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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30일]],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며 총리가 된 히틀러는 취임 직후부터 공공연히 수권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수권법 주장은 나치만이 아니라 좌파를 경계하던 보수 우파 연립여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당수이며 연립내각에 경제장관으로 입각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도 적극 동의하던 내용이었다. 후겐베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 및 [[독일 공산당]]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수권법을 갖고, 히틀러를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오판으로 이를 지지한 것이다.<ref>히틀러는 우리에게 포위당했다. - [[1933년#1월|1933년 1월]] 말,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ref> | [[1933년]] [[1월 30일]],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며 총리가 된 히틀러는 취임 직후부터 공공연히 수권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수권법 주장은 나치만이 아니라 좌파를 경계하던 보수 우파 연립여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당수이며 연립내각에 경제장관으로 입각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도 적극 동의하던 내용이었다. 후겐베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 및 [[독일 공산당]]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수권법을 갖고, 히틀러를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오판으로 이를 지지한 것이다.<ref>히틀러는 우리에게 포위당했다. - [[1933년#1월|1933년 1월]] 말,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ref> | ||
뒤이어 [[2월 27일]] [[제국의사당 방화]] | 뒤이어 [[2월 27일]]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물만난 고기가 된 히틀러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강력하게 탄압하며 [[3월 5일]] 총선거를 맞이했고 43.9%의 압도적 득표율로 288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확고부동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희망하는 수권법 통과를 의해서는 의회 의석의 2/3 이상의 출석, 다시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연립여당인 후겐베르크의 독일 국가인민당이 52석에 불과해 두 당을 합쳐도 340석에 그쳤던 것이다. | ||
== 악마와의 야합과 편법 동원 == | == 악마와의 야합과 편법 동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