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편집을 검사

편집 필터 둘러보기 (처음 | 최근 필터의 바뀜 | 과거의 편집 검토하기 | 편집 필터 기록)

This page allows you to examine the variables generated by the Abuse Filter for an individual change.

이 편집에 대해 생성된 변수

변수
사용자의 편집 수 (user_editcount)
2
사용자 계정 이름 (user_name)
'Asulb'
사용자 계정 만든 후 지난 시간 (user_age)
2704309
사용자 권한 그룹 (자동으로 부여된 권한 포함) (user_groups)
[ 0 => '*', 1 => 'user' ]
문서 ID (page_id)
0
문서 이름공간 (page_namespace)
0
(이름공간을 뺀) 문서 제목 (page_title)
'윤일선'
전체 문서 제목 (page_prefixedtitle)
'윤일선'
동작 (action)
'edit'
편집 요약/이유 (summary)
'윤일선의 생애와 평가'
이전 콘텐츠 모델 (old_content_model)
''
새 콘텐츠 모델 (new_content_model)
'wikitext'
편집 전 과거 문서의 위키텍스트 (old_wikitext)
''
편집 후 새 문서의 위키텍스트 (new_wikitext)
'[[파일:Search.pstatic.jpg|섬네일|윤일선]] == 윤일선 == ====== 개요 ====== 윤일선(尹日善,1896년 10월 5일 ~ 1987 6월 22일)은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한국인 최초의 정식교육을 받은 해부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일본 도쿄 출신이며 본관은 해평 윤씨이고 아호는 동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병리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계를 태동시킨 학자이다.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 생애 ======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개화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귀국하여 1915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키야마의 제 6고등학교 의예과,1923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고 졸업한 뒤 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독일 비르효의 초기 제자로 일본 병리학을 일으킨 후지나미 교수를 사사했으며 그의 지도로 한국인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그는 동대학교 병리학교실의 조수, 1928년 조교수가 되아 강의와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활발한 논문활동과 더불어 한국의 질병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9년 교토제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5년까지 17년간 후학들을 지도하고, 암,내분비,알레르기에 과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미영타도 대강대회'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대한병리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서울대학교 의과 대학교수,1948년 대한의학협회 회장, 1952년 대한민국 학술원 출범에 참여하여 회원이 되고 1954년 대학민국 학술원 회상으로 선출, 1956년 서울대학교 제 6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5년 3개월 간 최장수 총장으로 직무를 수행하신 뒤 1961년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그는 해방 후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조사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서 해방된 우리나라의 학문을 처음으로 세계 문헌에 등록하였다. 1963년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으로 도입되자 그는 원자력 병원의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고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자력 병원장에 선출 된 뒤 원자력 내 방사지농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1964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총회 한국대표로 다녀왔으며 1965년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또 한번 총회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다녀왔다. 1966년 원자력병원장에 재선되었다. 1972년 한국과학진흥재단 고문, 연암문화재단 이사, 한국아동재단 이사에 위촉되었다. 그 후 유네스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원자력병원장, 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거쳐 1980년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학술원상과 문화 훈장, 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1986년 2월 인간상록수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국 의학계의 태두라는 평가를 받았다. 만년에는 백내장 수술과 난청을 앓았다. 1987년 6월 22일 오전 10시경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셨다. ====== 저서 및 논문 ====== <논문> -인체내분비에 관한 연구 -면역체 -한국인의 암에 대한 통계학적 연구 -안드라퀴논을 투여한 토끼의 위암 -필로칼핀 및 고환이식애 관한 연구 -호르몬과 아나필락사의 관계 -조직의 과민성변화에 관한 실험적 연구 <저서> -윤일선박사화갑기념논문집 등 여러가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셨다. ====== 평가 ====== 일제강점기에 병리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국 병리학의 탄생과 발전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사협회 등 의사단체에서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의 창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방 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서울대학교 출범 과정에서 경성대학 의학부장으로 제 역할을 다했고, 서울대학교 발족 후에는 대학원장과 총장으로서 초창기 서울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인격이 결여된 자는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일생 동안 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근대의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대학자이며 학식과 인격을 갖춘 대학행정가였다. 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때 미영타도 대강연회의 연사로 참가한 점을 들여 비판하는 자들도 존재한다.'
편집 전후의 차이 (edit_diff)
'@@ -1,0 +1,36 @@ +[[파일:Search.pstatic.jpg|섬네일|윤일선]] + +== 윤일선 == + +====== 개요 ====== +윤일선(尹日善,1896년 10월 5일 ~ 1987 6월 22일)은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한국인 최초의 정식교육을 받은 해부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일본 도쿄 출신이며 본관은 해평 윤씨이고 아호는 동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병리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계를 태동시킨 학자이다.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 +====== 생애 ======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개화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귀국하여 1915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키야마의 제 6고등학교 의예과,1923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고 졸업한 뒤 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독일 비르효의 초기 제자로 일본 병리학을 일으킨 후지나미 교수를 사사했으며 그의 지도로 한국인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그는 동대학교 병리학교실의 조수, 1928년 조교수가 되아 강의와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활발한 논문활동과 더불어 한국의 질병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9년 교토제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5년까지 17년간 후학들을 지도하고, 암,내분비,알레르기에 과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미영타도 대강대회'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대한병리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서울대학교 의과 대학교수,1948년 대한의학협회 회장, 1952년 대한민국 학술원 출범에 참여하여 회원이 되고 1954년 대학민국 학술원 회상으로 선출, 1956년 서울대학교 제 6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5년 3개월 간 최장수 총장으로 직무를 수행하신 뒤 1961년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그는 해방 후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조사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서 해방된 우리나라의 학문을 처음으로 세계 문헌에 등록하였다. 1963년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으로 도입되자 그는 원자력 병원의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고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자력 병원장에 선출 된 뒤 원자력 내 방사지농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1964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총회 한국대표로 다녀왔으며 1965년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또 한번 총회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다녀왔다. 1966년 원자력병원장에 재선되었다. 1972년 한국과학진흥재단 고문, 연암문화재단 이사, 한국아동재단 이사에 위촉되었다. 그 후 유네스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원자력병원장, 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거쳐 1980년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학술원상과 문화 훈장, 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1986년 2월 인간상록수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국 의학계의 태두라는 평가를 받았다. 만년에는 백내장 수술과 난청을 앓았다. 1987년 6월 22일 오전 10시경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셨다. + +====== 저서 및 논문 ====== +<논문> + +-인체내분비에 관한 연구 + +-면역체 + +-한국인의 암에 대한 통계학적 연구 + +-안드라퀴논을 투여한 토끼의 위암 + +-필로칼핀 및 고환이식애 관한 연구 + +-호르몬과 아나필락사의 관계 + +-조직의 과민성변화에 관한 실험적 연구 + + +<저서> + +-윤일선박사화갑기념논문집 + +등 여러가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셨다. + +====== 평가 ====== +일제강점기에 병리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국 병리학의 탄생과 발전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사협회 등 의사단체에서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의 창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방 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서울대학교 출범 과정에서 경성대학 의학부장으로 제 역할을 다했고, 서울대학교 발족 후에는 대학원장과 총장으로서 초창기 서울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인격이 결여된 자는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일생 동안 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근대의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대학자이며 학식과 인격을 갖춘 대학행정가였다. 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때 미영타도 대강연회의 연사로 참가한 점을 들여 비판하는 자들도 존재한다. '
새 문서 크기 (new_size)
4988
이전 문서 크기 (old_size)
0
편집에서의 문서 크기 변화 (edit_delta)
4988
편집 중 추가된 줄 (added_lines)
[ 0 => '[[파일:Search.pstatic.jpg|섬네일|윤일선]]', 1 => '', 2 => '== 윤일선 ==', 3 => '', 4 => '====== 개요 ======', 5 => '윤일선(尹日善,1896년 10월 5일 ~ 1987 6월 22일)은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한국인 최초의 정식교육을 받은 해부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일본 도쿄 출신이며 본관은 해평 윤씨이고 아호는 동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병리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계를 태동시킨 학자이다.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6 => '', 7 => '====== 생애 ======', 8 =>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개화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귀국하여 1915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키야마의 제 6고등학교 의예과,1923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고 졸업한 뒤 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독일 비르효의 초기 제자로 일본 병리학을 일으킨 후지나미 교수를 사사했으며 그의 지도로 한국인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그는 동대학교 병리학교실의 조수, 1928년 조교수가 되아 강의와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활발한 논문활동과 더불어 한국의 질병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9년 교토제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5년까지 17년간 후학들을 지도하고, 암,내분비,알레르기에 과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미영타도 대강대회'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대한병리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서울대학교 의과 대학교수,1948년 대한의학협회 회장, 1952년 대한민국 학술원 출범에 참여하여 회원이 되고 1954년 대학민국 학술원 회상으로 선출, 1956년 서울대학교 제 6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5년 3개월 간 최장수 총장으로 직무를 수행하신 뒤 1961년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그는 해방 후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조사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서 해방된 우리나라의 학문을 처음으로 세계 문헌에 등록하였다. 1963년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으로 도입되자 그는 원자력 병원의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고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자력 병원장에 선출 된 뒤 원자력 내 방사지농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1964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총회 한국대표로 다녀왔으며 1965년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또 한번 총회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다녀왔다. 1966년 원자력병원장에 재선되었다. 1972년 한국과학진흥재단 고문, 연암문화재단 이사, 한국아동재단 이사에 위촉되었다. 그 후 유네스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원자력병원장, 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거쳐 1980년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학술원상과 문화 훈장, 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1986년 2월 인간상록수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국 의학계의 태두라는 평가를 받았다. 만년에는 백내장 수술과 난청을 앓았다. 1987년 6월 22일 오전 10시경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셨다.', 9 => '', 10 => '====== 저서 및 논문 ======', 11 => '<논문>', 12 => '', 13 => '-인체내분비에 관한 연구', 14 => '', 15 => '-면역체', 16 => '', 17 => '-한국인의 암에 대한 통계학적 연구', 18 => '', 19 => '-안드라퀴논을 투여한 토끼의 위암', 20 => '', 21 => '-필로칼핀 및 고환이식애 관한 연구', 22 => '', 23 => '-호르몬과 아나필락사의 관계', 24 => '', 25 => '-조직의 과민성변화에 관한 실험적 연구', 26 => '', 27 => '', 28 => '<저서>', 29 => '', 30 => '-윤일선박사화갑기념논문집', 31 => '', 32 => '등 여러가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셨다.', 33 => '', 34 => '====== 평가 ======', 35 => '일제강점기에 병리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국 병리학의 탄생과 발전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사협회 등 의사단체에서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의 창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방 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서울대학교 출범 과정에서 경성대학 의학부장으로 제 역할을 다했고, 서울대학교 발족 후에는 대학원장과 총장으로서 초창기 서울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인격이 결여된 자는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일생 동안 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근대의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대학자이며 학식과 인격을 갖춘 대학행정가였다. 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때 미영타도 대강연회의 연사로 참가한 점을 들여 비판하는 자들도 존재한다.' ]
편집이 토르 끝 노드를 통해 바뀌었는 지의 여부 (tor_exit_node)
false
바뀐 시점의 유닉스 시간 기록 (timestamp)
'1700833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