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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7일 (화) 20:52: KJS615 (토론 | 기여)님이 제1공화국 (대한민국)에서 "edit" 동작을 수행하여 필터 0이(가) 작동했습니다. 조치: 태그; 필터 설명: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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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중}}
#넘겨주기 [[제1공화국]]
==개요==
제1공화국은 {{날짜/출력|1948-7-17}} 제헌헌법이 공표되면서 시작했다.<ref>제헌 국회는 {{날짜/출력|1948-5-10}} 선거로 뽑혔으니 엄밀히 말해 제1공화국 때 일어난 것은 아니다.</ref> 중요 사건으로는 6·25 전쟁과 [[4·19 혁명]]이 있다.
==사건==
===농지개혁법===
{{본문|농지개혁법}}
{{날짜/출력|1949-06-21}}에 제정된 법안. [[1949년]]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토지를 배분한다. 이에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며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실질적인 시행은 [[1950년]] 5월에 이루어진다.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형식으로. 지주들에게 시가증권을 주어 토지를 매수한 후<ref>후에 6·25전쟁으로 휴지조각이 된다.</ref> 이를 유상분배했다. 유상분배의 경우 5년간 30%를 낸 후 온전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6·25 전쟁===
{{본문|6·25 전쟁}}
{{날짜/출력|1950-6-25}} 북한은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였고, 곧 서울을 거의 저항 하나 없이 북한에게 내준다. 이로 인해 많은 남한의 인사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고, 결국 [[8월 12일]]즈음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기살기로 버텼다.
 
곧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던 순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확 기울었고, 남한군과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해 곧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에는 북한의 수비를 뚫고 [[평양직할시|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한 주도의 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본 [[중국]]은 [[10월 25일]] 북한 측에 참여하였고, [[11월]] 중순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의 다시 북한 측으로 넘어갔고, 해를 지나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다시 북한이 점령한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화성시|화성]]-[[여주시|여주]]-[[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를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연합군 측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여 서울을 수복하였고, [[6월]] 즈음부터는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한국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리셋시켰다. 그나마 있던 남한의 산업은 거의 다 갈아엎어졌고, 피난으로 대이동이 일어나 기존의 양반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확실하게 없앴으며, 또한 지방 유지들과 실권자들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존 사회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대거 사형, 실종, 또는 전사하면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3·15 부정선거===
{{본문|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집권세력인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비록 입지가 많이 낮아졌어도 당선은 무난할 것 같았다. 심지어 경쟁자인 민주당 조병옥은 선거 한 달 전 병사한다. 하지만 부통령 선거의 경우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인 장면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당시 자유당은 늙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을 중심으로 내각이 운영되었다.
 
1960년 3월의 부통령 선거 때 이기붕의 세력은 부정선거를 할 생각을 한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이끌던 권위주의체제에서 중앙의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내집단은 지방조직을 통제함으로 공무원, 경찰, 유권자를 선거에 동원할 수 있었다. 부정선거의 기획자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이 부정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가 생겼다. 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게 한다.{{ㅊ|뭣이}} 이에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 아주 대놓고 부정선거를 한다. 농촌의 주민들에게 3인조 공개투표를 강요하였고, 군대에선 이승만을 찍은 사람이 120%{{ㅊ|120%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지}}, 또한 득표율은 당연히 조작되었다. 발표된 결과는 이승만 89%, 이기붕 79%였다. 특히 이기붕은 883만 대 184만으로 장면을 압도하는 수치였다. 이에 격분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니...
===4·19 혁명===
{{본문|4·19 혁명}}
부정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한다. 경찰은 시신을 바다에 버렸는데, [[4월 11일]] 시신이 발견된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데모를 벌이면서 재선거를 요구한다.
 
그 다음날인 19일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시위에 동참하고, 오후에 국회의사당 앞의 시위대 2000여 명이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향한다.  이에 경찰은 발포하고 21명이 사망, 172명이 부상당한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합세하고, 서울 전체에서 시위대의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이날 오후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군이 들어선다. 이 계엄사령부의 발표에서 이날 사망한 민간인은 111명, 경찰은 4명이었다. 부상자는 민간인에서 558명, 경찰은 169명이었다.
 
20일에 계엄령 때문에 서울은 일단 멈추었지만 대구나 인천, 전주 등에서는 학생 데모가 계속됐다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날 오후 27개 대학 285명의 교수들은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 다음날인 26일 시위하는 군중들이 다시 서울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며, 이들이 경무대로 갈 때 그 수가 이미 10만을 넘었다. 이에 이승만이
{{인용문|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이승만}}
라는 성명을 발표,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27일 경무대를 떠나 사저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가게 된다. 이승만은 다시 귀국할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결국 귀국하지 못하며 [[1965년]]에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한다.
====4·19 혁명의 의의====
4·19 혁명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민이 봉기하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다.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는 신분제 사회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세금만 냈지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서야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었다. 이 국민이 일어나 정부를 무너뜨린 4·19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민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제1공화국의 영향==
===긍정적인 면===
일단 외교는 잘했다. 이는 무시못할 외교 감각을 지닌 [[이승만]]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문서를 자세히 보면 알수 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는 이승만의 외교력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6·25전쟁 때도 작전권을 국군에서 UN군사령부로 확실하게 넘겨버려서 미군과 UN군이 6·25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은 아예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온갖 정치적 수단을 사용해 대한민국이 서방 자본주의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생국 대항민국은 나라의 보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거지 미국에 무조건적인 친미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공포로 석방해서 미국 빡치게 하는 짓은 왜 했다는 것인가? 또한 이승만이 고른 인사중에 친일 행위를 한 적적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이승만 본인은 일본을 극히 혐호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일본군도 한반도에 상륙시키려 하자, '''북한군 죽이기 전에 일본군부터 죽일 것'''이라며 반대한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공산주의가 절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농지개혁법]]을 제정한다. 농지개혁법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의 토지배분 선전에 농민들이 공산군에 편붙는 것을 막았다. 농지개혁법은 한국민주당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한다.
===부정적인 면===
아무리 좋은 점이 있어도 잘못한 점이 너무 많아서 이것이 묻혀버린다. 일부 지식인들이 이승만의 업적을 재평가하며 이러한 잘못에 면벌부를 요구하나 잘한 건 잘한 거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다.
 
우선 6·25 전쟁에서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며 생업에 종사하라더니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린다. 다만 전쟁의 책임을 제1공화국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6·25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지 제1공화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고 그곳에서도 [[발췌개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는 등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전쟁중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1공화국이 정치를 치밀하게 하지 못한 이유에 발생했다.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2번의 반민주적인 개헌이 이루어졌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거기에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어 죽이는 사법살인{{ㅊ|현대판 의금부}}이 있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승만은 조선의 [[광해군|누군가]]와 많이 비슷하다. {{ㅊ|둘다 외교는 잘했는데 내치는 쓰레기}}
 
거기에 [[3·15 부정선거]]로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꿈꾸었다. 이에 더이상 참지 못한 국민들이 [[4·19 혁명]]을 일으킨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졌지만 또한 붕괴하여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한다. 잘한 점 못한 점이 각각 있는 정권이었다.{{ㅊ|물론 못한 점이 더 많다}}
 
==참고문헌==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각주}}
{{문서 가져옴|대한민국/역사}}
[[분류: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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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중}} ==개요== 제1공화국은 {{날짜/출력|1948-7-17}} 제헌헌법이 공표되면서 시작했다.<ref>제헌 국회는 {{날짜/출력|1948-5-10}} 선거로 뽑혔으니 엄밀히 말해 제1공화국 때 일어난 것은 아니다.</ref> 중요 사건으로는 6·25 전쟁과 [[4·19 혁명]]이 있다. ==사건== ===농지개혁법=== {{본문|농지개혁법}} {{날짜/출력|1949-06-21}}에 제정된 법안. [[1949년]]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토지를 배분한다. 이에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며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실질적인 시행은 [[1950년]] 5월에 이루어진다.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형식으로. 지주들에게 시가증권을 주어 토지를 매수한 후<ref>후에 6·25전쟁으로 휴지조각이 된다.</ref> 이를 유상분배했다. 유상분배의 경우 5년간 30%를 낸 후 온전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6·25 전쟁=== {{본문|6·25 전쟁}} {{날짜/출력|1950-6-25}} 북한은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였고, 곧 서울을 거의 저항 하나 없이 북한에게 내준다. 이로 인해 많은 남한의 인사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고, 결국 [[8월 12일]]즈음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기살기로 버텼다. 곧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던 순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확 기울었고, 남한군과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해 곧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에는 북한의 수비를 뚫고 [[평양직할시|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한 주도의 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본 [[중국]]은 [[10월 25일]] 북한 측에 참여하였고, [[11월]] 중순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의 다시 북한 측으로 넘어갔고, 해를 지나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다시 북한이 점령한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화성시|화성]]-[[여주시|여주]]-[[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를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연합군 측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여 서울을 수복하였고, [[6월]] 즈음부터는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한국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리셋시켰다. 그나마 있던 남한의 산업은 거의 다 갈아엎어졌고, 피난으로 대이동이 일어나 기존의 양반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확실하게 없앴으며, 또한 지방 유지들과 실권자들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존 사회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대거 사형, 실종, 또는 전사하면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3·15 부정선거=== {{본문|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집권세력인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비록 입지가 많이 낮아졌어도 당선은 무난할 것 같았다. 심지어 경쟁자인 민주당 조병옥은 선거 한 달 전 병사한다. 하지만 부통령 선거의 경우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인 장면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당시 자유당은 늙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을 중심으로 내각이 운영되었다. 1960년 3월의 부통령 선거 때 이기붕의 세력은 부정선거를 할 생각을 한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이끌던 권위주의체제에서 중앙의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내집단은 지방조직을 통제함으로 공무원, 경찰, 유권자를 선거에 동원할 수 있었다. 부정선거의 기획자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이 부정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가 생겼다. 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게 한다.{{ㅊ|뭣이}} 이에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 아주 대놓고 부정선거를 한다. 농촌의 주민들에게 3인조 공개투표를 강요하였고, 군대에선 이승만을 찍은 사람이 120%{{ㅊ|120%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지}}, 또한 득표율은 당연히 조작되었다. 발표된 결과는 이승만 89%, 이기붕 79%였다. 특히 이기붕은 883만 대 184만으로 장면을 압도하는 수치였다. 이에 격분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니... ===4·19 혁명=== {{본문|4·19 혁명}} 부정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한다. 경찰은 시신을 바다에 버렸는데, [[4월 11일]] 시신이 발견된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데모를 벌이면서 재선거를 요구한다. 그 다음날인 19일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시위에 동참하고, 오후에 국회의사당 앞의 시위대 2000여 명이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향한다. 이에 경찰은 발포하고 21명이 사망, 172명이 부상당한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합세하고, 서울 전체에서 시위대의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이날 오후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군이 들어선다. 이 계엄사령부의 발표에서 이날 사망한 민간인은 111명, 경찰은 4명이었다. 부상자는 민간인에서 558명, 경찰은 169명이었다. 20일에 계엄령 때문에 서울은 일단 멈추었지만 대구나 인천, 전주 등에서는 학생 데모가 계속됐다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날 오후 27개 대학 285명의 교수들은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 다음날인 26일 시위하는 군중들이 다시 서울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며, 이들이 경무대로 갈 때 그 수가 이미 10만을 넘었다. 이에 이승만이 {{인용문|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이승만}} 라는 성명을 발표,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27일 경무대를 떠나 사저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가게 된다. 이승만은 다시 귀국할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결국 귀국하지 못하며 [[1965년]]에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한다. ====4·19 혁명의 의의==== 4·19 혁명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민이 봉기하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다.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는 신분제 사회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세금만 냈지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서야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었다. 이 국민이 일어나 정부를 무너뜨린 4·19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민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제1공화국의 영향== ===긍정적인 면=== 일단 외교는 잘했다. 이는 무시못할 외교 감각을 지닌 [[이승만]]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문서를 자세히 보면 알수 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는 이승만의 외교력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6·25전쟁 때도 작전권을 국군에서 UN군사령부로 확실하게 넘겨버려서 미군과 UN군이 6·25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은 아예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온갖 정치적 수단을 사용해 대한민국이 서방 자본주의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생국 대항민국은 나라의 보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거지 미국에 무조건적인 친미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공포로 석방해서 미국 빡치게 하는 짓은 왜 했다는 것인가? 또한 이승만이 고른 인사중에 친일 행위를 한 적적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이승만 본인은 일본을 극히 혐호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일본군도 한반도에 상륙시키려 하자, '''북한군 죽이기 전에 일본군부터 죽일 것'''이라며 반대한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공산주의가 절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농지개혁법]]을 제정한다. 농지개혁법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의 토지배분 선전에 농민들이 공산군에 편붙는 것을 막았다. 농지개혁법은 한국민주당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한다. ===부정적인 면=== 아무리 좋은 점이 있어도 잘못한 점이 너무 많아서 이것이 묻혀버린다. 일부 지식인들이 이승만의 업적을 재평가하며 이러한 잘못에 면벌부를 요구하나 잘한 건 잘한 거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다. 우선 6·25 전쟁에서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며 생업에 종사하라더니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린다. 다만 전쟁의 책임을 제1공화국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6·25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지 제1공화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고 그곳에서도 [[발췌개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는 등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전쟁중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1공화국이 정치를 치밀하게 하지 못한 이유에 발생했다.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2번의 반민주적인 개헌이 이루어졌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거기에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어 죽이는 사법살인{{ㅊ|현대판 의금부}}이 있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승만은 조선의 [[광해군|누군가]]와 많이 비슷하다. {{ㅊ|둘다 외교는 잘했는데 내치는 쓰레기}} 거기에 [[3·15 부정선거]]로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꿈꾸었다. 이에 더이상 참지 못한 국민들이 [[4·19 혁명]]을 일으킨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졌지만 또한 붕괴하여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한다. 잘한 점 못한 점이 각각 있는 정권이었다.{{ㅊ|물론 못한 점이 더 많다}} ==참고문헌==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각주}} {{문서 가져옴|대한민국/역사}} [[분류: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편집 후 새 문서의 위키텍스트 (new_wikitext)
'#넘겨주기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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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 +1 @@ -{{토론중}} -==개요== -제1공화국은 {{날짜/출력|1948-7-17}} 제헌헌법이 공표되면서 시작했다.<ref>제헌 국회는 {{날짜/출력|1948-5-10}} 선거로 뽑혔으니 엄밀히 말해 제1공화국 때 일어난 것은 아니다.</ref> 중요 사건으로는 6·25 전쟁과 [[4·19 혁명]]이 있다. -==사건== -===농지개혁법=== -{{본문|농지개혁법}} -{{날짜/출력|1949-06-21}}에 제정된 법안. [[1949년]]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토지를 배분한다. 이에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며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실질적인 시행은 [[1950년]] 5월에 이루어진다.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형식으로. 지주들에게 시가증권을 주어 토지를 매수한 후<ref>후에 6·25전쟁으로 휴지조각이 된다.</ref> 이를 유상분배했다. 유상분배의 경우 5년간 30%를 낸 후 온전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6·25 전쟁=== -{{본문|6·25 전쟁}} -{{날짜/출력|1950-6-25}} 북한은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였고, 곧 서울을 거의 저항 하나 없이 북한에게 내준다. 이로 인해 많은 남한의 인사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고, 결국 [[8월 12일]]즈음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기살기로 버텼다. - -곧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던 순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확 기울었고, 남한군과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해 곧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에는 북한의 수비를 뚫고 [[평양직할시|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한 주도의 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본 [[중국]]은 [[10월 25일]] 북한 측에 참여하였고, [[11월]] 중순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의 다시 북한 측으로 넘어갔고, 해를 지나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다시 북한이 점령한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화성시|화성]]-[[여주시|여주]]-[[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를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연합군 측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여 서울을 수복하였고, [[6월]] 즈음부터는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한국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리셋시켰다. 그나마 있던 남한의 산업은 거의 다 갈아엎어졌고, 피난으로 대이동이 일어나 기존의 양반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확실하게 없앴으며, 또한 지방 유지들과 실권자들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존 사회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대거 사형, 실종, 또는 전사하면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3·15 부정선거=== -{{본문|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집권세력인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비록 입지가 많이 낮아졌어도 당선은 무난할 것 같았다. 심지어 경쟁자인 민주당 조병옥은 선거 한 달 전 병사한다. 하지만 부통령 선거의 경우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인 장면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당시 자유당은 늙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을 중심으로 내각이 운영되었다. - -1960년 3월의 부통령 선거 때 이기붕의 세력은 부정선거를 할 생각을 한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이끌던 권위주의체제에서 중앙의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내집단은 지방조직을 통제함으로 공무원, 경찰, 유권자를 선거에 동원할 수 있었다. 부정선거의 기획자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이 부정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가 생겼다. 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게 한다.{{ㅊ|뭣이}} 이에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 -[[3월 15일]], 아주 대놓고 부정선거를 한다. 농촌의 주민들에게 3인조 공개투표를 강요하였고, 군대에선 이승만을 찍은 사람이 120%{{ㅊ|120%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지}}, 또한 득표율은 당연히 조작되었다. 발표된 결과는 이승만 89%, 이기붕 79%였다. 특히 이기붕은 883만 대 184만으로 장면을 압도하는 수치였다. 이에 격분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니... -===4·19 혁명=== -{{본문|4·19 혁명}} -부정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한다. 경찰은 시신을 바다에 버렸는데, [[4월 11일]] 시신이 발견된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데모를 벌이면서 재선거를 요구한다. - -그 다음날인 19일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시위에 동참하고, 오후에 국회의사당 앞의 시위대 2000여 명이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향한다. 이에 경찰은 발포하고 21명이 사망, 172명이 부상당한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합세하고, 서울 전체에서 시위대의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이날 오후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군이 들어선다. 이 계엄사령부의 발표에서 이날 사망한 민간인은 111명, 경찰은 4명이었다. 부상자는 민간인에서 558명, 경찰은 169명이었다. - -20일에 계엄령 때문에 서울은 일단 멈추었지만 대구나 인천, 전주 등에서는 학생 데모가 계속됐다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날 오후 27개 대학 285명의 교수들은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 다음날인 26일 시위하는 군중들이 다시 서울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며, 이들이 경무대로 갈 때 그 수가 이미 10만을 넘었다. 이에 이승만이 -{{인용문|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이승만}} -라는 성명을 발표,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27일 경무대를 떠나 사저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가게 된다. 이승만은 다시 귀국할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결국 귀국하지 못하며 [[1965년]]에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한다. -====4·19 혁명의 의의==== -4·19 혁명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민이 봉기하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다.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는 신분제 사회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세금만 냈지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서야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었다. 이 국민이 일어나 정부를 무너뜨린 4·19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민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제1공화국의 영향== -===긍정적인 면=== -일단 외교는 잘했다. 이는 무시못할 외교 감각을 지닌 [[이승만]]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문서를 자세히 보면 알수 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는 이승만의 외교력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6·25전쟁 때도 작전권을 국군에서 UN군사령부로 확실하게 넘겨버려서 미군과 UN군이 6·25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은 아예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온갖 정치적 수단을 사용해 대한민국이 서방 자본주의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생국 대항민국은 나라의 보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거지 미국에 무조건적인 친미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공포로 석방해서 미국 빡치게 하는 짓은 왜 했다는 것인가? 또한 이승만이 고른 인사중에 친일 행위를 한 적적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이승만 본인은 일본을 극히 혐호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일본군도 한반도에 상륙시키려 하자, '''북한군 죽이기 전에 일본군부터 죽일 것'''이라며 반대한다. -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공산주의가 절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농지개혁법]]을 제정한다. 농지개혁법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의 토지배분 선전에 농민들이 공산군에 편붙는 것을 막았다. 농지개혁법은 한국민주당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한다. -===부정적인 면=== -아무리 좋은 점이 있어도 잘못한 점이 너무 많아서 이것이 묻혀버린다. 일부 지식인들이 이승만의 업적을 재평가하며 이러한 잘못에 면벌부를 요구하나 잘한 건 잘한 거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다. - -우선 6·25 전쟁에서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며 생업에 종사하라더니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린다. 다만 전쟁의 책임을 제1공화국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6·25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지 제1공화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고 그곳에서도 [[발췌개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는 등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전쟁중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1공화국이 정치를 치밀하게 하지 못한 이유에 발생했다. - -이승만의 독재를 위해 2번의 반민주적인 개헌이 이루어졌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거기에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어 죽이는 사법살인{{ㅊ|현대판 의금부}}이 있기도 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승만은 조선의 [[광해군|누군가]]와 많이 비슷하다. {{ㅊ|둘다 외교는 잘했는데 내치는 쓰레기}} - -거기에 [[3·15 부정선거]]로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꿈꾸었다. 이에 더이상 참지 못한 국민들이 [[4·19 혁명]]을 일으킨다. -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졌지만 또한 붕괴하여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한다. 잘한 점 못한 점이 각각 있는 정권이었다.{{ㅊ|물론 못한 점이 더 많다}} - -==참고문헌==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각주}} -{{문서 가져옴|대한민국/역사}} -[[분류: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역사]] +#넘겨주기 [[제1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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