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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解剖學) 실험용 두개골(頭蓋骨)이 분실되었을 때 일본인 교수 구보무(久保武)가 조선인 학생에게만 혐의(嫌疑)를 씌우고 민족성을 모욕한 망언(妄言)을 규탄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맹휴(盟休)를 단행하자 학생측과 학교측의 분규(紛糾)를 수습하기 위한 동창회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타결하여 등교를 실현시켰다. | 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解剖學) 실험용 두개골(頭蓋骨)이 분실되었을 때 일본인 교수 구보무(久保武)가 조선인 학생에게만 혐의(嫌疑)를 씌우고 민족성을 모욕한 망언(妄言)을 규탄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맹휴(盟休)를 단행하자 학생측과 학교측의 분규(紛糾)를 수습하기 위한 동창회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타결하여 등교를 실현시켰다. | ||
1921년 9월 '한국 인민은 글월을 태평양회의에 드림'이란 청원문에 조선노동공제회 대표로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문제를 계기로 상해파가 분열될 때 [[김명식 ( | 1921년 9월 '한국 인민은 글월을 태평양회의에 드림'이란 청원문에 조선노동공제회 대표로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문제를 계기로 상해파가 분열될 때 [[김명식 (1890)|김명식]]을 중심으로 한 신생활사(新生活社)에 참가했다. 같은 해 11월 잡지 <신생활>이 「러시아혁명 5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를 간행했는데, 여기에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과 자유노동조합취지서(自由勞動組合趣旨書)를 인쇄 배부한 것이 필화(筆禍)가 되어 일경에게 붙잡혔다. | ||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ref>[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15&evntId=0034974410&evntdowngbn=Y&indpnId=000000661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f> 1924년 7월 오르그뷰로 국내위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성(李成)과 접촉하였다. 10월에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 즈음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ref>[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15&evntId=0034974410&evntdowngbn=Y&indpnId=000000661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f> 1924년 7월 오르그뷰로 국내위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성(李成)과 접촉하였다. 10월에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 즈음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