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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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鎭熙. 호는 갑세(甲世), 필명은 무아(無我), 진희(眞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3년 2월 11일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예산의 사립학교인 배영학교에서 수학했고,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하여 1914년 졸업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여하고 편집부를 맡았으며, 그해 가을 사회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

1920년 10월에 발매된 <공제> 2호에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찰'을 발표하면서 노동 문제는 사회주의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주-소작인 관계를 노동자-자본가 관계로 등치시켜 소작운동을 농촌의 노동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1921년 3월 13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정기총회에서 대표 61인중 한명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고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 대표자회의’에 국내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 내지간부로 선임되고, 기관지부를 담당하였다.

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解剖學) 실험용 두개골(頭蓋骨)이 분실되었을 때 일본인 교수 구보무(久保武)가 조선인 학생에게만 혐의(嫌疑)를 씌우고 민족성을 모욕한 망언(妄言)을 규탄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맹휴(盟休)를 단행하자 학생측과 학교측의 분규(紛糾)를 수습하기 위한 동창회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타결하여 등교를 실현시켰다.

1921년 9월 '한국 인민은 글월을 태평양회의에 드림'이란 청원문에 조선노동공제회 대표로 서명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문제를 계기로 상해파가 분열될 때 김명식을 중심으로 한 신생활사(新生活社)에 참가했다. 같은 해 11월 잡지 <신생활>이 「러시아혁명 5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를 간행했는데, 여기에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과 자유노동조합취지서(自由勞動組合趣旨書)를 인쇄 배부한 것이 필화(筆禍)가 되어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1] 1924년 7월 오르그뷰로 국내위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성(李成)과 접촉하였다. 10월에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 즈음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15일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표방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대표기관으로 신간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정책 타도와 총독정치 배격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에 뜻을 접은 그는 1932년 잡지 '신계단' 발행 겸 편집인이 되었다. 1월 신계단 기자 남만희(南萬熙)가 쓴 「종교시평」이 빌미가 되어 천도교도에게 폭행을 당하였다. 그 직후 <천도교 정체 비판 폭로회> 결성대회에 참여해 반천도교 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우파 계열인 조선민족당 발기에 참가했고, 9월에는 한국민주당 조사부 부장이 되었다. 1946년 5월 한민당 사회문제대책 분과위원회 위원, 10월 한민당 중앙상무집행위원을 지냈다. 12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47년 1월에는 신탁통치반대결의안에 서명하였다.

1949년 8월 31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유진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