 불과 1년만에 다시 팀을 떠났고, 1988년에는 11명의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얀 푸르톡(Jan Furtok) 정도만이 성공적인 영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구단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성적 또한 당연히 바닥을 쳤다. 1986-87 시즌에 팀은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곧바로 6위로 추락했고, 이듬해 잠시 4위로 반등하기도 했지만 1989-90 시즌에는 11위로 추락했다. 1990-91 시즌에는 신입생 [[토마스 돌]](Thomas Doll)과 프랑크 로데(Frank Rohde)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5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때를 제외하면 1989-90 시즌부터 6년 동안 팀은 매년 10위권 바깥을 맴돌았다.<ref>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토마스 돌은 한 시즌만인 1991년 여름에 AS 로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돌은 역대 레코드인 1,700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남겼는데, 이 거금은 팀이 경제적으로 회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마찬가지로도 대외적으로도 1989-90 시즌 UEFA 컵 8강이 이 기간 동안에 그나마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1986년 귄터 네처 단장에 이어 1987년에 볼프강 클라인 회장과 에른스트 하펠 감독마저 떠나면서 HSV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7명의 회장과 8명의 감독들이 팀을 거쳐갔다. 안정감이 부족하기는 선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활을 위해 팀은 계속해서 이적시장을 두드렸지만, 그 결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가령 1987년에는 골키퍼 믈라덴 프랄리야(Mladen Pralija)를 영입했으나 불과 1년만에 다시 팀을 떠났고, 1988년에는 11명의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얀 푸르톡(Jan Furtok) 정도만이 성공적인 영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구단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성적 또한 당연히 바닥을 쳤다. 1986-87 시즌에 팀은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곧바로 6위로 추락했고, 이듬해 잠시 4위로 반등하기도 했지만 1989-90 시즌에는 11위로 추락했다. 1990-91 시즌에는 신입생 [[토마스 돌]](Thomas Doll)과 프랑크 로데(Frank Rohde)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5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때를 제외하면 1989-90 시즌부터 6년 동안 팀은 매년 10위권 바깥을 맴돌았다.<ref>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토마스 돌은 한 시즌만인 1991년 여름에 AS 로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돌은 역대 레코드인 1,700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남겼는데, 이 거금은 팀이 경제적으로 회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마찬가지로도 대외적으로도 1989-90 시즌 UEFA 컵 8강이 이 기간 동안에 그나마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신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레전드 [[우베 젤러]]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팀은 채무를 청산하고 5백만 마르크의 예비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10월 베노 묄만(Benno Möhlmann)의 후임으로 취임한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팀을 리그 5위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수년 만에 UEFA 컵 출전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HSV가 긍정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어진 1996-97 시즌에 마가트는 UEFA 컵 8강과 DFB-포칼 4강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절치부심한 HSV는 1997년 여름, 프랑크 파겔스도르프(Frank Pagelsdorf)를 새로 감독으로 선임하고 이적 시장에서 7백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 21라운드까지 팀은 5승 5무 11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한때 리그 꼴찌까지 추락했다가 막판 뒷심으로 간신히 9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1999-2000 시즌에 13년 만의 최고 성적인 리그 3위를 기록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그때를 제외하면 파겔스도르프와 함께한 4년 동안 팀은 전반적으로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쿠어트 야라(Kurt Jara) 역시 별다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변화의 조짐은 1995년에 비로소 나타났다. 레전드 [[우베 젤러]]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팀은 비로소 채무를 청산했으며, 심지어 5백만 마르크의 예비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베노 묄만(Benno Möhlmann)이 경질되고 [[펠릭스 마가트]]가 새로 감독직을 맡았는데, 마가트는 팀을 분데스리가 5위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이로써 HSV는 수년 만에 UEFA 컵에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가트는 다음 시즌, UEFA 컵 8강과 DFB-포칼 4강에도 불구하고 정작 리그에서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시즌 종료 직전에 경질되었고, 팀은 다시 13위로 추락하였다. 이에 절치부심한 HSV는 그해 여름, 프랑크 파겔스도르프(Frank Pagelsdorf)를 새로 감독으로 선임하고 [[한스-외르그 부트]](Hans-Jörg Butt), 로돌포 카르도소(Rodolfo Cardoso),<ref>카르도소는 새로 영입한 게 아니라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임대 중이던 것을 완전이적시킨 것이었다.</ref> 앤서니 예보아(Anthony Yeboah), 잉고 헤어취(Ingo Hertzsch), 토마스 그라베센(Thomas Gravesen) 등을 영입하였다. 비록 이러한 야심찬 기대에도 불구하고 21라운드까지 팀은 5승 5무 11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며 한때 리그 꼴찌로 추락하기도 하였으나, 남은 13경기에서 6승 6무 1패를 거두며 1997-98 시즌을 9위로 마무리하였고, 이어진 1998-99 시즌에는 7위, 그리고 1999-2000 시즌에는 13년만에 최고 성적인 리그 3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챔스와 리그를 병행하면서 팀은 이듬해 13위로 추락했고, 그 다음 시즌까지도 부진이 이어지면서 결국 프랑크 파겔스도르프 감독은 4년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후 팀은 <s>하펠을 추억하며</s> 같은 오스트리아 국적의 쿠어트 야라(Kurt Jara)에게 남은 시즌을 맡겼고, 2001-02 시즌에 팀은 리그 11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파일:Hoffmann und Beiersdorfer.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좌)와 베른트 호프만(우)]]
[[파일:Hoffmann und Beiersdorfer.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좌)와 베른트 호프만(우)]]
HSV의 중흥은 2002-03 시즌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즌에 팀은 분데스리가를 4위라는 호성적으로 마무리지었으며, 이어진 DFB-리가포칼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4:2로 꺾고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때 있었던 운영진의 변화였는데, 2002년 8월, 1986-87 DFB-포칼 우승 멤버였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Dietmar Beiersdorfer)가 단장으로 팀에 돌아왔으며, 2003년 2월에는 베른트 호프만(Bernd Hoffmann)이 새로 운영이사회장에 선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이 함께 일했던 2009년까지를 HSV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먼저 호프만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HSV의 재정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바이어스도르퍼는 그 돈으로 다수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이 다시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HSV의 중흥은 2002-03 시즌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즌에 팀은 분데스리가를 4위라는 호성적으로 마무리지었으며, 이어진 DFB-리가포칼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4:2로 꺾고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때 있었던 운영진의 변화였는데, 2002년 8월, 1986-87 DFB-포칼 우승 멤버였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Dietmar Beiersdorfer)가 단장으로 팀에 돌아왔으며, 2003년 2월에는 베른트 호프만(Bernd Hoffmann)이 새로 운영이사회장에 선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이 함께 일했던 2009년까지를 HSV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먼저 호프만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HSV의 재정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바이어스도르퍼는 그 돈으로 다수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이 다시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 토프묄러(Klaus Toppmöller) 감독이 팀을 이끈 2003-04 시즌에 이어 토마스 돌(Thomas Doll)이 지휘봉을 잡은 2004-05 시즌에도 HSV는 8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에 그쳤다. 당시 수비 쪽에서는 새로 영입된 [[다니엘 반 바이텐]](Daniel van Buyten)과 [[칼리트 불라루즈]](Khalid Boulahrouz)가 눈부신 활약을 펼쳐주었으나, 반대로 공격 쪽에서는 야심차게 데려온 벤야민 라우트(Benjamin Lauth)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면서 아쉬움을 남겼다.<ref>그해 DFB-포칼에서는 문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1라운드에서 HSV는 북부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Nord) 소속의 [[SC 파더보른 07]](SC Paderborn 07)에 4:2로 충격패를 당했는데, 당시 심판이었던 로베르트 호이처(Robert Hoyzer)는 음펜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퇴장을 명령하고 파더보른에 두 차례 페널티킥을 주는 등 노골적으로 HSV에 불리한 편파 판정을 내렸다. 수사 결과 이 경기를 포함하여 DFB-포칼 및 하부 리그 일부 경기에서 크로아티아 마피아가 개입한 승부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이는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독일 축구계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한편, 독일 축구협회는 이후 사과의 의미로 HSV에 50만 유로의 보상금을 주었고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국가대표 경기를 치러주기로 약속하였다.</ref> <s>함께 영입된 에밀 음펜자(Emile Mpenza)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s>
그러나 일단은 클라우스 토프묄러(Klaus Toppmöller) 감독이 팀을 이끈 2003-04 시즌에 이어 [[토마스 돌]](Thomas Doll)이 지휘봉을 잡은 2004-05 시즌에도 HSV는 8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에 그쳤다. 당시 수비 쪽에서는 새로 영입된 [[다니엘 반 바이텐]](Daniel van Buyten)과 [[칼리트 불라루즈]](Khalid Boulahrouz)가 눈부신 활약을 펼쳐주었으나, 반대로 공격 쪽에서는 야심차게 데려온 벤야민 라우트(Benjamin Lauth)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s>함께 영입된 에밀 음펜자(Emile Mpenza)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s>. 한편 그해 DFB-포칼에서는 문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1라운드에서 HSV는 북부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Nord) 소속의 [[SC 파더보른 07]](SC Paderborn 07)에 4:2로 충격패를 당했는데, 당시 심판이었던 로베르트 호이처(Robert Hoyzer)는 음펜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퇴장을 명령하고 파더보른에 두 번의 페널티킥을 주는 등 노골적으로 HSV에 불리한 편파 판정을 내렸다. 결국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 마피아까지 개입한 승부조작의 결과였던 것으로 밝혀져 독일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독일 축구협회는 사과의 뜻에서 HSV에 50만 유로의 보상금을 주는 한편,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국가대표 경기를 치러주겠다고 약속하였다.<ref>호이처 주심의 자백에 의해 당시 베팅 마피아의 실체가 폭로되었는데, 더욱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조사 결과 이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DFB-포칼과 하부 리그 경기에서도 여러 차례 승부 조작이 자행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2006년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독일 축구계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ref>


그러나 이어진 2005년 여름, HSV는 [[AFC 아약스]]의 영스타 [[라파엘 반 더 바르트]](Rafael van der Vaart)<s>흥부자</s> 티모시 아투바(Thimothée Atouba), 그리고 만능 수비 자원 기 데멜(Guy Demel) 등을 영입하며 탄탄한 전력 보강을 이루었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UEFA 인터토토 컵 우승자 자격으로 [[UEFA 컵]]에 진출한 HSV는 오랜만에 8강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고, 분데스리가에서는 6년 만의 최고 성적인 3위에 올랐다. 특히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중심이 되고 라이트백으로 변신한 [[메흐디 마다비키아]](Mehdi Mahdavikia)와 왼쪽의 [[티모시 아투바|아투바]]가 버티는 포백 라인은 리그 최소 실점인 30골만 허용하며 최고의 짠물 수비를 보여주었다.
<s>희대의 실패작 음펜자가 한 시즌만에 중동으로 떠난</s> 2005년 여름, HSV는 [[AFC 아약스]]에서 [[라파엘 반 더 바르트]](Rafael van der Vaart)을 야심차게 데려왔으며, 거기에 <s>아프리칸 댄서</s> [[티모시 아투바]](Thimothée Atouba)만능 수비 자원 [[기 데멜]](Guy Demel)까지 영입하며 탄탄한 전력 보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UEFA 인터토토 컵 우승자 자격으로 [[UEFA 컵]]에 진출한 HSV는 오랜만에 8강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고, 분데스리가에서는 6년 만의 최고 성적인 3위에 올랐다. 특히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중심이 되고 라이트백으로 변신한 [[메흐디 마다비키아]](Mehdi Mahdavikia)와 왼쪽의 [[티모시 아투바|아투바]]가 버티는 포백 라인은 리그 최소 실점인 30골만 허용하며 최고의 짠물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 뒤에는 위기가 따라오는 법이다. 시즌이 끝나자 수비의 버팀목이었던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나란히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 [[첼시 FC]]로 이적했고, 공격진을 먹여 살리던 노장 [[세르게이 바르바레스]](Sergej Barbarez) 또한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났다. 물론 거액의 이적료를 챙긴 팀은 곧바로 당대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손뽑히던 [[뱅상 콤파니]](Vincent Kompany)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후안 파블로 소린]](Juan Pablo Sorin)을 비롯하여 공수에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였으나, [[요리스 마타이센]](Joris Mathijsen)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팀은 챔스 광탈과 더불어 리그에서도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감독 교체였다. 19라운드를 끝으로 [[토마스 돌]] 감독은 경질되었고, 네덜란드 출신의 [[휩 스테벤스]](Huub Stevens)가 선임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적적인 반전이 시작되었다. 단 1승 12무 6패로 꼴찌던 달리던 HSV는 15경기에서 9승을 챙기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7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고, 반전의 주역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는 강팀들의 위시 리스트에 올랐다. <s>그리고 그의 징징거림 또한 본격화되기에 이르는데...</s>
<s>그러나 언제나 호성적 뒤에는 선수 유출이 뒤따르는 법이다.</s> 시즌이 끝나자 2006년 여름, 수비의 버팀목이던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나란히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 [[첼시 FC]]로 이적했으며, 공격진을 먹여 살리던 노장 [[세르게이 바르바레스]](Sergej Barbarez) 또한 계약이 만료되어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떠났다. 물론 영입된 선수들도 많았다. 두 센터백을 보내면서 2천만 유로가 넘는 돈을 장전하게 된 HSV는 클럽 레코드를 경신하며 당대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뽑히던 [[뱅상 콤파니]](Vincent Kompany)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그 밖에도 [[요리스 마타이센]](Joris Mathijsen), [[부바카르 사노고]](Boubacar Sanogo), [[후안 파블로 소린]](Juan Pablo Sorin) 등을 데려옴으로써 공수에서의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작 야심차게 데려온 콤파니와 소린은 부상에 신음하며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바르바레스의 공백을 메워주리라 기대했던 사노고조차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면서 챔스 광탈은 물론이고 리그에서도 팀 성적은 강등권으로 떨어졌다.
 
[[파일:Huub Stevens.jpg|300픽셀|섬네일|왼쪽|HSV를 위기에서 구해낸 명장, 휩 스테벤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던 보드진은 결국 겨울에 다시 지갑을 열어 [[이비차 올리치]](Ivica Olić)를 데려오는 한편, [[슈테판 배흐터]](Stefean Wächter)와 [[자샤 키어쉬슈타인]](Sascha Kirschstein) 중 차마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던 골문을 안정시키기 위해 [[FC 샬케 04]]에서 벤치 신세로 전락한 [[프랑크 로스트]](Frank Rost)를 영입했다.<ref>로스트를 벤치로 밀어내고 샬케의 주전 골리 자리를 꿰찼던 선수가 바로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던 [[마누엘 노이어]]였다.</ref> 나아가 겨울 휴식기가 끝난 후에도 지지부진한 경기력이 계속되자 구단은 19라운드가 끝난 다음날, 바로 [[토마스 돌]] 감독을 경질하고 곧이어 [[휩 스테벤스]](Huub Stevens)를 선임하게 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기적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단 1승 12무 6패로 꼴찌를 달리던 팀이 15경기에서 9승을 챙기는 가파른 상승세를 탄 끝에 7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로써 [[UEFA 인터토토 컵]]에 진출하게 된 팀은 대외컵 진출까지 노리게 되었으며, 특히 상승세를 이끈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는 강팀들의 위시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s>그리고 그의 징징거림 또한 본격화되기에 이르는데...</s>


[[파일:VdV.jpg|300픽셀|섬네일|왼쪽|이랬던 반 더 바르트는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어진 2007-08 시즌에도 스테벤스 감독의 지도력은 빛을 발했다.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가 여전히 폭발적인 활약을 이어가는 가운데, 4-4-2에서 4-2-3-1로 포메이션을 바꾼 이후 [[다비트 야롤림]](David Jarolim)과 [[나이젤 데 용]](Nigel de Jong)이 3선에서 [[안드레아 피를로|피를로]]-[[젠나로 가투소|가투소]]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였고 팀은 한때 리그 2위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ref>국내 팬들 사이에서 야롤림과 데 용은 야를로와 데축소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ref> 그러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팀은 4위로 밀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만료된 [[휩 스테벤스|스테벤스]] 감독은 [[크론병]]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고자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어진 2007-08 시즌에도 스테벤스 감독의 지도력은 빛을 발했다.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가 여전히 폭발적인 활약을 이어가는 가운데, 4-4-2에서 4-2-3-1로 포메이션을 바꾼 이후 [[다비트 야롤림]](David Jarolim)과 [[나이젤 데 용]](Nigel de Jong)이 3선에서 [[안드레아 피를로|피를로]]-[[젠나로 가투소|가투소]]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였고 팀은 한때 리그 2위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ref>국내 팬들 사이에서 야롤림과 데 용은 야를로와 데축소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ref> 그러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팀은 4위로 밀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만료된 [[휩 스테벤스|스테벤스]] 감독은 [[크론병]]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고자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말았다.


스테벤스 감독이 떠나고, <s>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CF|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s> 주장 반 더 바르트마저도 <s>발렌시아가 아닌</s>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스테벤스의 후임으로 취임한 [[마틴 욜]](Martin Jol)은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기존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팀은 리그와 [[UEFA 컵]], 그리고 [[DFB-포칼]]까지 세 개 대회에서 모두 쾌조의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s>, 신입생 중 [[치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s>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UEFA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파일:VdV.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이랬던 반 더 바르트는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2008-09 시즌을 앞두고 팀은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먼저 스테벤스가 떠난 빈 자리는 또 다른 네덜란드 감독 [[마틴 욜]](Martin Jol)이 채우게 되었으며, <s>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CF|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s> 주장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는 구단 레코드인 1,500만 유로의 이적료만을 남긴 채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고, 만년 유망주 [[뱅상 콤파니|콤파니]] 역시 신흥 거상으로 떠오르던 [[맨체스터 시티]]로 떠났다.<ref>반 더 바르트의 레코드는 불과 반 시즌만에 거상 맨체스터 시티가 데 용을 1,800만 유로에 데려가면서 경신되었다.</ref> 대신에 구단은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에서 [[마르첼 얀젠]](Marcell Jansen),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에서 [[믈라덴 페트리치]](Mladen Petrić)를 데려오는 등 착실한 선수 보강을 이루며 시즌을 준비하였다. <s>다만,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티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s>


=== HSV의 몰락과 <i>HSVPlus</i> (2009-2014) ===
시즌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팬들은 스테벤스 감독과 반 더 바르트의 공백을 우려했지만, HSV는 흔들리지 않았다. 기존의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구단은 오히려 지난 시즌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며 [[VfL 볼프스부르크|볼프스부르크]],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등과 함께 우승 경쟁을 벌였고, 나아가 [[UEFA 컵]]과 [[DFB-포칼]]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나가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결국 UEFA 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하였다.


HSV의 몰락은 지도부의 내분과 함께 시작하였다.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의 독단적인 구단 운영에 불만을 품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단장과 [[마틴 욜]] 감독이 나란히 팀을 떠난 것이다. 결국  단장 자리는 한 시즌 내내 공석으로 남았고, 감독으로는 [[브루노 라바디아]](Bruno Labbadia)가 선임되었으나, 라바디아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젊은 감독에 불과했으며, 특히 바로 전 시즌에도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에서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경질된 바 있었다.
=== HSV의 몰락과 <i>HSVPlus</i> (2009-현재)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10 시즌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공격의 핵인 [[이비차 올리치]](Ivica Olić)[[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으로 이적하기는 했으나, 여름 동안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한 HSV의 선수층은 여전히 화려했고, <s>그러나 마커스 베리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s> 7라운드까지 팀은 무패로 리그 선두를 질주했다. 그러나 전반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헤어날 수 없는 부진이 시작되었고, 결국 HSV는 시즌을 7위로 마감하며 6년 만에 대외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결승전이 홈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만큼 많은 팬들의 기대를 끌어모았으나, 4강에서 [[풀럼 FC]](Fulham FC)에 패하며 탈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스러운 행보 속에서 당연하게도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는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HSV의 몰락은 지도부의 내분과 함께 시작하였다.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의 독단적인 구단 운영에 불만을 품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단장과 [[마틴 욜]] 감독이 나란히 팀을 떠난 것이다. 특히 [[마르코 마린]](Marko Marin) 영입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욜 감독과 바이어스도르퍼 단장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묀헨글라트바흐]]에서 마린을 데려오는 데 적극적이었고, 협상은 성사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이 개입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원칙적으로 선수 영입과 방출이 단장의 권한임을 고려할 때, 이는 명백한 월권 행위였던 것이다. 더욱이 팀은 이 두 사람의 공백을 메우는 데 소극적이었다. 단장 자리는 한 시즌 내내 공석으로 남았고, 감독으로는 [[브루노 라바디아]](Bruno Labbadia)가 선임되었으나, 전임자였던 [[휩 스테벤스|스테벤스]]나 [[마틴 욜|욜]]과 비교할 때 라바디아는 당시까지 검증되지 않은 젊은 감독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바로 전 시즌에 그는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의 감독으로서 1부 리그에 데뷔하였으나,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9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바 있었다.


이처럼 실망스런 한 해를 보낸 HSV에서는 이사진에서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독단적 판단과 투명성 부족한 경영으로 팀의 위기를 초래한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은 거센 내부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석이던 단장 자리에는 [[바스티안 라인하르트]](Bastian Reinhard)가 새로 부임했으며, 감독으로는 2006-07 시즌 [[VfB 슈투트가르트]]의 우승을 견인했던 [[아어민 페]](Armin Veh)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이제 막 선수 생활을 마친 초짜였으며, 페 역시 최근 두 시즌 동안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와 [[VfL 볼프스부르크|볼프스부르크]]에서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한편, 선수단에서는 [[티모시 아투바]]와 [[이비차 올리치]]의 이탈이 있기는 했으나, 어차피 아투바는 2008-09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던 선수였고, 올리치의 이적은 이미 일찌감치 결정된 사안이었던 만큼 팀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에 대비할 수 있었다. 반면 선수 영입과 관련하여 HSV는 무려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하였는데, <s>2009년 [[UEFA U-21 유러피언 챔피언십]] 득점왕에 빛나는 [[마커스 베리]](Marcus Berg),</s> [[엘리에로 엘리아]](Eljero Elia), [[다비트 로제날]](David Rozehnal), [[제 호베르투]](Zé Roberto) 등이 그 대상이었다. 많은 걱정과 우려 속에서 시작된 2009-10 시즌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나쁘지 않았다. 팀은 7라운드까지 무패로 리그 선두를 달렸고, 이후에도 한동안 2위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공격진의 줄부상과 수비 불안이 겹치며 전반기가 끝날 무렵부터 HSV는 점차 부진에 빠졌고, 겨울에 [[레알 마드리드]]의 [[뤼트 판 니스텔로이]]를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반등하지 못한 채 7위로 시즌을 마감, 6년만에 대외컵 진출에 실패하게 되었다. 한편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결승전이 홈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만큼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4강에서 [[풀럼 FC]]에 패하며 탈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 이하의 행보 속에서 당연하게도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는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이처럼 실망스런 한 해를 보낸 HSV에서는 이사진에서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독단적 판단과 투명성 부족한 경영으로 팀의 위기를 초래한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은 거센 내부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미 2009-10 시즌 종료 직후에 [[바스티안 라인하르트]](Bastian Reinhard)가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2006-07 시즌 [[VfB 슈투트가르트]]의 우승을 견인했던 [[아어민 페]](Armin Veh)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정작 라인하르트는 이제 막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인물로 단장 경력이 전무했고, 페 역시 최근의 두 시즌 동안은 과거의 지도력을 보이지 못하며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와 [[VfL 볼프스부르크|볼프스부르크]]에서 시즌 중에 해임된 바 있었다.
 
[[파일:Kuehne.jpg|300픽셀|섬네일|왼쪽|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한편, 동시에 이 무렵은 세계적인 운송회사 <i>퀴네+나겔</i>(Kühne + Nagel)의 회장인 억만장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Klaus-Michael Kühne)가 본격적으로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HSV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HSV의 팬이었던 그는 2010년, 총 1,250만 유로의 금액을 HSV에 투자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는 기존의 [[마르첼 얀젠]], [[파올로 게레로]](Paolo Guerrero), [[데니스 아오고]](Dennis Aogo) 등은 물론이고 새로 영입하게 되는 [[하이코 베스터만]](Heiko Westermann), [[데니스 디크마이어]](Dennis Diekmeier)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선수들의 이적 지분 1/3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그저 팀을 돕고 싶을 뿐이지만,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결코 엔터테이너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을 것이다," 라며 자신의 역할에 선을 그었다. <s>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훗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게 되는데...</s>


한편, 동시에 이 무렵은 세계적인 운송회사 <i>퀴네+나겔</i>(Kühne + Nagel)회장인 억만장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Klaus-Michael Kühne)본격적으로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HSV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HSV의 팬이었던 그는 2010년, 총 1,250만 유로의 금액을 투자하여 [[마르첼 얀젠]](Marcell Jansen), [[파올로 게레로]](Paolo Guerrero), [[데니스 아오고]](Dennis Aogo), [[하이코 베스터만]](Heiko Westermann), [[데니스 디크마이어]](Dennis Diekmeier) 등 일부 선수들의 지분 1/3을 사들였다. 비록 당시 퀴네는 자신은 그저 팀을 도우려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훗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게 된다.
이와 함께 선수단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전술한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과 [[데니스 디크마이어|디크마이어]]뿐만 아니라 [[프랑크 로스트|로스트]]은퇴를 대비하여 [[야로슬로프 드로브니]]가, 중원 보강을 위해 [[고이코 카차르]](Gojko Kacar)가 강등된 [[헤르타 BSC]]에서 영입되었고, [[뱅상 콤파니|콤파니]]와 [[나이젤 데 용|데 용]]에 이어 [[제롬 보아텡]](Jérôme Boateng)[[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였다.<ref>원래 HSV는 베스터만이 아니라 유망주 [[베네딕트 회베데스]]를 영입하고자 했으나, 샬케의 극렬한 거부로 인해 대신 베스터만을 영입하였다.</ref> 한편, 이 시기는 U-19 팀에서 활약하던 [[손흥민]]이 처음 1군에 올라와 프로 무대에 데뷔한 시기이기도 했다.


성적 부진은 2010-11 시즌에도 이어졌다.<ref>이 시즌은 U-19 팀에서 활약하던 손흥민이 처음 1군에 올라와 프로 무대에 데뷔한 시즌이기도 하다.</ref> 전술한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과 [[데니스 디크마이어|디크마이어]]에 강등된 [[헤르타 BSC]]의 주축이었던 [[야로슬라프 드로브니]](Jaroslav Drobný)와 [[고이코 카차르]](Gojko Kacar) 등에 이르기까지 착실한 선수 보강을 이루었으나, 정작 성적은 여전히 중위권을 맴돌았고, 특히 수비 쪽에서는 줄부상이 이어지며 중앙 미드필더인 카차르가 센터백으로 출전하는 상황까지도 자주 연출되었다. 결국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하에서 [[아어민 페]]는 2011년 3월 13일,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에 0:6으로 참패한 조기 경질되었고, 수석코치였던 [[미하엘 외닝]](Michael Oenning)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또한 3일 뒤에는 맹렬한 비판에 시달리던 베른트 호프만이 퇴진하고 감독위원회 소속이던 칼-에드가 야르호프(Carl-Edgar Jarchow)가 신임 운영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리하자면, 2010-11 시즌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HSV는 8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또 다시 대외컵 진출에 실패했다. 그해 재정 손실은 거의 5백만 유로에 근접했다.
여하튼 나름대로 변화를 꾀하며 지난 시즌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하였으나,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성적은 중위권을 맴돌았고, 특히 수비 쪽에서는 부상이 이어지면서 중앙 미드필더인 [[고이코 카차르|카차르]]가 센터백으로 출전해야 하는 상황까지도 자주 연출되었다.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2011년 3월 13일, [[아어민 페]]는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에 0:6으로 참패한 이후 조기 경질되었고, 수석코치였던 [[미하엘 외닝]](Michael Oenning)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3일 뒤에는 맹렬한 비판에 시달리던 베른트 호프만이 퇴진하고 감독위원회 소속이었던 칼-에드가 야르호프(Carl-Edgar Jarchow)가 신임 운영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요컨대 2010-11 시즌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HSV는 5백만 유로에 가까운 재정 손실을 기록했다. 그해 HSV는 8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다시 한 번 대외컵 진출은 좌절되었다.


[[파일:Frank Arnes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파일:Frank Arnes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 FC|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다.<ref>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ref>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 FC|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고, 특히 [[요리스 마타이센|마타이센]]의 이적에 대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자 구단은 [[마이클 만시엔|만시엔]]의 능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ref>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ref>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마이클 만시엔|만시엔]]과 [[제프리 브루마|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러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미하엘 외닝|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ref>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두 번 다시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즉,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ref> 결국 2군 감독이던 [[로돌포 카르도소]]가 임시로 감독직을 맡아 7라운드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13연속 무승을 끊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곧 감독 라이센스가 없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결국 9라운드 [[SC 프라이부르크]]와의 경기에서는 아르네센이 임시 감독을 겸임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아르네센은 이 경기 이후 [[FC 바젤]]을 이끌던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를 후임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마이클 만시엔|만시엔]][[제프리 브루마|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미하엘 외닝|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ref>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4년 반 동안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한 채 전설(?)로 남았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ref> 이후 소방수로 선임된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 감독 하에서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했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결국 재정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팀은 2012년 여름에 또 다시 여러 선수들을 내보내야 했다. 베테랑 [[다비트 야롤림]]과 주포 [[믈라덴 페트리치]]가 자유이적으로 팀을 떠났으며, 고액 주급을 받던 [[파올로 게레로]]와 아르네센이 데려온 유망주 중 그나마 가장 나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괴칸 퇴레]]까지도 각각 브라질과 러시아로 이적했다. 한편, 골문 강화를 위해 소속팀에서 벤치 신세로 전락한 [[레네 아들러]](Rene Adler)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으며, 페트리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폴란드 리그에서 뛰던 [[아르티옴스 루드네브스]](Artjoms Rudnevs)가 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012-13 시즌에도 팀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이에 팀 안팎에서 비난이 쏟아졌고, 구단은 다시 한 번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의 투자에 힘입어 HSV는 <s>애증의</s>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에 실패하며 성적이 추락하고, 결국 돈 때문에 선수를 내보내지만 그로 인해 성적이 더 악화되어 결국 더 많은 돈을 들여가며 다시 선수를 사들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었다.


2012-13 시즌에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에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시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였다. 팀은 그의 투자에 힘입어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s>또 너냐...</s>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을 하고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성적이 추락하면서 결국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s>사실 이마저도 골키퍼 [[레네 아들러]](René Adler)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s>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결과적으로 팀은 2012년 여름에 이적 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7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원정에서 2:9의 참패를 당하는 등 경기력은 지극히 형편없었고, 일부 선수들의 항명 사태까지 겹치면서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UEFA 유로파 리그|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s>아들러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이조차도 불가능한 성적이었다.</s>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특히 HSV 캠퍼스(HSV-Campus) 건설을 위해 2012년 9월에 발행했던 1,750만 유로의 채권은 재정난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단순 투자자로 남겠다던 퀴네는 2012년 여름에 이미 독자적으로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 영입을 추진했던 데 이어 2013년에도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이사회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펠릭스 마가트]]와 접촉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구단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가 이끄는 운영이사회는 그런 퀴네의 입김에 끌려다니며 우왕좌왕했고, 신중한 재정 관리와 장기적인 관점을 모토로 내걸었으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아르네센의 후임으로는 [[올리버 크로이처]](Oliver Kreuzer)가 새로운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족한 경력 탓에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단순 투자자로 남겠다던 퀴네는 2012년 여름에 이미 독자적으로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 영입을 추진했던 데 이어 2013년에도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이사회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펠릭스 마가트]]와 접촉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구단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가 이끄는 운영이사회는 그런 퀴네의 입김에 끌려다니며 우왕좌왕했고, 신중한 재정 관리와 장기적인 관점을 모토로 내걸었으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아르네센의 후임으로는 [[올리버 크로이처]](Oliver Kreuzer)가 새로운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족한 경력 탓에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2013-14 시즌은 출반부터 삐걱거렸다. 시즌 5라운드가 종료된 상황에서 구단은 15위까지 떨어졌고,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은 야심차게 데려온 애재자 [[자크 주아]](Jacques Zoua)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퀴네가 염원하던 대로 경질되었으며, 약 일주일 뒤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에 올려놓았던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Bert van Marwijk)가 새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다. 반 마르바이크의 지도 하에 HSV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U-19 팀에서 콜업된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단숨에 주전 센터백으로 발돋움했으며, 신입생 [[피에르-미헬 라조가]](Pierre-Michel Lasogga)와 임대에서 복귀한 [[하칸 찰하놀루]](Hakan Çalhanoğlu)가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파일:Lasogga.jpg|300픽셀|섬네일|왼쪽|2013-14 시즌의 영웅, 피에르-미셸 라조가]]
이적시장에서는 일단 [[손흥민]]이 1천만 유로에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했으며, [[토어스텐 핑크]] 감독과 갈등을 빚었던 [[데니스 아오고]]가 완전이적 옵션과 함께 [[FC 샬케 04|샬케]]로 임대되었다. 또한 <s>역대급 망() 영입</s> [[마커스 베리]]가 마침내 자유계약으로 [[파타니타니코스 AO]]로 사라졌으며, 그밖에 팀은 아르네센의 잔재들을 스쿼드에서 지우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야코포 살라]]를 이탈리아로 보냈을 뿐이었다. 새로 합류한 선수 중에서는 각각 [[아스날 FC]]와 [[헤르타 BSC]]에서 임대된 [[요한 주루]](Johan Djourou)[[피에르-미셸 라조가]](Pierre-Michel Lasogga)가 눈에 띄었고, [[칼스루헤 SC|칼스루헤]]에 임대되었던 [[하칸 찰하놀루]](Hakan Çalhanoğlu)가 복귀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요나탄 타|]]는 전반기 이후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고, [[막시밀리안 바이스터]](Maximilian Beister)[[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ć)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등 스쿼드 전체에 부상이 들끓은 결과 성적은 수직하락했다. 특히 20라운드 [[헤르타 BSC]]와의 홈 경기에서는 0:3의 스코어로 역사적인 6연패를 기록하자 분노한 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주차장에 모인 300여명의 팬들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야르호프 운영이사회장과 크로이처 단장, 그리고 선수들이 직접 나서서 팬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계란과 쓰레기만 날아올 뿐이었다.<ref>빌트(Bild)지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아는 팬이 던진 무엇인가에 맞고 울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벤피카에서 임대되어 온 [[올라 존]](Ola John)은 <s>눈치 없이</s> 차를 타고 유유히 떠나려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ref> 이에 감독이사회는 이튿날 비공개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현 운영이사회와 감독의 신임 여부에 대해 토의를 벌였고, 비록 당장에는 재신임이 결정되었으나, 이어진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의 [[DFB-포칼]] 4강전과 리그 21라운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원정에서 모두 패하자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감독은 마침내 경질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때를 구단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일컬었다.
2013-14 시즌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시즌 5라운드가 종료된 상황에서 구단은 15위까지 떨어졌고,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은 야심차게 데려온 애재자 [[자크 주아]](Jacques Zoua)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s>퀴네가 염원하던 대로</s> 경질되었으며, 약 일주일 뒤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에 올려놓았던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Bert van Marwijk)가 새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다.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반 마르바이크]]의 지도 하에서 HSV에서는 몇 가지의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U-19 레벨에서 콜업된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주전 센터백으로 발돋움했으며, [[피에르-미셸 라조가|라조가]] 역시 기대 이상의 득점력을 과시하며 만년 유망주라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또한 유스 출신의 [[막시밀리안 바이스터]](Maximilian Beister)는 [[손흥민]]의 공백을 잘 메워 주었으며,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와의 포지션 중복 때문에 헤매던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 역시 왼쪽 측면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였다. 8라운드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 전은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당시 HSV는 [[피에르 미셀 라조가|라조가]]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원정에서 5:0의 대승을 거두었다.


반 마르바이크 경질 직후 HSV는 발 빠르게 [[하노버 96]]에서 해임된 [[미르코 슬롬카]](Mirko Slomka)를 그 후임으로 선임하였다. 비록 첫 경기에서 슬롬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지만, 30라운드부터는 선수단의 줄부상 속에 마지막 다섯 경기를 모두 패하며 27점으로 16위를 기록했고, 팀은 가까스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ref>29라운드가 끝난 상황에서 강등권인 17위 뉘른베르크는 26점, 브라운슈바이크는 25점으로 승점 차이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으나, 남은 다섯 경기를 세 팀이 나란히 모두 전패로 기록하면서 극적으로 HSV는 16위를 유지하였다.</ref> 다행히 여기에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에 힘입어 팀은 원정 팀 다득점 원칙에 따라 [[SpVgg 그로이터 퓌어트]](SpVgg Greuther Fürth)를 꺾고 분데스리가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그 시즌 HSV의 승점이었던 27점은 승리팀이 승점 3점을 차지하는 규정이 도입된 이래 분데스리가에서 잔류한 구단이 확보했던 가장 낮은 점수에 해당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요나탄 타|타]]는 전반기 이후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고, [[피에르-미셸 라조가|라조가]]는 잔부상에 시달렸으며, [[막시밀리안 바이스터|바이스터]]는 겨울 휴식기에 친선경기에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시즌아웃되었다. 더욱이 [[요나탄 타|타]]의 공백에 우왕좌왕하던 중앙 수비에 한 줄기 빛으로 떠올랐던 [[슬로보단 라이코비치]]마저도 선발 출장 두 경기만에 마찬가지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시즌아웃되었다. 부상이 역병처럼 들끓었고,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또 다시 [[펠릭스 마가트]]와 접촉하는 등 팀 분위기는 엉망진창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20라운드 [[헤르타 BSC]]와의 홈 경기에서는 0:3의 스코어로 역사적인 6연패를 기록하면서 분노한 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주차장에 모인 300여명의 팬들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야르호프 운영이사회장과 크로이처 단장, 그리고 선수들이 직접 나서서 팬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계란과 쓰레기만 날아올 뿐이었다.<ref>빌트(Bild)지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아는 팬이 던진 무엇인가에 맞고 울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 벤피카에서 임대온 [[올라 존]](Ola John)은 <s>눈치 없이</s> 차를 타고 유유히 떠나려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ref> 이에 감독이사회는 이튿날 비공개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현 운영이사회와 감독의 신임 여부에 대해 토의를 벌였고, 비록 당장에는 재신임이 결정되었으나, 이어진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의 [[DFB-포칼]] 4강전과 리그 21라운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원정에서 모두 패하자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감독은 마침내 경질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때를 구단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일컬었다.


[[파일:Rickhoff.jpg|300픽셀|섬네일|왼쪽|HSVPlus를 발의한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반 마르바이크]] 경질 직후 HSV는 발 빠르게 [[하노버 96]]에서 해임된 [[미르코 슬롬카]](Mirko Slomka)와 접촉하였고, 곧 그를 후임 감독으로 선임하게 된다. 비록 그의 첫 경기였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홈 경기에서 HSV는 3:0 완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지만, 30라운드부터는 선수단의 줄부상 속에 마지막 다섯 경기를 모두 패하며 27점으로 16위를 기록, 간신히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ref>29라운드가 끝난 상황에서 강등권인 17위 뉘른베르크는 26점, 브라운슈바이크는 25점으로 승점 차이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으나, 남은 다섯 경기를 세 팀이 나란히 모두 전패로 기록하면서 극적으로 HSV는 16위를 유지하였다.</ref> 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HSV는 [[SpVgg 그로이터 퓌어트]](SpVgg Greuther Fürth)를 상대로 1차전 홈 경기를 0:0으로, 2차전 원정 경기를 [[미셸-피에르 라조가|라조가]]의 득점에 힘입어 1:1로 마쳤고, 결국 원정팀 다득점 원칙에 따라 잔류가 확정되었다. 당시 27점은 승리팀이 승점 3점을 차지하는 규정이 도입된 이래 분데스리가에서 잔류한 구단이 확보했던 가장 낮은 점수에 해당했다.
이처럼 HSV에게 2013-14 시즌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개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2013년 9월,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Ernst-Otto Rickhoff) 전 감독이사회장은 <i>HSVPlus</i>라는 급진적인 개혁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프로 축구 분과를 전체 법인에서 독립된 주식회사로 스핀오프함으로써 구단 운영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고, 동시에 총회의 동의 없이도 25% 미만에 해당하는 주식회사의 지분을 판매함으로써 부족한 자금을 유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물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 전 회장, 레전드 [[만프레트 칼츠]] 등 구단 내외의 일부 저명인사들은 이를 전통을 무시하고 영혼을 파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는데, 사실 이와 같은 비판에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 <i>HSVPlus</i> 그 자체는 상당히 획기적인 대안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있었고, 이들 반대자들은 바로 이 퀴네에 의해 구단이 좌지우지되는 비극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 1월 기준으로 법인의 부채가 무려 1억 유로에 육박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수는 <i>HSVPlus</i>를 지지하였다. <s>못 먹어도 일단 고!</s> 결국 7,134명이 참가한 2014년 1월 19일의 정기 총회 표결에서 79.4%의 동의를 받아 운영이사회는 향후 <i>HSVPlus</i>의 실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이어진 5월 25일의 총회에서 <i>HSVPlus</i>는 9,702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86.9%의 지지를 받아 최종 통과되었다. <ref>1월 총회 당시 HSVPlus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보다 온건한 대안적 개혁 모델로서 "전통과 함께하는 미래"(Zukunft mit Tradition", "라우테의 심장"(Rautenherz) 등을 제안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월 총회를 앞두고는 이들 반(反) HSVPlus 세력들이 위르겐 훈케 전 회장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HSV 알리안츠"(HSV-Allianz)라는 또 다른 개혁안을 추진한 바 있었다.</ref>
 
[[파일:Rickhoff.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Plus를 발의한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
이처럼 HSV에게 2013-14 시즌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개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2013년 9월,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Ernst-Otto Rickhoff) 전 감독이사회장은 <i>HSVPlus</i>라는 급진적인 개혁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프로 축구 분과를 전체 법인에서 독립된 주식회사로 스핀오프함으로써 구단 운영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고, 동시에 총회의 동의 없이도 25% 미만에 해당하는 주식회사의 지분을 전략적 파트너에 판매함으로써 투자금을 유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 전 회장, 레전드 [[만프레트 칼츠]] 등 구단 내외의 일부 저명인사들은 이를 전통을 무시하고 영혼을 파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는데, 사실 이와 같은 비판에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 <i>HSVPlus</i> 그 자체는 비록 획기적인 대안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있었고, 이들 반대자들은 바로 이 퀴네에 의해 구단이 하나의 장난감처럼 되는 비극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 1월 기준으로 법인의 부채가 무려 1억 유로에 육박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수는 <s>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에서</s> <i>HSVPlus</i>를 지지하였다. 결국 7,134명이 참가한 2014년 1월 19일의 정기 총회 표결에서 79.4%의 동의를 받아 운영이사회는 향후 <i>HSVPlus</i>의 실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이어진 5월 25일의 총회에서 <i>HSVPlus</i>는 9,702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86.9%의 지지를 받아 최종 통과되었다. <ref>1월 총회 당시 HSVPlus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보다 온건한 대안적 개혁 모델로서 "전통과 함께하는 미래"(Zukunft mit Tradition", "라우테의 심장"(Rautenherz) 등을 제안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월 총회를 앞두고는 이들 반(反) HSVPlus 세력들이 위르겐 훈케 전 회장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HSV 알리안츠"(HSV-Allianz)라는 또 다른 개혁안을 추진한 바 있었다.</ref>


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i>퀴네+나겔</i>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i>퀴네+나겔</i>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i>HSVPlus</i> 이후의 HSV (2014-현재) ===
어쨌든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3-14 시즌이 끝나고, HSV는 여름을 맞았다. 구단은 지난 시즌 에이스라고 할 수 있었던 [[미셸-피에르 라조가|라조가]]와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를 모두 지킨다는 원칙을 세웠고, 원 소속팀 [[헤르타 BSC|헤르타]]와의 긴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미셸-피에르 라조가|라조가]]를 남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는 일련의 <s>찡찡거림</s>소동 끝에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편, HSV는 개혁의 여세를 몰아 이적 시장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SSC 나폴리]]에서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를 데려오고 [[토트넘 홋스퍼]]에서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를 임대해온 일은 대형 영입으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난 시즌 후반기 컨디션 난조를 보였던 유망주 [[요나탄 타]]는 한 시즌 동안 [[포르투나 뒤셀도르프]](Fortuna Düsseldorf)로 임대되었고, '''마침내''' [[마이클 만시엔]]이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하였으며, 이적 시장 마지막 날에 살림꾼 역할을 도맡아 하던 [[밀란 바델리]](Milan Badelj)가 [[ACF 피오렌티나]]로 떠났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바이어스도르퍼]]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린 HSV는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비록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적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팀은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러한 빅사이닝을 토대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슬롬카는 조기에 경질되었고, 여러 유명한 이름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팀은 결국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ref>이는 HSV 2군이 8전 8승을 거두며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한 결과였다.</ref><ref>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ref>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화시키며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팀은 전반기 단 19골을 내주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해놓고도 득점에서 9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ref>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보다 거의 2배의 득점을 기록했다.</ref> 이에 팀은 겨울에 노장 공격수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 만에 재영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거기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20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원정에서 0:8이라는 재앙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초짜 감독은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HSV는 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부진하였고, [[요제프 친바우어|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ref>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ref>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미르코 슬롬카|슬롬카]]는 경질되었고, 여러 인물들이 물망에 오른 끝에 팀은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ref>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ref> 시즌 초반 8전 8승을 거두며 HSV 2군을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 자리에 올려 놓은 결과였다. 비록 우려가 많았지만,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시켰으며, 첫 경기인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의 홈 경기를 0:0로 마무리하고 원정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를 1:0으로 제압하는 등 초반에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미셸-피에르 라조가|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그 결과 만족할 만한 경기력을 보이고도 정작 골을 못 넣어서 지거나 비기는 경기들이 이어졌다. 팀은 6라운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전에서야 비로소 시즌 첫 골을 기록했고, 전반기 동안 총 19점을 허용하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하고도 압도적으로 꼴찌인 9득점밖에 터뜨리지 못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ref>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와 거의 2배의 득점 수를 기록했다.</ref>


[[파일:Klassenerhalt.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잔류의 기쁨에 <s>미쳐 날뛰는</s> HSV 선수 및 관계자들]]
이에 구단은 어떻게든 득점력을 살려보기 위해 겨울에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바스 도스트]](Bas Dost)에 밀려 벤치 신세가 된 노장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만에 다시 데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비극은 20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전에서 벌어졌다. 여러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한 가운데 맞이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의 원정 경기에서 팀은 0:8이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고, 이후 팀은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하여 HSV는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단 1승도 챙기지 못했고, [[요제프 친바우어|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ref>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비록 시즌 도중에 제의를 받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ref> 이에 페터 크내벨 단장이 임시로 감독직을 맡으면서 동시에 HSV는 새 감독을 물색하였고, 특히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과는 매우 진지한 수준까지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HSV가 당장 그를 원했던 것과 달리 [[토마스 투헬|투헬]]은 팀이 1부 리그에 잔류한다는 전제 하에 다음 시즌부터 지휘봉을 잡기를 바랐고, 그 때문에 협상이 장기화되는 사이에 [[토마스 투헬|투헬]]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계약을 하고 말았다. 결국 팀의 선택은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2009-10 시즌에 이미 [[마틴 욜]]의 후임으로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가 다시 소방수로 팀에 돌아온 것이었다.
친바우어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HSV 행이 유력했던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감독이 막판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행선지를 바꾸면서 2009-10 시즌에 이미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라바디아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친분에 힘입어 다시 소방수로 HSV에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팬들의 머릿속에는 2009-10 시즌의 악몽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라바디아는 [[VfB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감독으로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면서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s>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s> [[고이코 카차르]]의 부활에 힘입어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친 결과 팀은 꼴찌에서 16위로 올라서며 극적으로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칼스루헤 SC|칼스루헤]]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데 이어 원정에서의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며 팀은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i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서 <s>시즌 내내 계륵이었던</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역전골 <s>혹은 속죄골</s>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한 것이다.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첫 해에 쓰라린 실패를 겪자 팀은 대대적으로 선수단 체질 개선에 나섰다. 노쇠화가 두드러진 <s>그 놈의 지긋지긋한</s>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을 비롯하여 고액 주급자들이 대거 방출되었고, 그 자리는 유망주와 알짜 영입으로 채워졌다. 대형 영입이라고는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아론 헌트]](Aaron Hunt)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2015-16 시즌은 적어도 초반에는 긍정적이었다. [[레네 아들러]] 골키퍼의 선방과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센터백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의 안정된 수비, 나아가 살아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력에 힘입어 팀은 한때 대외컵 진출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안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 감독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사람만 좋아서 선수단 관리자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고,<ref>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에미르 스파히치는 여러 차례 동료 선수들에 대한 욕설 및 폭력 행사로 구설수에 올랐으나, 라바디아 감독과 구단 측은 그를 두둔하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스파히치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ref> 전술가로서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s>[[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Matthias Ostrzolek)으로 대변되는</s>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무색무취의 롱볼 축구로 비난을 받았다. 거기다가 최전방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진까지 겹치면서 시즌 막판에는 한때 다시 잔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s>드디어 각성한 초사이언</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의 활약에 힘입어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내용적으로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파일:Klassenerhalt.jpg|300픽셀|섬네일|왼쪽|잔류의 기쁨에 <s>미쳐 날뛰는</s> HSV 선수 및 관계자들]]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비록 2009-10 시즌에 [[UEFA 유로파 리그|유로파 리그]] 4강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정작 리그에서는 후반기에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당시로서는 실망스러웠던 7위에 머무른 바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사이 [[VfB 슈투트가르트]]에서도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팀을 맡게 되었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는 그렇게 다시 HSV의 감독이 되었고, 그가 지휘봉을 잡을 당시 팀은 2패를 추가하여 리그 꼴찌까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며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s>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s> [[고이코 카차르]]가 부활하며 팀은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무리, 극적으로 16위에 오르며 2년 연속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홈에서 열린 [[칼스루헤 SC]]와의 1차전에서 팀은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고, 2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0:1로 끌려가면서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í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고, 연장전에서 <s>시즌 내내 계륵이었던</s> 교체 투입된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가 역전골을 터뜨리며 팀은 2:1 승리,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하였다.


[[파일:Kuehne.jpg|300픽셀|섬네일|왼쪽|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2015년 여름, HSV는 새 시즌을 앞두고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지난 여름에 거액을 쏟아 부으며 대형 영입들을 성공시켰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고, 따라서 팀은 이를 반성하며 고액 주급자들을 내보내는 동시에 이름값에 휘둘리지 않은 알짜 영입들을 시도했다. 그 결과 수많은 선수들이 자유계약으로 팀을 떠났다. 노쇠화가 두드러졌던 [[라파엘 반 더 바르트]]와 [[하이코 베스터만]]이 각각 [[레알 베티스]]로 떠났으며, 십자인대 부상 이후 폼을 회복하지 못한 [[막시밀리안 바이스터]]와 [[페트르 이라첵]], [[자크 주아]] 등 잉여 전력들이 나란히 방출되었다. 그밖에도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팀내 불화만 일으키던 [[발론 베라미]]가 [[왓포드 FC]]로 떠났고, 고심 끝에 팀은 [[슬로보단 라이코비치]]와도 재계약을 맺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계약이 만료된 [[마르첼 얀젠]]은 만 29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대신에 팀은 잔류의 영웅 [[고이코 카차르]] 및 [[이보 일리체비치]](Ivo Iličević)와 연봉 50% 이상의 삭감을 조건으로 하여 재계약을 맺었고, [[미하엘 그레고리취]](Michael Gregoritsch), [[바투한 알틴타쉬]](Batuhan Altıntaş) 등의 유망주와 무적 신세의 베테랑 수비수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를 데려왔다. 대형 영입은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케빈 데 브라이너]](Kevin de Bruyne)에 밀려 벤치를 지키던 [[아론 헌트]](Aaron Hunt) 정도였고, 이 여름 동안에 크내벨 단장은 팀의 연봉 지출을 1천만 유로 가량 절감하였다.<ref>이적 시장 마감 종료 직전에 성사된 헌트의 영입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서도 찬반 의견이 크게 갈렸다. 라이벌인 베르더 브레멘 유스 출신에 볼프스부르크 이적 이전까지 브레멘의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던 선수였기 때문이었다.</ref> 반면에 [[요나탄 타]](Jonathan Tah)의 이적은 뼈 아픈 손실이었다. 구단 관계자와 팬들은 그를 장차 팀의 미래로 간주하며 애지중지해 왔으나, 정작 그는 임대에서 복귀한 이후 일련의 소동을 일으키며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축구 외적인 문제는 보다 명확했다. 야심차게 시작된 <i>HSVPlus</i>는 그 발의자였던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가 스스로 "<i>HSVPlus</i>는 죽었다"(HSVPlus ist tot)라고 선언할 만큼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ref>리크호프의 <i>HSVPlus</i> 비판은 다음의 칼럼을 참고할 것. http://www.goal.com/de/news/1025/kolumne/2015/10/06/16057762/jovanovs-hsv-vom-kurs-abgekommen</ref> 리크호프가 바랐던 <i>HSVPlus</i>의 목적은 지분 판매로 확보한 자금으로 빚을 갚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면서 유망주에 투자하여 팀을 장기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이상은 철저히 실패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그 자금을 빚을 갚거나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이적시장에 투자함으로써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성적을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은 대부분 기대 이하였고, 성적은 여전히 강등을 걱정해야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은 또 다시 부채를 끌어와 이적시장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구단은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이후 무려 약 6천만 유로를 선수영입에 사용했음에도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악순환 속에서 퀴네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질 뿐이었다.<ref>특히 2016년 여름, 퀴네는 최대 5천만 유로의 추가적인 대부를 약속하는 대신 개인 고문으로 폴커 슈트루트(Volker Struth)를 두고 선수를 영입할 때 팀이 자신과 사전에 논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퀴네의 지인으로서 과거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단장이었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향후 HSV는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 겸 단장,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폴커 슈트루트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할 경우에만 선수영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ref>
 
그리고 마침내 2015-16 시즌이 시작했다.


결국 그 책임은 페터 크내벨 단장의 해임으로 이어졌다.<ref>페터 크내벨의 해임은 지난 두 시즌 동안의 실망스러운 성과와 배낭 분실 사건, 그리고 퀴네의 입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배낭 분실 사건은 2015년 8월, 분실된 페터 크내벨의 배낭이 한 민간인 여성에게 발견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선수단 연봉 정보가 외부에 유출된 사고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http://www.mopo.de/sport/skandal-um-hsv-gehaelter-klaute-die--finderin--der-rucksack-von-sportdirektor-peter-knaebel--22461024</ref> 그리고 단장직을 겸임하게 된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퀴네의 후원과 왕년의 감각으로 2016년 여름 대대적인 선수 보강에 나섰다. 비록 총 지출은 3천만 유로를 상회했으나, [[필립 코스티치]](Filip Kostić), [[알렌 할릴로비치]](Alen Halilović)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점에서 일단 팬과 언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17 시즌, 팀은 1라운드 잉골슈타트 전 무승부 이후 4연패를 당하면서 2011-12 시즌 이후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다. 그 결과 라바디아 감독은 경질되었고, 과거 [[TSG 1899 호펜하임]]을 이끌었던 [[마르쿠스 기스돌]](Markus Gisdol)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ref>재미있는 점은 기스돌은 호펜하임에서 2015년 10월, HSV와의 패배 직후 해임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라바디아 감독의 HSV에 패해 경질된 기스돌이 그 라바디아의 후임으로 그 HSV의 감독이 된 셈이다. <s>자고로 인생이란 모르는 것..</s></ref>


== 상징물 ==
== 상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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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블럼 ===
=== 엠블럼 ===


HSV의 엠블럼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디자인의 자체는 '전원 승선'을 알리는 깃발 신호인 '파란 페터'(Blaue Peter)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파란 페터는 파란 바탕에 커다란 하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선박용 깃발 신호인데, 여기에 SC 게르마니아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징색이었던 파란색과 검은색을 디자인에 반영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지금의 엠블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으로 미루어 볼 때, HSV의 엠블럼은 항구도시로서 함부르크 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HSV는 원정 경기를 치르러 떠날 때 선수단이 출발했다는 의미로 이 '전원 승선'(Alle Mann an Bord)이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한편, 엠블럼 한가운데의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은 흔히 '라우테'(Raute)라고 일컬어지는데, 비록 시기에 따라 이 라우테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눈에 띄는 디자인 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HSV의 엠블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실질적으로 엠블럼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ref>물론 구단 역사가 짧은 [[FC 잉골슈타트 04]](FC Ingolstadt 04) 등은 제외했을 때의 얘기다.</ref> 한편,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는 2016년 4월 12일, 세계 최악의 엠블럼으로 HSV의 문장을 선정하였다.<ref>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534464/Wolfsburg-s-ugly-badge-seen-Champions-League-semi-finals-does-make-list-10-worst-football.html
HSV의 엠블럼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디자인의 자체는 '전원 승선'을 알리는 깃발 신호인 '파란 페터'(Blaue Peter)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파란 페터는 파란 바탕에 커다란 하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선박용 깃발 신호인데, 여기에 SC 게르마니아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 상징색이었던 파란색과 검정색을 디자인에 반영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지금의 엠블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으로 미루어 볼 때, HSV의 엠블럼은 항구도시로서 함부르크 시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HSV는 원정 경기를 치르러 떠날 때 선수단이 출발했다는 의미로 이 '전원 승선'(Alle Mann an Bord)이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곤 한다. 한편, 엠블럼 한가운데의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은 흔히 '라우테'(Raute)라고 일컬어지는데, 비록 시기에 따라 이 라우테의 크기가 약간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눈에 띄는 디자인 상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HSV의 엠블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실질적으로 엠블럼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데일리 메일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최악의 엠블럼 10개 중 영국 팀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된 구단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독일 일간지 [[빌트]](Bild)에서는 데일리 메일이 선정한 팀들에 잉글랜드 구단 4팀을 추가하여 진정한 세계 최악의 엠블럼을 가리는 인터넷 투표를 진행하였고, 37%의 득표를 받아 잉글랜드의 밀턴 케인스 돈스(Milton Keynes Dones)가 1위에 선정되었다. <s>그 와중에 HSV는 26%로 2등을 차지했다.</s>
http://www.bild.de/sport/fussball/fussball-international/wer-hat-das-schlimmste-logo-45374124.bild.html</ref>
 


=== 유니폼 ===
=== 유니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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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 Emirates || 항공사
| 2006- || Emirates || 항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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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원가 ===
=== 응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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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uf geht's Hamburg schießt ein Tor</i> : 득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부르는 곡으로 우리말로 한다면 '함부르크 한 골 넣자' 정도의 의미이다. 이 역시 거의 매 경기 빠짐없이 불리는 곡이지만, 국가대표 및 다른 팀들 역시 Hamburg 자리만 바꾸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HSV만의 응원가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i>Auf geht's Hamburg schießt ein Tor</i> : 득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부르는 곡으로 우리말로 한다면 '함부르크 한 골 넣자' 정도의 의미이다. 이 역시 거의 매 경기 빠짐없이 불리는 곡이지만, 국가대표 및 다른 팀들 역시 Hamburg 자리만 바꾸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HSV만의 응원가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i>Auf geht's Hamburg</i> : 현재 골을 넣었을 때 나오는 응원가다. 뜻은 '한 번 시작해 보자, 함부르크' 정도가 될 것이다.


그밖에도 HSV의 응원가로는 무수히 많은 곡들이 있으나, 일단은 그 수가 너무 많고 오늘날 그다지 자주 불리지 않는 곡들이 대부분인 만큼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밖에도 HSV의 응원가로는 무수히 많은 곡들이 있으나, 일단은 그 수가 너무 많고 오늘날 그다지 자주 불리지 않는 곡들이 대부분인 만큼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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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ligauhr.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분데스리가 시계]]
[[파일:Bundesligauhr.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분데스리가 시계]]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홈 서포터석에 해당하는 북쪽 관중석(Nordtribüne) 중 22A 블럭 위, 즉 구장 북서쪽 방향 중앙 부근에는 '분데스리가 시계'(Bundesliga-Uhr)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계는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물렀던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데, 앞부터 차례대로 연, 일, 시, 분, 초 순으로 표기된다. 무엇보다도 이는 독일 내 분데스리가를 개근한 유일한 클럽으로서 HSV가 품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단이 강등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언론들은 이 시계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내용으로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한편,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분데스리가 시계와 마찬가지로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무른 시간을 보여주는 위젯을 찾아볼 수 있다.
HSV의 홈구장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의 홈 서포터석에 해당하는 북쪽 관중석(Nordtribüne) 중 22A 블럭 위, 즉 구장 북서쪽 방향 중앙 부근에는 '분데스리가 시계'(Bundesliga-Uhr)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계는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물렀던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데, 앞부터 차례대로 연, 일, 시, 분, 초 순으로 표기된다. 무엇보다도 이는 독일 내 분데스리가를 개근한 유일한 클럽으로서 HSV가 품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단이 강등 위기에 놓일 때마다 언론들은 이 시계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내용으로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한편,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분데스리가 시계와 마찬가지로 HSV가 분데스리가에 머무른 시간을 보여주는 위젯을 찾아볼 수 있다.


== 시설 ==
== 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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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olksparkstadion.jpg|300픽셀|섬네일|왼쪽|오늘날의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파일:Volksparkstadion.jpg|300픽셀|섬네일|왼쪽|오늘날의 폴크스파크 슈타디온]]
공사는 2000-01 시즌의 개막과 함께 완료되었고, 이 시기부터 HSV는 구장의 명명권을 사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터넷 서비스 기업인 AOL이 3천만 마르크에 명명권을 매입하여 구장은 '''AOL 아레나'''(AOL Arena)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계약은 2005년에 2년 더 연장되었다. 이후 2007년 6월 4일부터 구장은 2013년까지 '''HSH 노르트방크 아레나'''(HSH Nordbank Arena)로 불리게 되었으나, HSH 노르트방크가 재정난을 겪으며 계약을 조기 해지, 2010년 7월부터는 '''임테흐 아레나'''(Imtech Aren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f>그러나 공식 명칭만 바뀌었을 뿐,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옛 이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ref> 그리고 2015년 1월 22일,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억만장자 후원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연 4백만 유로에 4년간 구장 명명권을 구입, 구장명을 원래 이름대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ref>물론 퀴네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건 당연히 아니고 처음에는 자기 이름을 붙이려다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이미지 세탁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ref> 이로써 HSV는 명명권을 판매한 분데스리가 구단들 가운데 최초로 옛 명칭을 회복한 팀이 되었으며, 2015년 7월부터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공사는 2000-01 시즌의 개막과 함께 완료되었고, 이 시기부터 HSV는 구장의 명명권을 사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터넷 서비스 기업인 AOL이 3천만 마르크에 명명권을 매입하여 구장은 '''AOL 아레나'''(AOL Arena)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계약은 2005년에 2년 더 연장되었다. 이후 2007년 6월 4일부터 구장은 2013년까지 '''HSH 노르트방크 아레나'''(HSH Nordbank Arena)로 불리게 되었으나, HSH 노르트방크가 재정난을 겪으며 계약을 조기 해지, 2010년 7월부터는 '''임테흐 아레나'''(Imtech Aren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f>그러나 공식 명칭만 바뀌었을 뿐,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옛 이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ref> 그리고 2015년 1월 22일,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억만장자 후원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연 4백만 유로에 4년간 구장 명명권을 구입, 구장명을 원래 이름대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이로써 HSV는 명명권을 판매한 분데스리가 구단들 가운데 최초로 옛 명칭을 회복한 팀이 되었으며, 2015년 7월부터 구장은 다시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옛 구장이었던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1989년 8월 19일, [[MSV 뒤스부르크]](MSV Duisburg)와의 [[DFB-포칼]] 1라운드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2군 이하 혹은 여자 축구 팀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함부르크 주정부는 마침내 결국 이 낡은 구장의 철거를 결정하였다. 비록 HSV와 팬들은 이곳을 기념물로서 보호 관리 하에 두고자 노력했으나, 1997년에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주거 시설과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상태다.
한편, 옛 구장이었던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1989년 8월 19일, [[MSV 뒤스부르크]](MSV Duisburg)와의 [[DFB-포칼]] 1라운드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2군 이하 혹은 여자 축구 팀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함부르크 주정부는 마침내 결국 이 낡은 구장의 철거를 결정하였다. 비록 HSV와 팬들은 이곳을 기념물로서 보호 관리 하에 두고자 노력했으나, 1997년에 슈포어트플라츠 암 로텐바움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주거 시설과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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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캠퍼스는 U-15 팀부터 2군까지를 수용할 예정이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캠퍼스처럼 학업 교육, 각종 편의시설, 심지어 일부 선수들에게는 기숙사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HSV 캠퍼스의 운영은 오토 스포츠 재단 운영이사회장인 란도 아우스트(Rando Aust)와 HSV 축구 주식회사 운영이사회의 요아힘 힐케(Joachim Hilke)가 담당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HSV 캠퍼스는 U-15 팀부터 2군까지를 수용할 예정이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뿐만 아니라 하나의 캠퍼스처럼 학업 교육, 각종 편의시설, 심지어 일부 선수들에게는 기숙사까지 제공할 계획이다. HSV 캠퍼스의 운영은 오토 스포츠 재단 운영이사회장인 란도 아우스트(Rando Aust)와 HSV 축구 주식회사 운영이사회의 요아힘 힐케(Joachim Hilke)가 담당할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 HSV 축구 주식회사 (HSV Fußball AG) ==
== HSV 축구 주식회사 (HSV Fußball 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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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축구 주식회사(Hamburger Sport-Verein Fußball AG)는 2014년 5월 총회의 결정에 따라 HSV 법인(Hamburger Sport-Verein e.V.)에서 독립하였으며, 그해 7월 7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HSV 축구 주식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라고 볼 수는 없다. 1990년대 초, 당시 회장이던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는 구단의 재정 개혁을 위해 6월 27일에 HSV 스포츠 주식회사(HSV Sport AG)를 설립하고 지분 판매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자 한 바 있었는데, 적당한 투자자를 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당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ref>이런 점에서 보자면, 훈케가 HSVPlus 반대 세력의 구심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보일 수 있으나, 훈케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개혁 그 자체의 저지가 아니라 퀴네의 개입을 저지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ref> HSV 축구 주식회사는 바로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i>HSVPlus</i>의 개혁안에 따라 5월 총회 이후 프로축구 분과가 기존의 HSV 스포츠 주식회사로 독립해 나가고,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가 HSV 축구 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HSV 축구 주식회사(Hamburger Sport-Verein Fußball AG)는 2014년 5월 총회의 결정에 따라 HSV 법인(Hamburger Sport-Verein e.V.)에서 독립하였으며, 그해 7월 7일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HSV 축구 주식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라고 볼 수는 없다. 1990년대 초, 당시 회장이던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는 구단의 재정 개혁을 위해 6월 27일에 HSV 스포츠 주식회사(HSV Sport AG)를 설립하고 지분 판매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자 한 바 있었는데, 적당한 투자자를 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당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ref>이런 점에서 보자면, 훈케가 HSVPlus 반대 세력의 구심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보일 수 있으나, 훈케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개혁 그 자체의 저지가 아니라 퀴네의 개입을 저지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ref> HSV 축구 주식회사는 바로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i>HSVPlus</i>의 개혁안에 따라 5월 총회 이후 프로축구 분과가 기존의 HSV 스포츠 주식회사로 독립해 나가고, 이 HSV 스포츠 주식회사가 HSV 축구 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 개혁에 따라 HSV 축구 주식회사는 25% 미만에 해당하는 지분을 법인 총회의 동의 없이 전략적 파트너에게 판매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HSV 축구 주식회사의 지분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 개혁에 따라 HSV 축구 주식회사는 25% 미만에 해당하는 지분을 법인 총회의 동의 없이 전략적 파트너에게 판매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HSV 축구 주식회사의 지분 구조는 HSV 법인이 91%를 소유하며 최대 주주로 있는 가운데 7.5%를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1.5%를 헬무트 본호어스트가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HSV 축구 주식회사는 계속해서 투자자를 확보하여 지분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분 판매가 25%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매각을 위해서는 법인 총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 지분이 50%를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독일 축구계의 50+1 원칙에 따른 것으로, HSV 법인은 항상 5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해야만 한다.  


{| class="wikitable"
개혁의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는 또한 HSV 법인과는 별개의 운영이사회 및 감독이사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HSV 법인은 여전히 축구 주식회사의 제1주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 회장단은 주주 총회에 참여하여 여섯 명의 감독이사회원 중 다섯 명을 선출하게 되며, 남은 한 명 또한 법인 회장단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이러한 감독이사회는 운영이사회의 인원 수를 결정하고 구성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한을 갖는다. ,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구단 운영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운영이사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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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분 !! 보유자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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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25% || HSV 법인 (Hamburger SV e.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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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0% ||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Klaus-Michael Kühne) || 운송회사 퀴네+나겔 사(Kühne + Nagel International AG)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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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 헬무트 본호어스트 (Helmut Bohnhorst) || 농업 거래 기업 본호어스트 사(Bohnhorst Agrarhandel GmbH) 前 회장<ref>본호어스트 사는 2013년, 동종 업계의 바이바 사(BayWa AG)에 인수되었다.</ref>
|-
| 1.50% || J. 부어마이스터 사 (J. Burmeister GmbH) || 과일 및 채소 회사
|-
| 0.75% || 알렉산더 마르가리토프 (Alexander Margaritoff)<ref>2016년 5월 22일에 알렉산더 마르가리토프가 사망하면서 이 권리는 그 상속자들에게 돌아갔다.</ref> || 와인 회사 하베스코 사(Hawesko Holding AG) 前 회장
|}


앞으로도 HSV 축구 주식회사는 계속해서 투자자를 확보하여 지분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분 판매가 25%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매각을 위해서는 법인 총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 지분이 50%를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독일 축구계의 50+1 원칙에 따른 것으로, HSV 법인은 항상 5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해야만 한다.
개혁의 결과 HSV 축구 주식회사는 또한 HSV 법인과는 별개의 운영이사회 및 감독이사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HSV 법인은 여전히 축구 주식회사의 제1주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그 회장단은 주주 총회에 참여하여 여섯 명의 감독이사회원 중 다섯 명을 선출하게 되며, 남은 한 명 또한 법인 회장단 중 한 명이 맡게 된다. 이러한 감독이사회는 운영이사회의 인원 수를 결정하고 구성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한을 갖는다. 단,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구단 운영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단지 운영이사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 팬 문화<ref>팬 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였다. http://www.hsv1887.de/</ref> ==
== 팬 문화<ref>팬 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였다. http://www.hsv1887.de/</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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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선관계 ===
=== 친선관계 ===


역사적으로 HSV와 가장 끈끈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클럽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1부 리그로 승격한 1976년 이후 양팀 서포터들은 서로가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날 경우에 동행하며 함께 응원해 주었고, 경기장 바깥에서도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이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198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는데, [[셀틱 FC|셀틱]]의 라이벌 [[레인저스 FC]]와 친선관계에 있었던 HSV로서는 이 소식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8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DFB-포칼]] 경기를 치르러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났을 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팬들은 HSV 팬들을 남겨둔 채 [[겔젠키르헨]]을 떠나 버렸고, 남겨진 HSV 팬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FC 샬케 04|샬케]] 팬들과 신경전을 이어가다가 충돌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ref>다만, 이는 HSV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도르트문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ref>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양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더욱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처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HSV의 친선 관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드 팬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양팀이 맞대결을 펼칠 때면 팬들끼리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확인할 있다.
역사적으로 HSV와 가장 끈끈한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클럽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1부 리그로 승격한 1976년 이후 양팀 서포터들은 서로가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날 경우에 동행하며 함께 응원해 주었고, 경기장 바깥에서도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며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이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198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와 친선 관계를 맺게 되는데, [[셀틱 FC|셀틱]]의 라이벌 [[레인저스 FC]]와 친선관계에 있었던 HSV로서는 이 소식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듬해인 198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가 [[DFB-포칼]] 경기를 치르러 [[FC 샬케 04|샬케]] 원정을 떠났을 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팬들은 HSV 팬들을 남겨둔 채 [[겔젠키르헨]]을 떠나 버렸고, 남겨진 HSV 팬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FC 샬케 04|샬케]] 팬들과 신경전을 이어가다가 충돌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ref>다만, 이는 HSV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도르트문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ref>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양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더욱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비록 여전히 올드 팬들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남아 있으나, 사실상 이 친선관계는 끝났다고 볼 있는 것이다.


한편,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내 클럽으로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Arminia Bielefeld)와 [[하노버 96]]을 들 수 있다. 세 팀은 소위 '북부 동맹'(Nordallianz)으로 일컬어지는 친선 관계로 묶여 있는데,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와 HSV는 팀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은색·파란색·흰색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하노버 96]]은 약자가 'HSV'로 똑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ref>그러나 오늘날 하노버 96의 약자는 HSV보다는 보통 H96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f> 특히 1990년대 중반에는 [[토마스 폰 헤젠]](Thomas von Heesen), [[울리 슈타인]](Uli Stein) 등 한때 HSV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로 이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양팀의 친선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내 클럽으로는 [[아르미니아 빌레펠트]](Arminia Bielefeld)와 [[하노버 96]]을 들 수 있다. 세 팀은 소위 '북부 동맹'(Nordallianz)으로 일컬어지는 친선 관계로 묶여 있는데,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와 HSV는 팀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정색·파란색·흰색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하노버 96]]은 약자가 'HSV'로 똑같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ref>그러나 오늘날 하노버 96의 약자는 HSV보다는 보통 H96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f> 특히 1990년대 중반에는 [[토마스 폰 헤젠]](Thomas von Heesen), [[울리 슈타인]](Uli Stein) 등 한때 HSV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전성기가 지난 이후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빌레펠트]]로 이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양팀의 친선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외에서는 전술하였듯이 [[레인저스 FC]]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1974년, HSV 팬들은 원정 응원을 온 [[레인저스 FC|레인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팀은 친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각자의 라이벌 때문이었는데, HSV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FC 장크트 파울리]](FC St. Pauli)가 1987년에 [[셀틱 FC|셀틱]]과 친선을 맺게 되자 양팀은 더욱 서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국외에서는 전술하였듯이 [[레인저스 FC]]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1974년, HSV 팬들은 원정 응원을 온 [[레인저스 FC|레인저스]]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팀은 친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각자의 라이벌 때문이었는데, HSV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FC 장크트 파울리]](FC St. Pauli)가 1987년에 [[셀틱 FC|셀틱]]과 친선을 맺게 되자 양팀은 더욱 서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1976년부터 1979년경까지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네 팀은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 맞서 4자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외에서는 한때 잉글랜드의 [[리버풀 FC]] 등과 친선을 맺은 바 있었다.
그밖에도 HSV와 친선을 맺고 있는 구단으로는 스웨덴의 [[AIK 스톡홀름]](AIK Stockholm), 덴마크의 [[FC 코펜하겐]](FC Copenhagen) 등이 있으며, 한때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 FC 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 [[칼스루헤 FC]],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었다. 특히 1976년부터 1979년경까지 HSV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네 팀은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에 맞서 4자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외에서는 한때 잉글랜드의 [[리버풀 FC]] 등과 친선을 맺은 바 있었다.


=== 라이벌 ===
=== 라이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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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독 더비]]로 유명한 [[SV 베르더 브레멘|베르더 브레멘]]과의 관계는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점점 폭력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특히 1982년 10월 16일에 있었던 한 사건은 양팀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 당시 HSV 원정을 온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 팬들 중 일부가 실수로 지하철 역을 잘못 내리는 바람에 경찰의 호위 없이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들은 도중에 HSV 울트라스 가운데서도 가장 극우 집단인 <i>사자들</i>(Die Löwen)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패싸움 끝에 불과 만 16세에 불과했던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의 팬 아드리안 말라이카(Adrian Maleika)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더 큰 비극을 막고자 두 달 후에 200여명의 양팀 팬 대표들은 셰셀(Scheeßel)에서 만나 "셰셀의 평화"(Frieden von Scheeßel)를 약속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 팬들은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으며, 두 구단의 라이벌 관계는 지금까지 팽팽하게 지속되고 있다.<ref>베르더 브레멘의 홈 구장 베저 슈타디온 벽 한 구석에는 현재 아드리안 말라이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ref>
한편, [[북독 더비]]로 유명한 [[SV 베르더 브레멘|베르더 브레멘]]과의 관계는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점점 폭력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특히 1982년 10월 16일에 있었던 한 사건은 양팀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 당시 HSV 원정을 온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 팬들 중 일부가 실수로 지하철 역을 잘못 내리는 바람에 경찰의 호위 없이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들은 도중에 HSV 울트라스 가운데서도 가장 극우 집단인 <i>사자들</i>(Die Löwen)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패싸움 끝에 불과 만 16세에 불과했던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의 팬 아드리안 말라이카(Adrian Maleika)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더 큰 비극을 막고자 두 달 후에 200여명의 양팀 팬 대표들은 셰셀(Scheeßel)에서 만나 "셰셀의 평화"(Frieden von Scheeßel)를 약속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 팬들은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으며, 두 구단의 라이벌 관계는 지금까지 팽팽하게 지속되고 있다.<ref>베르더 브레멘의 홈 구장 베저 슈타디온 벽 한 구석에는 현재 아드리안 말라이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ref>


그밖에 HSV는 과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친선 관계에 있던 시절, [[FC 샬케 04|샬케 04]]와도 서로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으나, 현재는 그 반감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다. 오히려 근래에 들어 [[하칸 찰하놀루]]의 이적을 계기로 하여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3-14 시즌에 HSV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는 [[아스날 FC]]를 비롯하여 다수의 강팀들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별다른 이적 옵션조차 넣지 않은 채 팀과 2018년까지 장기 재계약을 맺으며 충성심을 과시하여 팬들의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시즌 종료가 가까워지면서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이 그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돌변하였고, 팀이 이적 불가를 선언하자 SNS까지 동원하며 구단을 비방, 이적을 극구 요구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s>온갖 종류의 요란한 패악질, 아니</s> 작은 소동 끝에 그는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낳았고, 이후 HSV 팬들은 한동안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름에 유다를 합성하여 그를 유다놀루(Judanoglu)라고 부르고, 알약을 의미하는 명사 Pillen을 합성하여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을 필렌쿠젠(Pillenkuse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ref>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어(Bayer)가 제약회사이기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다.</ref> 더욱이 한 시즌 뒤에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또 다시 <s>아빠 찬스를 동원한 난동을 일으키며</s>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떠나게 되자 HSV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HSV 팬들은 근 몇 년간 있었던 [[시드니 샘]](Sidney Sam), [[손흥민]], [[레빈 외즈투날리]](Levin Öztunali)의 이적 건까지 싸잡아 HSV에 괜찮은 유망주가 나오기만 하면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이 빼앗아 버린다며 공분을 터뜨렸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과 그 단장 <s>용서받지 못할 자</s> [[루디 푈러]](Rudi Völler)는 HSV 팬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되었다.<ref>특히 레빈 외즈투날리는 HSV의 레전드, 우베 젤러의 외손자이기도 하다.</ref>
그밖에 HSV는 과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친선 관계에 있던 시절, [[FC 샬케 04|샬케 04]]와도 서로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으나, 현재는 그 반감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다. 오히려 근래에 들어 [[하칸 찰하놀루]]의 이적을 계기로 하여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3-14 시즌에 HSV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는 [[아스날 FC]]를 비롯하여 다수의 강팀들로부터 관심을 받았으나, 강등시 이적 조항조차도 넣지 않은 채 팀과 2018년까지 장기 재계약을 맺으며 충성심을 과시하여 팬들의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시즌 종료가 가까워지면서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이 그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돌변하였고, 팀이 이적 불가를 선언하자 SNS까지 동원하며 구단을 비방, 이적을 극구 요구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s>땡깡질</s> 소동 끝에 그는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낳았고, 이후 HSV 팬들은 한동안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름에 유다를 합성하여 그를 유다놀루(Judanoglu)라고 부르고, 알약을 의미하는 명사 Pillen을 합성하여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을 필렌쿠젠(Pillenkuse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ref>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어(Bayer)가 제약회사이기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다.</ref> 더욱이 한 시즌 뒤에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또 다시 <s>땡깡</s>소동을 일으키며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떠나게 되자 HSV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HSV 팬들은 근 몇 년간 있었던 [[시드니 샘]](Sidney Sam), [[손흥민]], [[레빈 외즈투날리]](Levin Öztunali)의 이적 건까지 싸잡아 HSV에 괜찮은 유망주가 나오기만 하면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이 빼앗아 버린다며 공분을 터뜨렸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과 그 단장 [[루디 푈러]](Rudi Völler)는 HSV 팬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되었다.<ref>특히 레빈 외즈투날리는 HSV의 레전드, 우베 젤러의 외손자이기도 하다.</ref><ref>2015년 여름, [[서영재]] 선수가 HSV 2군으로 이적할 당시에도 팬들의 반응 중에는 어차피 잘 키워봤자 레버쿠젠으로 가 버릴 게 아니냐는 푸념이 상당수를 차지했다.</ref>
 


=== 특수한 관계 ===
=== 특수한 관계 ===


[[파일:HFC Falke.jpeg|180픽셀|섬네일|오른쪽|HFC 팔케의 엠블럼]]
[[파일:HFC Falke.jpeg|180픽셀|섬네일|오른쪽|HFC 팔케의 엠블럼]]
2014년 5월 25일의 총회 표결 결과에 따라 프로축구 분과의 스핀오프가 최종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타락한 HSV를 대체하여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고, 2014년 7월 17일, HFC 팔케(HFC Falke)라는 새로운 구단이 공식 등록 절차를 마쳤다.<ref>HFC 팔케의 창립자들은 2005년, 미국인 기업가 말콤 글레이저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할 당시 그 반대자들이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FC United of Manchester)를 창단했던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ref> 그러나 짧은 준비 기간 탓에 아직 선수단도 갖추지 못했던 HFC 팔케는 한 시즌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2015-16 시즌, 9부 리그에 해당하는 함부르크 크라이스클라세 5(Kreisklasse 5)에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HFC 팔케라는 구단명은 HSV의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의 약자인 HFC와 FC 팔케(FC Falke 1906)의 명칭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엠블럼 및 유니폼 색깔은 또 하나의 전신 구단인 SC 게르마니아 (SC Germania 1887)를 연상케 한다. 비록 창단 이후 HFC 팔케는 빠르게 상부 리그로 치고 올라오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워낙 소속 리그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인지 서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2014년 5월 25일의 총회 표결 결과에 따라 프로축구 분과의 스핀오프가 최종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타락한 HSV를 대체하여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고, 2014년 7월 17일, HFC 팔케(HFC Falke)라는 새로운 구단이 공식 등록 절차를 마쳤다.<ref>HFC 팔케의 창립자들은 2005년, 미국인 기업가 말콤 글레이저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할 당시 그 반대자들이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FC United of Manchester)를 창단했던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ref> 그러나 짧은 준비 기간 탓에 아직 선수단도 갖추지 못했던 HFC 팔케는 한 시즌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2015-16 시즌, 9부 리그에 해당하는 함부르크 크라이스클라세 5(Kreisklasse 5)에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HFC 팔케라는 구단명은 HSV의 전신 구단들 가운데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의 약자인 HFC와 FC 팔케(FC Falke 1906)의 명칭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엠블럼 및 유니폼 색깔은 또 하나의 전신 구단인 SC 게르마니아 (SC Germania 1887)를 연상케 한다. 다만, 아직 워낙 소속 리그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인지 서로 라이벌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SNS 상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볼 때 두 팀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인물 ==
== 인물 ==
379번째 줄: 380번째 줄:
| 2011/03/16 - 2014/07/07 || 칼-에드가 야르호프 (Carl-Edgar Jarchow) || 운영이사회장  
| 2011/03/16 - 2014/07/07 || 칼-에드가 야르호프 (Carl-Edgar Jarchow) || 운영이사회장  
|-
|-
| 2014/07/09 - 2016/12/13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운영이사회장
| 2014/07/09 -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운영이사회장  
|-
| 2016/12/14 -  || 헤리베어트 부르흐하겐 (Heribert Bruchhagen) || 운영이사회장  
|}
|}


=== 역대 단장 ===
=== 역대 단장 ===
421번째 줄: 419번째 줄:
| 2013/06/11 - 2014/07/14 || 올리버 크로이처 (Oliver Kreuzer) || 스포츠 디렉터  
| 2013/06/11 - 2014/07/14 || 올리버 크로이처 (Oliver Kreuzer) || 스포츠 디렉터  
|-
|-
| 2014/10/01 - 2016/05/09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프로축구 디렉터
| 2014/10/01 -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프로축구 디렉터  
|-
| 2015/05/09 - 2016/12/13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Dietmar Beiersdorfer) || 프로축구 디렉터
|-
| 2017/01/06 -  || 옌스 토트 (Jens Todt) || 프로축구 디렉터  
|}
|}


512번째 줄: 506번째 줄:
| 1970/07/01 - 1973/06/30 || 클라우스 옥스 (Klaus Ochs) || ||  
| 1970/07/01 - 1973/06/30 || 클라우스 옥스 (Klaus Ochs) || ||  
|-
|-
| 1973/07/01 - 1977/06/30 ||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 1976 [[DFB-포칼]] 우승<br />1977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  
| 1973/07/01 - 1977/06/30 || 쿠노 클뢰처 (Kuno Klötzer) || 1976 [[DFB-포칼]] 우승<br>1977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 ||  
|-
|-
| 1977/07/01 - 1977/10/27 || 루디 구텐도르프 (Rudi Gutendorf) || ||  
| 1977/07/01 - 1977/10/27 || 루디 구텐도르프 (Rudi Gutendorf) || ||  
522번째 줄: 516번째 줄:
| 1980/12/19 - 1981/06/30 || 알렉산다르 리스티치 (Aleksandar Ristic) || ||  
| 1980/12/19 - 1981/06/30 || 알렉산다르 리스티치 (Aleksandar Ristic) || ||  
|-
|-
| 1981/07/01 - 1987/06/30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1982 [[분데스리가]] 우승<br />1983 [[분데스리가]] 우승<br />1983 [[유러피언 컵]] 우승<br />1987 [[DFB-포칼]] 우승 ||
| 1981/07/01 - 1987/06/30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1982 [[분데스리가]] 우승<br>1983 [[분데스리가]] 우승<br>1983 [[유러피언 컵]] 우승<br>1987 [[DFB-포칼]] 우승 ||
|-
|-
| 1987/07/01 - 1987/11/09 || 요십 스코블라르 (Josip Skoblar) || ||  
| 1987/07/01 - 1987/11/09 || 요십 스코블라르 (Josip Skoblar) || ||  
576번째 줄: 570번째 줄:
| 2015/03/22 - 2015/04/14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 임시 감독
| 2015/03/22 - 2015/04/14 || 페터 크내벨 (Peter Knäbel) || || 임시 감독
|-
|-
| 2015/04/15 - 2016/09/25 ||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 ||
| 2014/04/15 -  || 브루노 라바디아 (Bruno Labbadia) || ||  
|-
| 2016/09/26 -  || 마르쿠스 기스돌 (Markus Gisdol) || ||  
|}
|}


===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
625번째 줄: 616번째 줄:
| 프리츠 라반트 (Fritz Laband) || 1950-1956 || 선수(수비수)
| 프리츠 라반트 (Fritz Laband) || 1950-1956 || 선수(수비수)
|-
|-
|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 1976-1986<br />1995-1997 || 선수(미드필더)<br />감독
|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 1976-1986<br>1995-1997 || 선수(미드필더)<br>감독
|-
|-
|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 1956-1962 || 감독
| 귄터 말만 (Günter Mahlmann) || 1956-1962 || 감독
641번째 줄: 632번째 줄:
|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 1949-1958 || 선수(리베로)
| 유프 포지팔 (Jupp Posipal) || 1949-1958 || 선수(리베로)
|-
|-
|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 1974-1981<br />1987-1990 || 선수<br />감독
| 빌리 라이만 (Willi Reimann) || 1974-1981<br>1987-1990 || 선수<br>감독
|-
|-
|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 1978-2004 || 마사지사
| 헤어만 리거 (Hermann Rieger) || 1978-2004 || 마사지사
661번째 줄: 652번째 줄:
|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 1971-1978 || 선수(공격수)
| 게오르크 폴커트 (Georg Volkert) || 1971-1978 || 선수(공격수)
|-
|-
|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 1978-1985<br />1995-1998 || 선수(수비수)<br />단장
| 베른트 베마이어 (Bernd Wehmeyer) || 1978-1985<br>1995-1998 || 선수(수비수)<br>단장
|-
|-
| 위르겐 베르너 (Jürgen Werner) || 1955-1963 || 선수(미드필더)
| 위르겐 베르너 (Jürgen Werner) || 1955-1963 || 선수(미드필더)
670번째 줄: 661번째 줄:
|}
|}
<ref>http://www.hsv.de/arenawelt/volksparkstadion/der-walk-of-fame/ 참고</ref>
<ref>http://www.hsv.de/arenawelt/volksparkstadion/der-walk-of-fame/ 참고</ref>


=== 125주년 기념 역대 베스트 팀 ===
=== 125주년 기념 역대 베스트 팀 ===
717번째 줄: 707번째 줄:
|}
|}


=== 현재 선수단 ===


=== 현재 선수단 ===
<div style{{=}}"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축구단 선수 명단/|함부르크 SV|16-17|
{{축구단 선수 명단/시작|함부르크 SV|15-16}}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
|등번호=1
|이름=레네 아들러
|이름=야로슬라프 드로브니
|로마자 이름=René Adler
|로마자 이름=Jaroslav Drobný
|포지션=골키퍼
|포지션=골키퍼
|국적=독일
|국적=체코
|생년=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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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10
|생일=15
|생일=18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749번째 줄: 740번째 줄:
|생월=12
|생월=12
|생일=5
|생일=5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FC 산토스]](FC Santos)로 이적</ref>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
|이름=메르김 마브라이
|로마자 이름=Mergim Mavraj
|포지션=수비수
|국적=알바니아
|생년=1986
|생월=6
|생일=9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1. FC 쾰른]](1. FC Köln)에서 영입</ref>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771번째 줄: 750번째 줄:
|생월=8
|생월=8
|생일=18
|생일=18
|비고=<ref>2017년 1월 겨울이적시장에서 방출됨</ref>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782번째 줄: 760번째 줄:
|생월=1
|생월=1
|생일=18
|생일=18
}}
|비고=주장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6
|이름=더글라스 산투스
|로마자 이름=Douglas Santos
|포지션=수비수
|국적=브라질
|생년=1994
|생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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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7
|등번호=7
|이름=바비 우드
|이름=이보 일리체비치
|로마자 이름=Bobby Wood
|로마자 이름=Ivo Iličević
|포지션=공격수
|포지션=미드필더
|국적=미국
|국적=크로아티아
|생년=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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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11
|생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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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812번째 줄: 781번째 줄:
|생월=9
|생월=9
|생일=18
|생일=18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9
|이름=스벤 쉬플록
|로마자 이름=Sven Schipplock
|포지션=공격수
|국적=독일
|생년=1988
|생월=11
|생일=8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0
|등번호=10
|이름=피에르-미헬 라조가
|이름=피에르-미셸 라조가
|로마자 이름=Pierre-Michel Lasogga
|로마자 이름=Pierre-Michel Lasogga
|포지션=공격수
|포지션=공격수
825번째 줄: 804번째 줄: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1
|등번호=11
|이름=미하엘 그레고리취
|이름=이비차 올리치
|로마자 이름=Michael Gregoritsch
|로마자 이름=Ivica Olić
|포지션=공격수
|국적=크로아티아
|생년=1979
|생월=9
|생일=14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2
|이름=아흐메트 아슬란
|로마자 이름=Ahmet Arslan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미드필더
|국적=오스트리아
|국적=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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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94
|생월=4
|생월=3
|생일=18
|생일=30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845번째 줄: 834번째 줄: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5
|등번호=15
|이름=루카 발트슈미트
|이름=레네 아들러
|로마자 이름=Luca Waldschmidt
|로마자 이름=René Adler
|포지션=공격수
|포지션=골키퍼
|국적=독일
|국적=독일
|생년=1996
|생년=1985
|생월=5
|생월=1
|생일=19
|생일=15
}}
|비고=부주장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7
|이름=필립 코스티치
|로마자 이름=Filip Kostić
|포지션=미드필더
|국적=세르비아
|생년=1992
|생월=11
|생일=01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8
|등번호=16
|이름=바커리 야타
|이름=아르티옴스 루드네브스
|로마자 이름=Bakery Jatta
|로마자 이름=Artjoms Rudņevs
|포지션=공격수
|포지션=공격수
|국적=감비아
|국적=라트비아
|생년=1998
|생년=1988
|생월=6
|생월=1
|생일=6
|생일=13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19
|등번호=17
|이름=드렌 페카
|이름=졸탄 슈티버
|로마자 이름=Dren Feka
|로마자 이름=Zoltán Stieber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미드필더
|국적=독일
|국적=헝가리
|생년=1997
|생년=1988
|생월=6
|생월=10
|생일=9
|생일=16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895번째 줄: 875번째 줄: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21
|등번호=21
|이름=나빌 바후이
|이름=마르셀로 디아스
|로마자 이름=Nabil Bahoui
|로마자 이름=Marcelo Díaz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미드필더
|국적=스웨덴
|국적=칠레
|생년=1991
|생년=1986
|생월=2
|생월=12
|생일=5
|생일=30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915번째 줄: 895번째 줄: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23
|등번호=23
|이름=알렌 할릴로비치
|이름=미하엘 그레고리취
|로마자 이름=Alen Halilović
|로마자 이름=Michael Gregoritsch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미드필더
|국적=크로아티아
|국적=오스트리아
|생년=1996
|생년=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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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월=4
|생일=18
|생일=18
}}
}}
932번째 줄: 912번째 줄:
|생월=3
|생월=3
|생일=14
|생일=14
|비고=주장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25
|등번호=26
|이름=마츠 쾰러트
|이름=필립 뮐러
|로마자 이름=Mats Köhlert
|로마자 이름=Philipp Müller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공격수
|국적=독일
|국적=독일
|생년=1998
|생년=1995
|생월=5
|생월=3
|생일=2
|생일=3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976번째 줄: 955번째 줄: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1
|등번호=31
|이름=크리스티안 마테니아
|이름=로니 마르코스
|로마자 이름=Christian Mathenia
|로마자 이름=Ronny Marcos
|포지션=골키퍼
|포지션=수비수
|국적=독일
|국적=모잠비크
|생년=1992
|생년=1993
|생월=3
|생월=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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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1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2
|등번호=33
|이름=프랑크 론슈타트
|이름=바투한 알틴타쉬
|로마자 이름=Frank Ronstadt
|로마자 이름=Batuhan Altıntaş
|포지션=미드필더
|포지션=공격수
|국적=독일
|국적=터키
|생년=1997
|생년=1996
|생월=7
|생월=3
|생일=21
|생일=14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1,005번째 줄: 984번째 줄:
}}
}}
{{축구단 선수 명단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6
|등번호=39
|이름=톰 미켈
|로마자 이름=Tom Mickel
|포지션=골키퍼
|국적=독일
|생년=1989
|생월=4
|생일=19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7
|이름=서영재
|로마자 이름=Young-Jae Seo
|포지션=수비수
|국적=대한민국
|생년=1995
|생월=5
|생일=23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38
|이름=아쉬튼 괴츠
|이름=아쉬튼 괴츠
|로마자 이름=Ashton Götz
|로마자 이름=Ashton Götz
1,034번째 줄: 993번째 줄:
|생일=16
|생일=16
}}
}}
{{축구단 선수 명단
|등번호=40
|이름=고이코 카차르
|로마자 이름=Gojko Kačar
|포지션=미드필더
|국적=세르비아
|생년=1987
|생월=1
|생일=26
}}
}}
{{틀 끝}}
</div>




1,043번째 줄: 1,013번째 줄:
! 성명 !! 로마자 이름 !! 포지션 !! 생년월일 !! 임대 구단 !! 복귀일
! 성명 !! 로마자 이름 !! 포지션 !! 생년월일 !! 임대 구단 !! 복귀일
|-
|-
| 바투한 알틴타쉬 || Batuhan Altıntaş || 공격수 || 1996/03/14 || 카심파사 || 2017/06/30
| 케렘 데미르바이 || Kerem Demirbay || 미드필더 || 1993/07/03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2016/06/30
|-
|-
| 모하메드 과이다 || Mohamed Gouaida || 미드필더 || 1993/05/15 || FC 장크트 갈렌|| 2017/06/30
| 모하메드 과이다 || Mohamed Gouaida || 미드필더 || 1993/05/15 || 칼스루헤 SC|| 2016/06/30
|-
|-
| 아리아니트 페라티 || Arianit Ferati || 미드필더 || 1997/09/07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2017/06/30
| 마티 슈타인만 || Matti Steinmann || 미드필더 || 1995/01/08 || 켐니츠 FC || 2016/06/30
|-
| 스벤 쉬플록 || Sven Schipplock || 공격수 || 1988/11/08 || SV 다름슈타트 98 || 2017/06/30
|}
|}


1,059번째 줄: 1,027번째 줄:
! 직책 !! 성명 !! 로마자 이름 !! 생년월일
! 직책 !! 성명 !! 로마자 이름 !! 생년월일
|-
|-
| 감독 || 마르쿠스 기스돌 || Markus Gisdol || 1969/08/17
| 감독 || 브루노 라바디아 || Bruno Labbadia || 1966/02/08
|-
|-
| 코치 || 프랑크 프뢸링 || Frank Fröhling || 1978/02/15
| 코치 || 에르딘취 쇠제르 || Erdinç Sözer || 1968/07/11
|-
|-
| 코치 || 프랑크 카스파리 || Frank Kaspari || 1970/11/03
| 코치 || 베른하르트 트라레스 || Bernhard Trares || 1965/08/18
|-
|-
| 골키퍼 코치 || 슈테판 배흐터 || Stefan Wächter || 1978/04/20
| 골키퍼 코치 || 슈테판 배흐터 || Stefan Wächter || 1978/04/20
|-
| 선수 트레이너 || 마르쿠스 귄터 || Markus Günther || 1967/01/30
|-
|-
| 선수 트레이너 || 다니엘 뮈시히 || Daniel Müssig || 1982/03/05
| 선수 트레이너 || 다니엘 뮈시히 || Daniel Müssig || 1982/03/05
|-
|-
| 재활 트레이너 || 제바스티안 카펠 || Sebastian Capel || 1985/08/22
| 선수 트레이너 || 카르스텐 쉬네만 || Carsten Schünemann || 1968/12/13
|-
| 재활 트레이너 || 제바스티안 그뤼츠너 || Sebastian Grützner || 198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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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스 컵''' (1) : 2012
* '''피스 컵''' (1) : 2012
* '''노르트 컵''' (1)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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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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