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s. BC 247 ~ BC 183

군사 전술의 아버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고대 카르타고 출신의 천재 전술가. 서양 군사전술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 가능성을 발견했던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성한 천재 전술가. 고대사 최고의 명장을 꼽으라면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

생애[편집 | 원본 편집]

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 이전[편집 | 원본 편집]

한니발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로마의 도시 사군툼을 한니발이 공격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 한니발은 로마와의 정면 승부를 원했지만, 정쟁에 찌든 본국의 도움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모은 4만의 병사와 갈리아 용병들, 그리고 로마 동맹시들의 도움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해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다. 시민군 체제의 로마에서 이 당시 징집 대상에 해당하는 시민의 수는 75만이었다. 한니발의 병력은 긴 원정길 중간의 이탈로 인해 2만 5천여 병력으로 줄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는 본토에 들어온 2만 5천밖에 안 되는 한니발 부대를 도무지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이정도 병력이면 격파 하겠지 싶어 보낸 군대가 격파당하고, '어쭈 제법 하는데' 싶어 더 많은 군대를 보내면 그것도 격파당하고, 참다참다 못해 8만의 병력을 동원한 칸나에 전투에서는 참전한 8만 대군 가운데 5만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패배를 당한다. 이 전투의 파장은 엄청났는데,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의 동맹도시 가운데 (이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전체를 직할로 다스리는 체제가 아니라 로마 내의 도시는 로마의 동맹시와 직할 식민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한니발 쪽에 붙는 동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마는 전략을 전면 수정한다. 지구전법늘 주장한 파비우스의 견해를 따라 한니발과의 평원에서의 대규모 회전은 절대 피하고, 도시를 기반으로 굳건히 방어하며, 한니발이 없는 곳에서의 싸움은 적극적으로 거는 소모전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마르켈루스라는 걸출한 인물은 한니발과의 회전은 피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추격전과 유격전을 통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며 한니발을 괴롭힌다. 지구전법 채택 이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한번도 패하지는 않았지만 이전과 같은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지속적인 소모를 강요당하는 형국이 되자 결굴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국과, 자신의 근거지인 이베리아 식민지에서의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국론이 사분오열되어 있던 카르타고도 한니발의 어마어마한 전과에 고무되어 병력 지원을 승낙하고, 한니발의 영지인 이베리아에서도 한니발에 대한 구원 병력이 출발한다.

스키피오의 등장[편집 | 원본 편집]

한니발의 가장 큰 불운은 자신을 제외한 카르타고의 그 어느 장수도 다른 평범한 로마 장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로마 역사상 최고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출중한 언변과 잘생긴 외모, 로마 최고의 명문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젊은 청년 스키피오는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고 한니발을 향한 원군이 이베리아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이베리아에 가서 한니발의 근거지를 소탕하겠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경과는 스키피오 항목 참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동생이 알프스를 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그리고 이 때문에 무지하게 까였지만) 이베리아의 한니발 세력을 모두 소탕한다. 이때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서 배운 망치와 모루 작전을 통한 섬멸전을 적극 활용하여 한니발의 근거지를 박살내고 이어 역으로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소모전을 강요당하고 원군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립당하던 한니발은 본국마저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 본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한다.

자마 전투[편집 | 원본 편집]

한니발은 전쟁에 더이상의 승산은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자신이 스키피오의 원정군을 꺾더라도 카르타고는 이베리아를 잃었고, 로마를 재침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고국의 운명을 건 모험을 하기보다는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스키피오 또한 강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승리가 분명한 전쟁인데 굳이 전술의 천재 한니발과의 회전을 통한 모험을 하러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강화 사절로 카르타고에 온 로마 원로원 의원을 카르타고 의회에서 제멋대로 죽여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한니발은 서둘러 카르타고는 더 이상의 전쟁 의사가 없음을 알리러 스키피오를 직접 만나 회담을 하지만 스키피오는 자신 또한 강화를 원했지만 사절단을 죽인 적과 협상을 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거절한다. 그리하여 고대사 최고 명장 둘은 자마 회전에서 운명의 대결을 펼친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하는 기병 전략은 스키피오가 우세했으나 전체 병력의 수는 한니발이 우세했고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를 지원받았다. 기병 전력은 측면에서 대결하고 보병은 중원에서 맞붙는 가운데 보병 대결은 한니발의 우세, 기병 대결은 스키피오의 우세였다. 승부는 스키피오의 보병 대열이 무너지기 전에 기병 전력이 한니발의 측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 그리고 스키피오의 보병이 절체 절명의 위기에 달한 상황에서 극적인 기병대의 합류로 결국 스키피오의 완승으로 전투는 마무리된다.

고대사 전투의 사상자 대부분은 대규모 병력의 전열이 무너진 이후에 발생하고 그 전에는 크게 발생하지 않기에 사상자 수로 따지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압승이자 완승.

전쟁 이후와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를 적대하는 오리엔트 군주들에게 몸을 의탁하지만 한니발이 적대국가에 있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다가 독배를 마시고 자살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긴 했지만 전쟁사 연구가들 대다수는 한니발이 스키피오보다 더 위대한 장군이었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로마 시대 역사가의 평가마저 그러했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착안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지만 한니발은 이를 체계화하고 정형화된 전술로서 이를 확립했다. 현대전 교리에서도 병법의 기초로서 학습되는 전술을 확립했다는 점은 생각보다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전략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깽판를 쳐서 로마 연합을 붕괴시키려는 그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자마 이전의 전투에서 진 적이 없으면서도 전투를 통한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한니발과는 달리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본진을 박살내서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낸다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한니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한니발의 전략은 최선이었지만 이를 방어하는 로마의 체제는 워낙 굳건한 데 반해 카르타고 본국은 이를 뒷받침할 역량이 부족해서 그야말로 '줘도 못먹는' 상황이었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지휘하지 않은 나머지 전투 대부분에서 로마가 압승을 거두었기에, 카르타고가 반타작만 해줬더라도 한니발이 허무하게 빈손으로 이탈리아를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