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권법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의회 민주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악마에게 권력을 바치며 종말을 맞이하다.

아무리 뛰어나고 선진적인 헌법과 법률, 제도라 하더라도 악의적으로 이용되면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법.

영어로는 1933년에 제정된 전권 위임법이라 하여 Enabling Act of 1933라 하고, 이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1933년 전권위임법이 된다. 하지만 국내에는 수권법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기를 제거하기 위한 법(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인데, 정작 독일 민족과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히틀러와 나치였으니 아이러니한 법률명이라 할 수 있다.

법리적 근거[편집 | 원본 편집]

놀랍게도 수권법에 대한 법리적 근거는 바이마르 헌법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영어 위키피디아) 비록 이것이 수권법 통과의 법률적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헌법적 근거 자체는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말 그대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할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국가위기상황에서나 쓰라고 만든 조항인데,[1] 히틀러는 공산혁명의 위협을 언급하며 수권법을 꺼내든 것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33년 1월 30일,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며 총리가 된 히틀러는 취임 직후부터 공공연히 수권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수권법 주장은 나치만이 아니라 좌파를 경계하던 보수 우파 연립여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당수이며 연립내각에 경제장관으로 입각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도 적극 동의하던 내용이었다. 후겐베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수권법을 갖고, 히틀러를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오판으로 이를 지지한 것이다.[2]

뒤이어 2월 27일 제국의사당 방화로 물만난 고기가 된 히틀러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강력하게 탄압하며 3월 5일 총선거를 맞이했고 43.9%의 압도적 득표율로 288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확고부동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희망하는 수권법 통과를 의해서는 의회 의석의 2/3 이상의 출석, 다시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연립여당인 후겐베르크의 독일 국가인민당이 52석에 불과해 두 당을 합쳐도 340석에 그쳤던 것이다.

악마와의 야합과 편법 동원[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가 선택한 방법은 공산당의 배제였다. 독일 공산당은 당시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의 주동으로 몰려 대대적 탄압을 받고 있었음에도 3월 5일 총선거에서 12.3%를 득표, 81석을 획득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공산당을 배제해서 2/3 계산에 있어 필요한 의원정족수 자체를 줄여버리려고 한 것이다. 당시 의원정족수는 647석으로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필요 2/3 의석수는 432석인데 공산당을 제외하면 정족수 566석에 필요의석수 378석으로 줄어든다. 물론 여전히 나치가 확보한 340석으로는 미달하지만 이를 만회할 방법은 후술한다.

당시 나치가 직면한 문제는 수권법의 법리적 근거가 되는 바이마르 헌법 제76조 1항의 돌파였다. 해당 조항에서 제국의회 재적의원의 2/3 이상 출석과, 출석 의원의 2/3 이상 찬성을 요구하고 있는데 나치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제국의회 의사규칙 개정령을 제출, 통과받는다. 개정된 의사규칙은 제국의회 의장은 무단결원한 의원을 불출석이 아닌 출석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며, 당시 제국의회 의장은 원내 1당인 나치의 헤르만 괴링이니 이런 편법은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되었다. 이 의사규칙 개정령으로 나치는 공산당 의원 81석을 출석으로 간주 후 투표에서 기권하는 방식으로 헌법 조항의 2/3 이상 출석 단서를 상당히 간단하게 무력화시킨다.[3]

일단 2/3 이상 출석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 나치였지만 그 다음 문제는 2/3 이상의 찬성표였다. 나치에게는 아직 38석의 의석이 필요했는데, 당시 독일 제1야당인 독일 사회민주당(120석)은 수권법에 결사반대하고 있었고 히틀러도 연대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신 히틀러는 파펜의 소속 정당이며 여야 합쳐 원내 4당이던 카톨릭 중앙당(73석)을 회유하고자 했다. 카톨릭 중앙당은 수권법에 의해 통과된 법률을 심의하는 소위원회 설치와 카톨릭 교회의 지위 보장을 요구했고 히틀러가 이를 약속하면서 2/3 의석도 확보하기에 이른다.

수권법 통과[편집 | 원본 편집]

3월 23일 의회에서 열린 수권법 찬반투표에는 총 647명의 제적의원 중 53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공산당 의원은 전원 체포, 구금 및 나치의 추적을 피하느냐 도피 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고하지만 법률적으로 출석했다고 한다. 사사오입은 애들 장난이다 사회민주당 역시 소속의원 120명 중 공산당과 같은 이유로 26명이 불출석역시 법률적으로 출석이란다.하여 94인만이 출석했다.

수권법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당수 오토 벨스(Otto Wels)는 다음과 같은 반대연설을 한다.

우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성과 정의, 자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힌다. 전권위임법(수권법)이 당신들에게 영원 불멸의 이념을 없앨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한다. … 또한 독일 사민당은 이 박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제국 내의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러분의 의연함과 충직함은 존경받을 만하다. 여러분들의 확신에 찬 용기, 끊임없는 확신은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4]

이에 히틀러는 즉시 찬성연설로 맞받아치며 사회민주당은 이 법안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며 비판하고, 절대 의회를 무시하지 않으며 수권법 통과 이후에도 의회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하고존중하긴 했다. 의회 의원이 전원 나치당으로 바뀔 뿐이지 사실 자기당 의원들도 개무시했기 때문에 존중한 것도 아니다 수권법으로 국가를 보다 튼튼히 만들고 경제와 사회질서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투표에서 총 535명의 의원이 참석하여 찬성 441명, 반대 94명으로 수권법은 압도적 찬성 속에 통과되었다. 공산당 및 사회민주당의 불출석인원 전원이 출석해서 반대투표를 했을 경우 2/3 이상 찬성인 432석을 받아야 하는데 최종적으로 그 이상의 찬성표를 받아낸 것이다! 이는 카톨릭 중앙당의 찬성 외에도 바이에른 인민당, 국가당과 같은 초미니 군소정당들도 온갖 회유와 협박 속에 모조리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일 제국의회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의회정치를 스스로 종식시켰다.

유일하게 반대투표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하며 국내 활동이 중단되었다. [5]다른 정당들은 온갖 협박 속에 하나둘 강제로 해산당하거나 나치에 흡수되며 같은 해 7월에 나치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소멸했고, 뒤이어 수권법에 의해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금지하는 법률이 생성되며 나치 1당 독재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한편, 바이마르 공화국 최후의 민주적 총리라 불리는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6]도 소속당인 카톨릭 중앙당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브뤼닝은 이후 나치의 독재가 본격화되자 해외로 망명하였고, 1970년 죽을 때까지 수권법에 찬성 투표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법률 내용[편집 | 원본 편집]

법률 내용은 참 간단하며 5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조 제국법은 헌법에 정해진 절차 이외에 제국 정부에 의해서도 제정될 수 있다. 이는 제국 헌법 제85조 2항 및 87조에 규정된 법률[7]에도 적용된다.
  • 제2조 제국 정부가 제정하는 법률은 동법이 제국의회와 제국참의원의 조직에 관하여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제국 헌법에 합치하지 않을 수 있다. 제국 대통령의 권한에는 변함이 없다.
  • 제3조 제국 정부에 의해서 제정되는 법률은 제국 수상이 제정하고 제국 내각이 이를 공포한다. 동 법률은 다른 규정이 없는 한 공포 당일, 그 효력이 발생한다. 제국 헌법 제68조에서 제77조의 조항[8]은 제국 정부가 제정하는 법률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 제4조 제국이 제국 법률에 영향을 주는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입법에 참여하는 기관의 동의를 요하지 않는다. 제국 정부는 동 조약의 시행에 필요한 명령을 제정한다.
  • 제5조 본 법은 공포 당일에 시행한다. 본 법은 1937년 4월 1일 또는 현 제국 정부가 다른 정부로 변경될 때 그 효력을 상실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제1조는 기존 내각이나 총리가 부여받은 긴급명령권이 아닌 정규 입법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로서 독일의 행정부(와 총리 히틀러)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입법권을 갖게 되었다.

제2조는 수권법에 의거해 입법된 법률은 헌법에 어긋나더라도 상관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으면서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그를 지지하는 보수 정파의 지지를 받아냈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죽은 후 히틀러가 대통령직을 겸직, 총통이 되면서 히틀러의 독재권력에 도전할 세력은 사라지게 된다.

제3조는 행정부에 주어지는 입법권을 히틀러 개인에게 부여했음을 명시하며, 국가 예산의 자유로운 사용을 허가한 것이다.

제4조는 히틀러에게 자유로운 외교적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제5조는 수권법의 시한 설정을 요구한 카톨릭 중앙당 등 보수정파를 속이기 위한 문구이다. 실제로는 1937년이 되기도 전에 나머지 정당이 모두 사라져서 무의미한 조항이 되었다. 그래도 형식상 1937년 1월 1차 연장, 1939년 1월에 2차 연장, 1943년 5월에 총통령으로 무기한 연장되었다. 1945년 9월 20일, 연합국 관리위원회에 의해 폐지되었다.[9]

각주

  1. 예를 들어 1940년 노르웨이 의회는 독일군의 침략으로 수도 오슬로가 함락되자 국왕 일가와 정부에 의회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항전을 부탁한 뒤 자진해산한 적이 있다. 이처럼 국가위기상황에서 일시적인 삼권분립의 중단을 인정하는 국가와 헌법은 비교적 많다.
  2. 히틀러는 우리에게 포위당했다. - 1933년 1월 말,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
  3. 수권법을 통한 바이마르 제국 헌법의 폐지 - 수권법 통과 제75주년을 맞이하면서. Dr. Christian Bickenbach.(2008) 조영주 번역(2009). 연세 공공거버넌스와 법 제1권 제2호(2010. 8월호) 255~279p 수록분
  4. 나무위키 수권법 항목 원 출처는 에러메시지로 확인 안됨.
  5. 사민당원이던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노르웨이로 망명한것도 이즈음..
  6. 브뤼닝 내각은 의회 내각이 아닌 대통령 명령에 의한 대통령 내각이었지만 정치공작으로 가득찬 후임 파펜 및 슐라이허 내각과 달리 어떻게든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민주주의 내각이었다.
  7. 적자예산 편성권에 관련된 법률
  8. 입법권과 관련된 조문
  9. 수권법을 통한 바이마르 제국 헌법의 폐지 - 수권법 통과 제75주년을 맞이하면서. Dr. Christian Bickenbach.(2008) 조영주 번역(2009). 연세 공공거버넌스와 법 제1권 제2호(2010. 8월호) 2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